집중 강독 강좌 시즌 2, ‘베르그손의 <창조적 진화> 강독’이 시작되었습니다. 시즌 1의 <물질과 기억> 이후 한 달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베르그손. 이번에는 서문에서부터 더욱 강력한 문장들(아름답고 찰떡같은 비유들!)로 우리를 맞아주네요. <물질과 기억>도 저희에게 많은 영감과 생각거리를 남겨주었죠. 각자 하고 있는 공부와 연결되는 지점들이 많아서 여러 세미나에서 소환되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베르그손을 모르고는 토론에 끼지 못할 정도(!)라는 증언도 들려옵니다.^^
<창조적 진화>는 <물질과 기억>의 논의를 그대로 이어받으며 이를 ‘창조’의 영역으로 넓혀갑니다.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손은 물질과 정신의 이원론을 넘어가기 위해 ‘지속’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그 둘의 관계를 새롭게 규정합니다. 베르그손의 주요 개념인 ‘지속’은 첫 저작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데, <물질과 기억>에서는 ‘기억’으로, <창조적 진화>에서는 ‘창조’로 새로운 의미를 부각시킵니다. <창조적 진화>의 역자인 황수영 샘에 따르면, <창조적 진화>에서는 ‘창조’와 ‘진화’라는 모순적인 개념을 화해시키는데, 여기서 창조란 ‘연속적 변화 속의 질적 비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지속, 기억, 창조는 바로 이 ‘연속적 변화 속의 질적 비약’을 의미하는 다른 이름이고요.
지속, 쉼없이 변화하는 흐름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 세계는 지속으로서 존재합니다. <물질과 기억>에서는 ‘하나의 움직이는 연속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는데요. 우리는 지속으로서의 세계 속에서 지속으로서 존재하지만, 살기 위해서는 그런 세계를 분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잠시도 머무르지 않고 변화하는 세계 속에서 어떤 것을 머무르는 것으로, 변화하지 않는 덩어리로, 다른 것과 확실하게 구분되는 무언가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처럼 필요에 의해 분절하게 된 세계를 ‘실재 세계’라고 믿는 것입니다. 거기서 모든 오류가 생겨난다고 채운샘께서도 짚어주셨고요.
1장에서 베르그손은 ‘지속으로서의 세계’에 대해 주옥 같은 비유를 들어줍니다. 지속으로서의 세계는 곧 쉼없는 변화를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앞서 말한 지성(세계를 분절해서 받아들이는)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죠. 오직 변화가 너무 현저해서 우리의 주의에 고정될 때에만 인식할 뿐입니다. 이는 마치 “부드러운 사면밖에 없는 곳에서 우리가 주의작용의 단절된 선을 좇으면서 계단 위를 걷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 교향곡 속에서 이따금 울려 퍼지는 팀파니 소리들”(22쪽)에만 주의를 고정시키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변화들은 사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는 모든 것, 즉 주어진 한 순간에 우리 자신의 전존재를 포함하는 움직이는 영역으로부터 가장 잘 조명된 지점에 불과”한데 말입니다.(23쪽)
지속의 관점으로 보는 우리 ‘성격’에 관한 설명도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이 부분은 지난 시즌에도 샘께서 소개주셨는데요. 성격이 우리가 살아온 역사 전체, 나아가 출생 이전의 역사까지 응축한 것이라는 해석은 베르그손의 시간에 대한 관점과도 연결됩니다. 지속의 관점으로 보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일직선으로 흐르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지속은 기억이고 창조이지만, 또한 시간이기도 한데요. 베르그손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지속은 과거가 미래를 잠식하고, 전진하면서 부풀어 가는 부단한 과정이다. 과거가 끊임없이 증식하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무한히 보존된다.”(24쪽) <물질과 기억>에서 베르그손은 현재의 순간에 과거 전체가 함께 작용하는 원리를 상세히 설명합니다. 원뿔 도식은 그 작용을 한눈에 보여주는 그림으로 유명하죠. 현재의 순간에는 반드시 과거 전체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 과거 전체는 현재의 순간에 내가 무엇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주의를 기울이느냐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불려나옵니다.
이와 관련해서 샘께서 풀어주신 설명도 곰곰 생각해보게 됩니다. ‘우리는 과거 전체와 더불어서 현재에 무언가를 생산한다, 그게 바로 창발이고 질적 비약이다, 과거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물질적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창발해내는 것과 더불어서 지속하고, 과거 전체의 지속 속에서 현재의 창발을 이야기할 수 있다.’ 알듯 말듯 하지요? 제 식대로 정리해보면, 물질과 정신이 그러하듯 과거와 현재도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 같기도 합니다. 현재가 과거에 기대어 있을 뿐 아니라 과거도 “곧 그것에 합류하게 될 현재에 기대어”(24쪽)있다고 베르그손도 말하고 있지요. 현재의 창발과 더불어서 과거 전체가 지속하고, 과거 전체의 지속 속에서 현재의 창발이 가능합니다. 샘께서는 전체 과거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뭔가가 창발되는 거라고 하셨는데요, 지속하기 때문에 창발이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지속은 변화이고, 변화하지 않는 것은 지속할 수 없다는 것도 샘께서 여러 번 말씀하셨죠. 같은 맥락에서 ‘나’는 매순간 내가 아님으로써만 나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고요. 베르그손은 ‘부동적인 자아’라는 것이 우리가 인위적으로 구분하고 분리한 것들을 묶기 위해 요청된 ‘인위적인 끈’과도 같다고 설명합니다. 한마디로 자아는 관념이 만들어낸 거라는 거죠. 우리는 ‘유동적이고 불명확한 뉘앙스’로만 존재합니다. 이처럼 외부적인 것과 작용을 주고 받는 뉘앙스로만 존재하기에 전체와 구분이 되지 않는다는 샘의 설명도 기억에 남습니다. 분절되지 않은 전체, 운동하는 하나의 연속성으로서의 지속, 그 안에서 뭔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앞으로 읽어나가면서 계속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무기체와 유기체의 지속
부단히 변화하는 흐름이 지속이라고 하면, 우리 눈앞에 계속 똑같은 상태로 놓여 있는 물건들은 그런 흐름과는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변화하지 않는 무언가’는 우리 지성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낸 관념이라는 점을 앞에서도 언급했지요. 그에 더해 과학은 연구의 편이성을 위해 시간을 제거하고 물질계를 완벽하게 고립시켜 조작된 우리 믿음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하지만 베르그손은 물질계조차도 지속과 무관하지 않음을 그 유명한 설탕물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설탕물을 만드려면 설탕이 녹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때 설탕물은 나의 기다림과 분리될 수 없는 채로 존재합니다. 나의 기다림은 수학적 시간이 아닌 고유한 지속, 즉 다른 시간으로 환원할 수 없는 시간입니다. <물질과 기억>에서도 지속 속에서 물질과 정신이 분리되지 않은 채로 존재한다는 점을 다양한 방식으로 설명하는데요, <창조적 진화>의 1장에서도 물체의 윤곽, 물체의 개체성은 그 자체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줍니다.
물체가 지속과 무관하지 않다면 생명체는 더더욱 그렇겠지요. 그런데 물질은 우리 지각과 과학에 의해 고립되고 닫히지만, 생명체는 자연 자체에 의해 고립되고 닫혀 있다는 점을 베르그손은 지적합니다. 자연에 의해 고립되고 닫힌 ‘개체’는 상호 보완하는 이질적 부분들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함축하는 다양한 기능들을 수행합니다. 그런데 생명체의 개체성은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언제나 실현 과정에 있습니다. 그래서 베르그손은 개체성이 ‘상태들’이기보다는 ‘경향들’이라고 하지요. 재미있는 점은, 생명체의 개체화 경향이 그와 상반되는 생식의 경향과 상호 연계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생명체는 개체성을 희생하면서까지 종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생식에 대한 베르그손의 규정도 재미있습니다. “생식은 과거의 유기체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가지고 새로운 유기체를 재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개체성은 자신의 집 안에 적을 묵게 해주는 것이다. 시간 속에서 영속하려는 욕구 자체 때문에 개체성은 공간 속에서는 결코 완벽할 수 없게끔 단죄된다.”(39쪽) ‘나’라는 개체를 영속하려는 욕구는 자식을 낳게 하지만 자식은 나와는 다른 개체입니다. 이처럼 개체는 종종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지만, 유기체는 개체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점에서 무기체와 다릅니다.
따라서 생명체는 물질이기도 하지만 물질적 대상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일지도 모른다고 베르그손은 말합니다. 살아 있는 유기체는 물질적 대상이 아니라 차라리 ‘물질적 우주의 전체’와 동일시해야 한다고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전체로서의 우주처럼 살아 있는 유기체는 지속하는 것이라고. 그것의 과거 전체가 그것의 현재 속에 연장되어 거기서 현재화되고 작용하고 있다고. 그것이 바로 유기체가 일정한 단계들을 거치며 나이를 먹는다는 것이고, 결국 역사를 갖는다는 것이라고. 지속하는 우주 속에서 지속하는 존재로서 끊임없이 뭔가를 창조하는 것이 바로 ‘성숙’이고 ‘노화’라는 해석은 우리 관념을 흔들어놓습니다. 늙는다는 건 무엇이며, 뭐가 늙는 걸까요. 계속 새로움이 더해지는 것이 노화인데 우리는 왜 노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걸까요. 샘께서 던져주신 질문도 마음에 남습니다. 이렇게 베르그손 강독은 이번에도 처음부터 저희에게 생각거리를 풍성하게 남겨주네요.
다음 시간에 1장 끝까지(157쪽) 읽고 만나요!
꼼꼼하게 정리된 후기를 읽으니, 정말 엄청난 얘기들이 나왔었구나 복기가 되네요!
'창조'와 '진화', 연속과 창발, 우리의 (공간중심적) 지성에서는 아무래도 대립되는 용어들인데 베르그손은 세계의 '지속'을 설명하기 위해 둘 모두를 (고장내며) 사용하는 것 같네요.
'개체'라는 용어를 둘러싸고도 그것이 어떻게 윤곽선으로 분리 불가능한 것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은 멋짐 그 자체입니다...
베르그손의 묵직하면서도 아름다운(!) 글들은 소화는 쉽지 않지만, 읽으면서 작은 스파크들을 일으키고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