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양 고대 사상의 지도 네 번째 시간 후기입니다.
수업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한다는 기분으로 요약하면서 후기를 대신해볼까 합니다.
주변의 사유를 하다 보면 중심이 다르게 보이기도 한다라는 이야기로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양 철학은 보통 플라톤에서부터 시작을 하고, 그 이전 사유는 단순하고 직관적인 문제 제기 수준으로 다루어지곤 하는데, 소크라테스 이전의 사유를 보다 보면 인간이 이후에 던지게 되는 아주 많은 철학적 질문의 기본적인 것들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문제 인식들에 다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변화란 무엇일까? 세상이 무엇일까? 물질과 운동이 같은 것일까? 다른 것일까? 더 근본적으로는 철학이라는 게 무엇일까? 철학적 질문이란 무엇일까? 이 세계는 무엇인가?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기원전 6세기, 축의 시대라고 불리는 이 무렵에 인간의 의식이 어마어마하게 확장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질문이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는 그 질문 중의 하나를 주욱 보면 되는데, 그 중 오늘 우리가 먼저 볼 질문은 파르메니데스가 던지는 질문입니다.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 상대적으로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귤이 있다.’ ‘신뢰가 있다.’에서 ‘있다’는 같은 ‘있다’인가? 그럼, ‘없다’는 것은 ‘있지 않다’는 것인가? 있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는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것과 일치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논리적 모순을 다 쳐내고 논리로 사유해야 하며, 논리적으로 사유할 수 없다면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세계는 있는 것에서 있는 것을 사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과 같은 존재를 끌어와야 하기 때문에 이는 논리적 모순인 것입니다. 존재와 사유가 일치해야 하며, 사유한다는 것은 있기 때문에 사유하는 것입니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영원하며 무시간적인 것입니다. 존재의 징표는 운동하지 않음, 변화하지 않음, 제한되어 있음, 완성되어 있음, 균일함, 통짜임, 분해할 수 없음, 시공 연속적임, 탄생하지 않음, 소멸하지 않음 등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은 감각에 따라 판단하기 마련입니다. 감각은 눈에 안보이면 없다고 생각하지만, 존재는 단지 감각이 파악하지 못할 뿐 늘지도 줄지도 않고 존재하는 것입니다. 감각 데이터로 진리를 구성하는 것은 오류에 빠지게 마련이니 경험적 방식으로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논리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해야 한다고 파르메니데스는 말합니다.
포스트-파르메니데스 세대는 어떻게 논리의 모순을 만들지 않으면서 경험하는 현상세계를 끌어안을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하여 자연철학자들은 세계를 쪼개기 시작합니다. 일자를 여러 개로 나누는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죠.
엠페도클레스는 일자는 넷이라는 주장을 제시합니다. 세계는 물, 불, 공기, 흙이라는 네 개의 뿌리로 이루어졌으며 만물은 이 네 요소들이 특정한 산술관계를 맺으면서 혼합, 분리된 결과이고, 탄생도 소명도 없고, 혼합과 분리만이 있을 뿐이라 합니다. 이 운동의 원인에서 최초로 '힘'의 문제가 등장합니다. 사랑(인력)과 미움(척력)이라는 두 가지의 외적인 힘에 의해 세계는 합쳐지기도 하고 분리되기도 한다고 설명합니다. 또한 이런 세계의 인식은 물리적 접촉을 통해 일어나며 두 입자 사이의 일치를 통해 쾌와 불쾌가 형성된다고 말합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인간의 감각과 지각이 불완전하며 진리의 기준을 감각이 아니라 올바른 사유라고 보았지만,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관찰하여 사유가 미치는 곳까지 사유하면 거기에 진리가 있다고 강조합니다. 자기의 관점 속에 머물러 버리는 것은 다하는 것이 아니며, 온갖 각도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 해보는 것이 다하는 것이라는 주역의 '다할 진'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정화>에서 자신의 시대가 불화와 미망으로 가득찬 무도의 시대라고 말하며 고통스럽게 반복되는 환생의 고리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정화의 규칙을 지켜나가면서 이 시간을 견디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정화의 규칙이란 함부로 살지 않는 것, 되는 대로 욕망에 이끌려 살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낙사고라스도 어떤 사물도 생겨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나 하나에서 다른 하나가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 안에 부분으로 들어있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사물이 다른 것은 그 안에 구성요소 중 어느 하나가 양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인데 물질의 분리를 야기하는 최초의 운동으로 'nous'를 얘기합니다. 동양의 '이치 리'와 비슷한 개념으로 'nous'는 최초의 충격으로 세계에 질서를 부여했으며 우주의 발전은 이 정신적 원리를 내재한 채 이에 따라 움직인다고 보았습니다.
이해하고 따라가는 것이 마냥 쉽지는 않지만, 기원전부터 이 세계에 대해, 진리에 대해 탐구하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철학자들의 사유가 흥미로웠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어떤 철학자들의 어떤 사유들이 등장하게 될까 기대가 됩니다. 그 때까지 앞의 내용을 까먹지 않기를 바라며 후기를 마칩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게 왜 그렇게 일어나는지 이해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 초월자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 있는 사유를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이 나올 수 없다는 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애초에 질문할 필요도 없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건 곧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든 이해하겠다는 발심인 것 같았고요. 어디서 어줍잖게 변화를 거부한 철학자라고만 들었는데, 어찌보면 사유의 기본틀을 마련한 선구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매시간 철학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그 유년기부터 차근차근 배우고 있는 것 같아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