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그손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로부터 철학을 시작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언제나 존재의 원인을 그 존재하는 장 바깥에서 찾고자 하는 초월적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우리는 어떻게 상호작용들과 더불어 이렇게 존재하는가?”라고 물으며 거기에 최선을 다해 답했고 그러자 신학적 그림자를 드리운 ‘왜’라는 문제는 사라졌습니다. 베르그손은 과학의 뿌리 위에서 철학의 열매를 영글게 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그는 과학이 발견해낸 ‘사실의 선들’ 위에서 작업합니다. 실증성의 차원에 머무는 것, 그것은 과학의 역할이자 한계입니다. 그 성과들을 따라가며 의미를 부여하고, 우리의 사고 구조와 행동 양식에 새롭게 질문을 던지며 윤리를 요청하는 것은 철학의 몫이죠. 베르그손의 철학은 그 어느 철학보다도 철저하게 과학과 부응하며 그 역할을 해냅니다. <물질과 기억>에서는 뇌과학의 성과들을 적극 이용해 실재론과 관념론이라는 양극을 넘어 물질-정신의 일원성을 밝혔다면, <창조적 진화>에서는 진화론과 생물학의 연구들을 오가며 기계론과 목적론이 놓치고 있는 생명의 연속성-창발성을 사유합니다. 이 작업들은 가장 단순한 수준에서조차 우리의 ‘현재 행위’가 가진 창조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윤리적 중대성을 갖습니다.
생명이라는 큰 흐름
“어떤 순간, 공간의 어떤 지점에서 아주 뚜렷한 하나의 흐름이 탄생했다. 이 생명의 흐름은 물체들을 통과하고 그것들을 차례로 유기화하면서, 세대에서 세대를 거치고, 자신의 힘에서 아무것도 잃지 않고 전진함에 따라 더욱 강렬해지면서, 종들로 나누어지고 개체들로 흩어져 왔다.”(58쪽)
대체 생명life이란 무엇일까요? 생명은 생명체일까요? 목숨일까요? 아니면 자연 전체일까요? 베르그손은 생명을 생명체의 소유물이나 추상적 관념이 아닌 하나의 실재로 보자고 말합니다. 분기되고 전진하며 나아가는, ‘진화’하고 있는 동시에 ‘창조’하고 있는 흐름들로요. 잠깐, 어떻게 점진적 이어짐을 말하는 진화와 단절적 도약을 말하는 창조라는 ‘동시’일 수 있죠? 이는 어떤 것이 연속적인 동시에 불연속적이라는 의미인데, 그 상반되어 보이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자리가 생명입니다. 어쩐지 더 아리송한데, 차차 알아가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아직 유전자 유전학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 베르그손은 바이스만의 ‘생식질 연계설’에서 생명에 대한 영감을 얻습니다. 이는 생식으로 세대가 바뀔 때, 분화되지 않은 잠재적인 어떤 질이 정보처럼 전달되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이에 따르면 성체는 매개일 뿐이죠. 생명은 그렇게 분화되어 드러나는 개체를 매질 삼아 배(胚)에서 배로 이어지는 단절 없는 내재적 흐름입니다. 유기체는 수면 위로 돌출된 혹이나 싹일 뿐이죠. 생명은 개체를 무한히 초월합니다. 즉 삶은 ‘나’를 흘러넘치죠. “눈에 보이는 각 유기체는 자신에게 살도록 주어진 짧은 시간의 간격 동안 보이지 않는 과정 위에 말을 타듯 걸터앉아 있다.”(59쪽)
하지만 문제는 이 쉼 없는 전달에는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le이 동반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생겨나는 것과 생겨나게 한 것 사이에는 공통분모가 없다는 것이죠. 즉 매번 다른 것이 생겨납니다. 단절은 없으나 반복은 아니라는 것이죠. 생명의 흐름에서 유전되는 것은 차이입니다. 이는 매번 다른 운동의 평면과 호응하며 기억이 응집되고 있는 우리의 심리적 삶이 이전의 어떤 순간과도 동일할 수 없음을 생각해보면 쉽습니다. 그렇기에 생명의 흐름은 흘러감에도 불구하고 항시 독창적이고 비가역적이며 예측이 불가능합니다. ‘창조적 진화’는 우선 생명의 이런 진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극단적 기계론과 극단적 목적론을 넘어
생명의 흐름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기계론이 무력한 이유는 분명합니다. 시간의 문제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혹은 시간을 아주 단순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기계적 설명의 본질은 사실상 미래와 과거를 현재의 함수로 계산할 수 있다고 간주하고, 그렇게 해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74쪽) 기계론에 기반한 물리학과 과학은 언제나 고립계를 가정합니다. 우리가 고려할 수 있는(혹은 아직 고려하지 못하는) 특정한 변수들과 요소들 안에서 작용과 반작용이 일어나며, 현재 순간 t의 상태는 이전 순간 t-1의 상태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다음 순간 t+1 역시 연역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이런 발상에서 시간은 추상에 불과합니다. 마치 동영상의 스크롤처럼 뒤로 갔다 앞으로 갔다 할 수 있는 선형적 틀에 지나지 않습니다. “시간은 거기서 효력을 잃고 있으며,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닌 것”(76쪽)이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시간, 설탕물이 녹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이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과거가 끊임없이 침투하고 동시에 과거로 침투하고 있는 역동적인 콜라보레이션의 장입니다. 비가역적이고 예측이 불가능한, 그런 점에서 창조적인 흐름입니다. 이런 지속을 일종의 심리적 착각으로 치부할 뿐 설명해내지 못하는 이론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우리는 체계의 요구들에 경험을 희생할 수는 없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극단적 기계론을 배격한다.”(77쪽)
목적론은 기계론을 거꾸로 뒤집은 형태입니다. 현상들의 진행을 이끌어 낼 지도를 과거가 아니라 미래쪽에 놓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라이프니츠 식의 극단적 목적론은 “사물과 존재들이 일단 그려진 계획을 실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의미”(77쪽)하며 여기서도 역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가정되지요. ‘최선의 세계’로 짜여 있는 조화 속에서 시간은 무력해집니다. 물론 자연 안에는 전혀 조화롭지 않아 보이는 사건들이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지진, 싸움, 악을 들어 라이프니츠를 반박했죠. 그렇게 해서 목적론은 내적인 것(유기체의 복잡한 생리 질서, 역할 분담, 연대성 등)으로 축소되었습니다. “각 존재는 자기 자신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모든 부분은 전체의 최대선을 위해 협동하며 이러한 목적을 위해 지성적으로 조직되어 있다는”(79쪽) 수준에서 말이죠. 어쨌든 내 삶과 몸의 이런 기관들은 나름의 목적들을 담지하고 있다는 이런 생각은 우리 일상에 밀접하며 반박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유기체의 각 기관들 역시도 고장이 나고 언제나 부조화를 일으킨다는 것을 우리는 암세포나 변이들로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균열과 요동은 분자나 원자 수준으로 내려가도 늘 생겨나지요. 목적론은 아무리 범위가 좁아져도 자연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자연 속에는 순수하게 내적인 목적성도 없고 절대적으로 구분된 개체성도 없다는 사실 때문”(82쪽)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론을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계는 분명 어떤 질서들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체들로 매개되는 생명 전체는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상당한 부조화를 포함하는데도 불구하고요. 베르그손은 목적론에서 초월적 색채를 걷어내고 그것을 “아주 다른 의미로 변형 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할까요?
지성의 가장자리와 창조의 문제
목적론과 기계론의 오류는 자연을 지성의 틀에 우겨 넣는 데에 있습니다. 지성은 선을 점들의 연결로 파악하며, 인과 법칙 안에서 작업합니다. 인과성의 개념이 필연적이 될수록 세상은 수학적으로 표상됩니다. 그렇기에 ‘자연 법칙’이 작동하는 자연 속에서는 같은 것이 재생산됩니다. ‘같은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같은 것이 필요하다’는 원칙이죠. 이는 곧 ‘모든 것이 주어졌다’는 결론으로 나아가며, 여기서 시간은 백지화됩니다. 그렇기에 기계론과 목적론은 모두 “사물의 진행에서 또는 단지 생명의 전개에서 예측 불가능한 형태의 창조를 보는 것을 혐오”(85쪽)하게 되죠. 하지만 베르그손이 말하는 실재적 시간은 그렇게 무력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콩 심은 데서 콩 나는 작용-반작용, 즉 같은 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그건 지성의 시야에 지나지 않지요. 지성은 시간의 밖에 위치하는 것입니다.
“실재적 지속은 사물들을 갉아먹고 거기에 자신의 잇자국을 남기는 어떤 것이다. 만약 모든 것이 시간 속에 있다면 모든 것은 내적으로 변화하며, 동일한 구체적 실재는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따라서 반복은 추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반복되는 것은 우리 감관, 특히 우리의 지성이 실재로부터 떼어낸 이러저러한 국면들이다. (...) 지성은 반복되는 것 위에 집중하고 같은 것을 같은 것에 접합시키는 데만 몰두해서 시간의 시야에 등을 돌린다.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자신이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한다.”(87쪽)
중요한 점은 우리에게 세계는 지성의 방식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재적 시간은 지성으로 사유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체험한다. 생명은 지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87쪽) 지성이 사유하는 것은 지속의 평면에 응집된 부분들, 핵들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초점을 맞추어 포착되고 파악되는 핵이 있기 위해서는 언제나 초점에 들어오지 않는 가장자리가 현존해야만 합니다. 핵이 표면이라면 가장자리는 심층이지요. 직관은 바로 지성이 주목하지 못하는 가장자리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장자리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이 무용한 가장자리는 실제로 우리의 유기조직의 특수한 형태로 수축되지 않은, 그리고 몰래 숨어들어온, 진화하는 원리의 일부분이 아니라면 무엇이 되겠는가? 따라서 우리 사유의 지적 형식을 확장하기 위한 정보를 찾으러 가야 할 곳은 바로 거기이다. 바로 거기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넘어서는데 필요한 약동을 길어낼 수 있을 것이다.”(92쪽)
여전히 아리송합니다만, 가장자리는 조화에 침투해 들어가는 부조화가 현존하는 곳, 진화의 흐름에서 분출되는 약동이 길어 올려지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실재란 이러한 가장자리들 전체를 포함합니다. 실재는 “스스로 확장되어 자신을 초월하는 결과들을 창조하고 생산하는 것입니다.”(96쪽)
아직도 많은 것들이 혼미한 가운데, 베르그손이 목적론을 어떻게 수정해서 자신의 생명 이론과 연결시키고 있는지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찬찬히, 여러 번 다시 읽어보아야 하겠습니다!
핵과 가장자리의 관계가 흥미로웠습니다. 과학적 사고를 지향하는 우리는 핵의 유용성에만 관심을 갖는 경향이 있지요. 그럴수록 우리는 표층에 머물면서 지성을 쌓는 것에 '최선'을 다하려 하지만, 이 세계를 궁극적으로 이해하려면 '무용한 가장자리', 즉 심층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인데요... 무용한 가장자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심층과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어쩌면 유용과 무용의 문제는 인간의 관점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어딘가 모르게 베르그손의 창조는 동양적 사유와 유사한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유용함과 무용함, 쓸모있음과 쓸모없음 등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야 하겠는데...
이번 주에도 우리 지성의 습관적인 흐름을 멈추게 하는 주옥 같은 문장들이 쏟아졌던 것 같습니다. 후기 중간중간 뽑아주신 인용문들을 읽으면서도 다시 감탄하게 되네요^^
"유기체는 수면 위로 돌출된 혹이나 싹일 뿐"이라는 말, 생명의 본질은 개체성이 아니라 개체를 매개로 무한히 이어지는 흐름이라는 말이 다시금 마음에 남습니다. 공부하며 무수히 듣게 되는 말인데도 '나'를 중심에 두는 습관은 어찌나 강한지 자주 일깨우지 않으면 금세 또 까먹네요..
후기 감사해요 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