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후기 –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중심으로 정리하였습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다양한 감각의 세계와 그 세계에 내재해 있는 운동의 원리를 밝혀내려고 했으며 그러한 시도가 철학을 발생시켰습니다. 앞선 시간에 배웠던 파르메니데스가 ‘있음 그 자체’의 세계만을 인정하겠다는 의미로 ‘있던 것이 없어질 수 없고 없음에서 있는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을 한 이후, ‘있음 그 자체의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 되었습니다.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 등 철학자들의 사유도 그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나름의 해석이었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도 그 일환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원자(atom),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으로 이 세계를 설명합니다. 점묘법으로 유명한 쇠라의 그림처럼 하나의 형태를 쪼개 들어가면 점으로 이루어졌듯, 세상은 원자로 가득 차있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러한 원자들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봅니다. 이러한 사유는 에피쿠로스학파까지 이어졌으며 현대의 입자론도 데모크리토스의 사유틀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모크리토스 이론은 원자가 있고 원자들이 운동하는 허공이 있다는 두 가지를 전제합니다. 이때의 허공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운동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요청된 것입니다. 그에게 원자를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은 없습니다. 그저 '그런 원자가 있다'에서 시작합니다. 원자는 늘지도 줄지도 않고 다만 모양이 다르게 생겨서 다른 원자와 결합할 수 있습니다. 결합 시 원자의 결합 모양, 배치가 다르니까 다른 것들이 됩니다. 감각이 다른 것도 각기 다른 원자들의 만남으로 설명합니다. 그렇게 감각을 설명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그것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니라 원자들의 결합이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원자론적 세계관은 유물론에 입각한 설명이고 목적론적인 세계를 부정합니다. 목적론이란 행위의 원인을 행위 밖에 두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존재 이유를 세계 밖의 신에게서 찾는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인 것입니다. 그런 사유를 부정하기에 데모크리토스의 세계는 필연의 세계입니다. 우연이란 우리가 모를 뿐인 것이지, 모든 것은 원자들의 결합과 해체로 이루어진 필연 입니다.
이러한 사유는 로마시기 에피쿠로스 철학까지 지속되다가 기독교 철학 시기에는 철저히 부정 됩니다. ‘이 세계를 만든 것이 신’이기에 이러한 자연철학자의 이론은 받아 들여지지 못하고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만 변형되어 일부 수용됩니다. 그러다가 그리스 철학의 텍스트가 다시 발견되는 르네상스 시기에, 중세에 거부된 유물론자의 텍스트가 알려집니다. 그렇게 인간이 신의 세계에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면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를 묻는 르네상스 시대가 오고 17세기 과학혁명이 시작됩니다. 그 출발점에 유물론자들의 텍스트가 있었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이 새삼 대단하고도 생생하게 느껴졌습니다. 시대적 조건의 한계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통찰, 직관 만으로 이런 가설을 제시했다니 인간의 지적 능력은 오히려 줄어들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철학사를 공부하면서 이런 가설들을 쭉 시대 별로 이해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읽는 자신과 무관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 때는 우주, 자연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삶의 태도와 직결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집착하는 그것이 원자들의 결합일 뿐이라고 이해한다면 다른 삶의 태도를 가질 수도 있다. 자연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지 않기에 스스로 자신의 윤리를 구성하지 못하고 남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다. 어른이라면 자기 스스로 자신의 윤리의 근거를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고 공부 하는 것이다’는 채운샘의 말씀이 마음에 남습니다.
저희 주역에서도 고대철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그들의 고민 지점을 보는 것이 저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세계를 관통하는 통일성을 찾고 싶었던 자연철학자들과 이를 인간에 대입해 인간을 관통하는 보편성을 '지성' 이라고 찾아가는 철학 여정이 있었구요. 그 여정의 근간에 자신이 어떤 윤리 속에서 살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있다는 것도 알았구요.
정희샘을 이렇게 후기로 만나니 반가워서리 ..... ㅎㅎ 샘, 담백한 후기 잘 읽었어요~~~
어떤 사유가 흥하고, 망(?)하는 데에도 시대적 조건이 크게 작용한다는 게 인상적이네요. 고대에 발명됐다고 해서 고루한 것도 아니고, 비교적 최근에 발명됐다고 해서 꼭 세련된 것도 아니었죠. 데모크리토스의 사유는 고대 그리스에 발명된 것이었음에도 쇠라의 점묘법과 비슷한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죠. 게다가 삶을 일체의 초월적 목적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노력은 지금 규문의 한 청년에게도 이어졌죠. ㅋㅋㅋ 어떻게 보면, 어떤 사유가 지금 살아났느냐에 따라 지금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알 수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자신의 윤리를 구성하기 위해 지난 지성을 배우는 '성숙'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걸까요? 후후.
데모크리토스가 발명해낸 원자&허공의 개념은 아직까지도 그 윤리적 잠재성이 엄청난 것 같습니다! 획을 그엇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요.
인간의 지적 능력이 줄어들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에 끄덕이게 되면서도 뭔가 아쉽기도 하네요....
지나가다 들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