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의 의지> 강독 강좌 두 번째 시간도 뜨거운 열기 속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강의 시간 내내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펑펑 쏟아지는 진풍경이 펼쳐졌는데요. 그날 오후 연구실 식구들은 수북수북 쌓인 눈으로 엄청난 눈사람을 만들었다죠.(궁금하신 분은 요기
(http://qmun.co.kr/story/?uid=7291&mod=document)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권력에의 의지> 2권 1장을 읽고 만났는데요, 강의에서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니체 읽기의 어려움
샘께서는 강의를 시작하며 니체 읽기가 어려운 이유를 잠시 언급하셨는데요. 저는 니체를 처음 읽던 때가 떠오르면서 많이 공감이 되었습니다. 문장이 어려운 건 아닌데, 그렇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아리송한 부분도 많고, 걸리는 부분도 적지 않아서 애를 먹었던 기억이....; 그게 우리 자신이 니체와 힘겨루기를 하기 때문이라는 샘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우리는 관습의 체계 안에서 해석하려 하지만, 니체의 텍스트는 그 체계로 잡히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끊임없이 힘들의 투쟁이 일어나고, 그 투쟁은 우리 사유 체계를 흔들고 균열을 냅니다. 그러니 불편하고 힘이 드는 게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 끌리기도 하는 거고요.
또 하나 중요하게 짚어주신 점은, 니체의 텍스트에서 어떤 단어도 한 방향을 가지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데카당스’, ‘허무주의’인데요. 이 말은 굉장히 부정적인 의미도 있지만, 새로운 시작으로 갈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저는 이번에 이 점을 좀더 분명하게 이해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마치 공식처럼 니체의 허무주의가 능동적 허무주의와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뉜다는 식으로만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허무주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느 방향으로 가져가느냐가 문제라는 것. 삶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가져가느냐, 아니면 다른 길을 내는 방향으로 가져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모든 개념들은 다양한 방향을 가지며,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는 독자에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를 읽을 때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는 점도 짚어주셨어요. 샘도 니체를 읽을 때마다 매번 다른 느낌으로 읽게 된다고 하셨는데요. 어떤 상태에서, 어떤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읽느냐에 따라서 긍정적으로 읽히던 것이 부정적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더구나 니체 철학은 언어에 대한 깊은 회의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다고 하죠. 언어가 세계의 모든 것을 지시하는 기호라는 생각, 언어의 규정성을 의심합니다. 언어가 가진 기만성을 어떻게 언어를 통해 폭로할 것인가. 이는 니체가 끊임없이 고민했던 지점이자, 니체 철학이 내포하고 있는 투쟁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건은 두 가지의 징후
<권력에의 의지> 2권(‘이제까지의 최고의 가치에 대한 비판’)은 종교와 도덕과 철학 비판에 대한 내용이 3장에 걸쳐 이어집니다. 1장은 종교 비판인데요, 샘께서는 니체의 기독교 비판이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비판하고 있는 게 아니란 점을 짚어주셨죠. 니체는 기독교에 내재되어 있는 ‘가치의 전도’, 즉 약자를 강자처럼 만들어버리는 그 메커니즘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니체는 부르주아 문화의 기원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그 문화가 기독교 문화에 기반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어떻게 힘의 약화에 의존한 문화인가를 밝혀내는 일이 종교적 차원보다 중요했습니다. 자신도 그 문화의 수혜자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인데요. 자신에게도 유전된 그 약함의 문화와 어떻게 싸워갈 것인가의 문제는 니체가 철학을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고요. 자신을 살게 한 힘이 자신을 죽이는 힘으로도 작동할 수 있다는 것. 나를 구성하는 힘들은 나 자신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넘어가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것. 그걸 깨달았으니 골치가 아팠던 거라는 샘의 말씀에 어찌나 공감이 되던지요.
그래서 니체는 자기 안에서 계속 질문을 던집니다. 나를 이루는 기존의 힘들, 즉 관습이나 기존의 사유 방식 등은 다른 힘들도 동일한 방식으로 끌어들입니다. 니체는 그것이 자신을 약하게 만드는 병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겁니다. 하지만 허무주의가 몰락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시작에 대한 신호이듯이, ‘병’도 마찬가지죠. 샘도 여러 번 강조하셨지만, 어떤 것도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건 없고, 오직 어떤 방향으로 해석하는가만 있을 뿐입니다. 병은 내 신체의 배치를 흐트러뜨리는 것이지만, 동시에 낯선 힘의 존재를 일깨우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그런 힘들이 나를 구성한다는 걸 일깨우는 사건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낯선 힘을 제거하고 예전으로 돌아가려고만 하죠. 고집스럽게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번에 읽은 2권 1장에서 니체는 종교의 근원이 이런 낯선 힘들에 있다고 요약합니다. “낯설기 때문에 놀라게 하는 극단적 권력 감정”(139쪽)이라고 표현하는데요. 낯선 힘이 갑자기 나를 엄습하면 우리는 인격이 분열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 경험 앞에서 우리는 다시 두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애초에 우리가 그런 힘들의 산물임을(동일한 자아란 허구임을) 깨닫는 계기로 전환하거나, 아니면 자신을 무너뜨린 힘에 대한 굴복으로 나아가거나. 후자는 “비범한 행복감과 고양된 감정”(139쪽)을 가져다주기도 하는데, 이것이 바로 종교의 근원이라는 점을 니체는 보여줍니다.
이런 낯선 힘, 동일성을 해체하는 힘, 나를 변환시키는 힘을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보게 됩니다. 니체를 읽을 때면 약자와 강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되는데요, 샘도 강조하셨듯이 어떤 것을 약하게 만드는 자가 약자입니다. 어떤 것을 강한 방식으로 전환하는 자가 강자이고요. 동일한 것이 누군가에게는 약하게 하는 힘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강하게 하는 힘이 됩니다. 니체도 이렇게 말하죠. “소인들을 더욱 왜소하게 만드는 동일한 이유가 더 강하고 희귀한 자들을 위대함에 이를 때까지 끌어올린다.”(113쪽) 원래부터 강하거나 약한 힘, 좋거나 나쁜 사건이 있는 게 아닙니다. 그 힘, 그 사건과 관계하는 방식에 따라 약함과 강함이 결정됩니다. 그것을 자기 변환의 기회로 삼느냐, 자신을 고수하고 강화하는 기회로 삼느냐. 이번 주에 오랜만에 감기를 앓으면서, 병을 자기 변환의 기회로 삼는다는 게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네요.
어디서 어떻게 유래하는지 모를 낯설고 강력한 정서들(스피노자의 말처럼)에 섣불리 다른 원인을 부여하지 않기, 그것이 니체가 강함을 평가하는 기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모든 종교 감정은 약함이겠네요. 종교뿐 아니라 들이닥치는 사건들 앞에서 가해자와 희생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익숙한 인과를 부여하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일 듯합니다.
'동일성을 해체하는 힘', '모순', '나를 변환시키는 힘', '인격을 뒤흔드는 권력 감정' 앞에서 그것을 품고, 기다리고, 버티고, 즐기는 것의 강함....
어쩌면 모든 건강의 비결은 여기에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리송하고 반감이 드는 니체라는 텍스트가 콕콕 찌르면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그런 건강에의 발명 같기도 하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