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과 올해, 무려 두 해에 걸쳐 이어져 오고 있는 <권력에의 의지> 강독 강좌가 어느 새 절반이 지났네요! 제법 겨울 같은 날씨가 이어지는 와중에 후끈후끈한 열기가 식지 않고 있습니다. 방학 특강의 가장 큰 장점은, 학기 중에는 각기 다른 요일의 프로그램을 공부하시던 샘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복작복작 마주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겨울 사랑방 느낌도 나고요(좀 넓은 사랑방^^). 니체의 공덕이자 명륜동의 기운 덕이겠죠?
강자와 약자를 어떻게 재-해석할 것인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그렇게 함으로써 사람은 기껏해야 목자, 즉 무리가 요구하는 최고의 비상용품이 될 뿐이다), 자신을 위해 걸어갈 수 있는 것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 문제이다.”(니체, <권력에의 의지> 358절, 308쪽)
숙고하기. 이번 주 강의는 이 말로 강의를 시작되었습니다. 니체를 읽음에 있어서, 텍스트와의 그 마주침을 숙고할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서두르다보면 어디에도 이르지 못하지요. 심지어 니체의 표현이나 단어들에 매달려 그를 도그마화하거나 또 다른 도덕교사로 만들게 됩니다. 100년 전 나치가 그 극단을 보여줬죠. 니체는 위험합니다. 우리의 가치를 몰락시킨다는 점에서뿐만 아니라 우리를 말할 수 없이 파괴적으로 만들 수도 있다는 점에서요. 특히 그런 위태로움 위에 놓여있는 개념이 ‘강자’와 ‘약자’입니다. 위의 인용문은 이 개념들을 해석할 힌트를 줍니다. 앞서가는 것, 무리의 선두나 중심이 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함처럼 보이더라도 무리적이고 다수적입니다. 니체에게 문제는 다른 데 있습니다. 숙고하기에, “자기 자신을 위해 걸어갈 수 있음”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에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철학의 목표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강자/약자의 개념을 이해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들뢰즈의 다수성majority/소수성minority 개념을 참조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다수성은 수적 다수가 아니라, 중심을 향하려는 힘 혹은 기성의 가치를 원하는 힘의 방향성을 뜻합니다. 들뢰즈는 자기 수양적 변형으로서의 ‘-되기’ 개념을 말하며, 다수자-되기는 없다고 말합니다. 즉 남성-되기, 백인-되기, 어른-되기 따위 존재하지 않지요. 그것들은 기존 가치의 중심이자 척도에 해당하는 항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가치를 원하는 힘이야말로 무리적이며, 곧 약자적인 것이죠. 니체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걸어갈 수 있’고 ‘다르게 존재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미 중심으로 주어진 방향을 의심하고 거부하고 특이성singularity을 갖는 실존을 발명해야 합니다. 들뢰즈는 이런 추동력을 도주 혹은 소수자-되기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자기 배치와 결별하는 일이기에, 모방할 때조차 창조입니다. 요컨대 들뢰즈를 경유해서 보면 강자/약자의 문제는 곧 생성 또는 가치변형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강함/약함을 이해할 때 의문이 나는 또 다른 지점은 ‘고통’의 문제입니다. 니체는 말하곤 합니다. “[기독교의] 이 일반적인 인간 사랑은 실제로는 모든 고통 받는 자, 혜택을 받지 못한 자, 퇴화한 자를 우대하는 것이다.”(222쪽) 기독교 도덕이 무리적이고 약자적이라면, 고통을 받고 혜택에서 밀려난 자는 모두 약자인 걸까요? 특히 우리 시대에는 제도적이고 구조적인 상황에서 고통에 내몰린 자들이 있지 않을까요? 지난 시간 저의 이 질문에 대해 채운샘은 이렇게 보충해주셨습니다. 고통을 체험하고 있다고 해서 전부 약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도 고통을 받으셨죠. 니체 본인은 또 어땠고요. 그들은 고통의 한 가운데 있더라도 전혀 약자적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중요한 건 고통 받는다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가 무엇으로 고통 받는가’와 ‘누구의 고통인가’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상식에 의거해 ‘고통 받는 약자’를 규정합니다. 불우이웃, 차상위계층, 장애인, 후진국 등. 하지만 이 단어들 자체가 특정한 관점들을 전제합니다. 고통을 빈곤과 동일시하는 자는 제국주의자 혹은 물질주의자의 관점을, 장애를 떠올리는 자는 비장애중심주의자의 관점을 내면화하고 있던 것이죠. 그러나 그러한 다수적 가치들을 고스란히 반복하는 이들이야말로 약자에 가깝습니다.
하여 중요한 것은 “누구의 체험인가?”라는 질문 형식입니다. “공자님도 고통 받았고, 나도 고통 받았으므로 모두 똑같구나(공부가 소용없구나)!”라는 것은 가장 저열한 평등 관념입니다. 전혀 다른 고통입니다. 모든 것에 대해 그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구의 채식인가? 에코 트렌드를 따르거나 예쁜 몸매를 위해서 하는 자들과 비인간에 대한 살생의 구조에 저항하는 자들의 채식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죠. 복종이나 규율에 대해서도 똑같이 물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일변시키고 만물과 교감하는 신체가 되기 위한 훈련으로서의 규율인가 사람들의 시선이나 분위기에 못 이겨 따르는 굴종으로서의 규율인가는 천차만별입니다. 니체는 “길들이기와 약하게 만들기를 혼동하는 것보다 더 나쁜 혼동은 없다”(335쪽)고 말한 바 있습니다. 어떤 행위건, 그것을 하는 이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무엇을 원하면서 그것을 하는지만이 중요합니다. 즉 언제나 권력에의 의지가 중요한 것이죠. 니체의 용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는 저희의 사회적-경험적-감성적 배치 속에서 매번의 해석을 요구받습니다. 니체 읽기의 어려움은 결국 어려움은 자기 읽기의 어려움입니다.
약자와 강자의 개념은 매번의 구체적 문제 상황 속에서 재정의될 필요가 있습니다. 흔히 사회적 약자라는 말을 씁니다. 장애인이 대표적이죠. 하지만 니체적 의미에서도 그럴까요? 어떤 장애인들은 비장애중심주의라는 사회의 견고한 가치에 끝까지 문제를 제기하고 저항을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강자적입니다. 장애인이 약자여서 연대한다는 생각은 잘못입니다. 우리가 연대한다면, 약자를 돕는다는 행위가 옳아서가 아닙니다. 자기 가치가 변환된다는 느낌 때문에 그 장소에 가는 것이죠. 자기 힘이 자기를 긍정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에 니체가 말하는 강함의 힌트도 있습니다. 강함 혹은 자기 긍정의 문제는 자기를 그냥 좋게 보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은 똥도 예쁘다는 식의 태도는 자기애입니다. 긍정과 강함의 문제는 역동적인 힘들의 복합체로서 역동적 힘들의 세계를 마주하는 문제입니다. “몰락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어떤 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피상성, 즉 거짓의 필연성을 얼마만큼 시인할 수 있는가가 힘의 척도이다.”(35쪽) 모순성들, 변덕들, 복수성들을 부정 없이 견디기. 좋다더니 싫고, 어제 괜찮다가도 오늘 아니라고 지랄하는 마음을 자책 없이 마주하기. 채운샘께서는 자기 긍정은, 우리 세계는 언제나 일정한 한계지어짐 속에서 해석된다는 이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계에 대한 자기 조건을 마주하는 것. 그러한 자기 긍정이 곧 타자를 긍정하고 이해하는 토대가 됩니다.
도덕의 비非도덕성과 반反도덕성, 그리고 '이상'의 문제
허무주의는 ‘아 공허해’라는 식의 단순한 허무감이 아닙니다. 앞에서 배웠던 것처럼, 그것은 가치의 작동중단과 관련됩니다. 채운샘께서는 허무주의와 더불어 니체가 얘기하려는 것은 하나의 신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신호냐 하면, ‘지금까지의 가치들이 더 이상 우리 삶에 유용하지 않다’는 것이죠. 발전, 성장, 노오력, 인간, 평등 같은 것들이 유럽과 근대를 이끌어온 기성의 가치들과 상식들입니다. 니체는 이것들이 더 이상 우리가 삶에 충실하게 만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쁘지도 않고 존재감의 확장을 가져오지도 않는다고요. 오히려 그 중심 가치들이 피로감만을 남길 때, 우리는 붙잡을 것 없고 붙잡을 의지도 상실한 국면으로 내려가고 맙니다.
그렇게 지금까지의 유용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가치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권력에의 의지> 1권이 허무주의의 역사를 조명했다면 2권은 ‘이제까지의 최고 가치에 대한 비판’을 시도합니다. 첫 번째가 종교였고 두 번째는 도덕이죠. 이때의 비판이라는 개념이 무척 중요한데요. 첫 시간에도 배웠듯 니체의 비판은 단순히 ‘어떤 것이 그렇게 나타나는 조건’을 정초했던 칸트와는 달리, ‘어떤 것의 가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계보학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그 가치가 그와는 정반대되는 기원들을 가짐을 보입니다. 그럴 때 그 가치의 울타리를 넘어 다르게 가치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됩니다. 즉 비판은 가치 전도의 출발점인 셈이죠. 그런 점에서 도덕 비판은, 그 도덕의 도덕성을 넘어 전혀 다른 도덕을 구성할 가능성과 필요성, 용기와 의욕을 선사해줍니다.
니체의 도덕 비판의 핵심은 사실 이 한마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도덕은 지상에 있는 다른 모든 것처럼 바로 “비도덕적”이다. 도덕성 자체가 비도덕성의 한 형식이다.”(271쪽) 도덕의 기원에는 도덕과 상관없는 것, 도덕이 아닌 것, 도덕의 외부인 것만이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유용성이기도 하고, 자기 보존의 형식들이기도 하고, 지배하고 투쟁하려는 힘이기도 합니다. 여느 이상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적 이상 역시 승리한 가치가 되기 위해서는 ‘비도덕적인’ 수단이 필요했습니다. 폭력, 거짓, 비방, 불의. 이는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자유민주주의, 평등, 투표권, 시장자유화 등 우리 시대의 ‘선’이라고 불리는 가치들은 그 뒤에 얼마나 많은 피를 남겨왔나요. 이스라엘은 가자지구에 퍼붓는 폭격 역시 ‘자국민의 안전’, ‘정의의 회복’, ‘하느님의 응징’이라 주장합니다. 도덕의 비도덕적 발생을 사유하기. 이것이 니체적 비판의 첫 작업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 도덕들에 대한 생리학적 진단이지요. 우리가 따르고 있는 기성의 도덕들은 그 자체로 ‘반反 도덕적’이라는 점이 그것입니다. 채운샘은 뉘앙스의 차이를 짚어주셨는데요. ‘비도덕적’이 도덕이 아닌 것, 도덕의 외부를 말한다면. ‘반도덕적’은 삶에 적대적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기성 도덕이 어떻게 우리 삶을 약화시켜왔는지를 폭로하며 그 과정을 분석해내는 것이 니체적 비판의 두 번째 국면입니다. 그러면서 삶에 복무하는 전혀 다른 자기 도덕(도덕이라고 불리지조차 않을) 입법하는 것만이 중요한 문제로 남습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이상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니체는 말하죠. ““이상”이라는 낱말을 폐기하도록 이 비판을 시작한다.”(284쪽) 이상은 대단한 게 아닙니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고 그렇게 여기는 모든 것에 이상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꿈과 목표를 위해 경쟁을 당연시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상을 갖는 게 왜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요. 가슴을 찌르는 니체의 문장을 다시 복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다.” 또는 “그랬어야만 했어.”라는 모든 관점, 즉 바람직한 것의 관점이 무엇을 함축하는지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아주 적다. 그것은 사물 전체 진행에 관한 단죄다. 이 진행 과정에 고립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작은 것이 전체를 받치고 있고, 미래의 전체 구조가 너의 작은 불의에 달려 있으며, 가장 사소한 것을 겨냥한 비판에도 전체가 함께 비난받는다.”(284쪽)
과거를 향하는 미래를 향하든 현재를 향하든, 무언가가 바람직하다(바람직했다, 바람직할 것이다)는 평가는 하나의 심판입니다. 현행성에서 벗어난 눈을 갖는 것이죠. 우주의 모든 진행은 어느 하나 단절된 곳 없이 연속적입니다. 그렇기에 매 국면 매 과정은 그저 완성일 뿐, 끝도 목표도 아닙니다. 아마도 영원회귀 사유의 근간이 될 이 우주론으로부터 니체는, 아무리 작은 바람의 형식일지라도 이상이 내재하고 있는 ‘삶 전제에 대한 적대’를 끄집어냅니다. “부분은 어떻게 여기서 전체에 대한 판관이 되는가?”(285쪽) 부분의 비난은 전체에 대한 비난과 같습니다. “어떤 것이 현재의 모습과는 달라야 한다고 열망하는 것은 모든 것이 달라야 한다고 열망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체에 대한 비난적 비판을 포함한다. 하지만 삶 자체는 그런 열망이다!”(286쪽)
이 마지막 문장은 생각거리를 남깁니다. 이상을 비판하면서 니체는 여기서 예리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달라야 한다’는 두 가지 뉘앙스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처럼, ‘누구의 ‘달라야 한다’인가?’가 중요합니다. 이는 곧 그가 삶을 긍정하려고 하는가 아닌가로 정식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인간을 극복하려는 자의 도주, 탈주, 비판과 파괴, 몰락, ‘다르게 되고자 함’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렇게 할 때조차 살아가려는 복합적 충동들을 긍정합니다. 하지만 그와는 반대의 벡터도 존재합니다. 니체는 ‘소망할 때의 인간’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그는 결코 실재의 문제 상황들을 앓고자 하지 않고, 다르게 되고자 하지 않고, 몸으로 맞서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는 지쳤습니다. 니체가 말하는 삶에 대한 비난으로의 이상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 이상은 강자와 약자를 동일하게 만듭니다. 즉 왜소하게 만듭니다.
““이상”은 말하자면 현실적이고 긴급한 온갖 과제를 위해 지출해야 하는 엄청난 비용 대신 인간이 치르는 벌금 같은 것이다. 실재의 현실이 멈출 때, 꿈과 피로와 약함이 나타난다. “이상”은 바로 꿈과 피로와 약함의 한 형식이다. 이런 상태가 가장 강한 본성과 가장 무기력한 성의 소유자들에게 엄습하면, 그들은 서로 같아진다.”(289쪽)
우리는 종종 삶이 불행하다는 식의 기분에 빠지거나 그런 말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정말 불합리합니다. 대부분 그것은 뭔가가 뜻대로(바람직함대로, 기대대로, ‘이상’대로) 안 됨을 전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삶이 불행하다는 것은 엄청난 비약입니다. 우주의 전 진행 과정이 뜻대로 안 될리는 없습니다. 우리의 뜻은 우주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그 과정의 어딘가에는 뜻과 부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24시간은 1440분인데, 그 모든 분이 뜻대로 안 되지는 않습니다. 그랬다면 이미 존재가 해체되었겠죠. 즉 우리는 특정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린애도 알 수 있는 단순한 오류입니다만, 어린애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늪입니다. 요컨대, 모든 순간이 지옥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 그가 펼쳐내는 모든 면면이 최악일 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쉽게 존재 전체나 삶 전체를 지옥으로 칠해버리고 있나요. 이상의 무서움은 전체로의 비약에 있습니다. 그 비약이 곧 약함의 가장 큰 특징일 것입니다. 세계를 단순하게 평가하려는(불행 뿐 아니라 행복으로조차도) 의지, 곧 쇠약한 의지에 맞서 어떻게는 그 다층성과 복수성,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면면들이 혼재함을 바라볼 수 있음. 그렇게 삶을 견디며 다음과 그 다음을 맞이할 수 있음. 이것이 강함의 특징일 것입니다.
강의 후반, 채운샘께서는 니체가 ‘권력에의 의지(힘에의 의지)’를 개념화하는 역사를 프린트와 함께 짚어주셨는데요. 먼저 ‘어떻게 형이상학적 이분법을 넘어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자연과학의 에너지 이론을 탐독한 1880년대 초반(<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충동’, ‘힘 감정’, ‘힘 느낌’ 등의 표현을 개념화한 과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1880년대 중반 자연과학도 넘어서, 우주론이지만 동시에 내적 세계의 추동력으로서의 ‘권력(힘)에의 의지’를 개념화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힘에의 의지는 상상도 당위도 아닌 사실, 즉 우리의 모든 행위를 근거 짓는 원초적 사실임을 말하기 시작합니다. 가치 자체가 ‘권력에의 의지’의 산물이자, 가치 전도의 작업 역시 ‘권력에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말하는 니체. 지면이 부족하기도, 숙고가 부족하기도 하고, 하고 앞으로도 반복될 내용이기도 하므로 그 정리는 다음에 이어가도록 해보겠습니다. 채운샘의 숙제는, ‘도덕과 철학(진리)를 힘에의 의지로부터 생각해보기’입니다. 그럼 토요일 아침 9시 30분, 규문에서 뵙겠습니다!
강자/약자의 개념을 들뢰즈의 다수성/소수성 개념과 연결하여 설명해주시니 또 새롭게 이해가 되었어요. 힘의 방향이 중심(기존의 가치 체계)으로 향하느냐, 아니면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쪽으로 향하느냐가 강함과 약함의 척도가 될 수 있다는 점, 니체에게 중요했던 '자신을 위해 존재할 수 있음'과 '다르게 존재할 수 있음'은 중심으로부터 이탈하는 힘과 관련된다는 점..
힘, 힘에의 의지 개념에 관해서도 다양하게 정리해주셔서 도움이 되었는데요, 모든 걸 복잡한 힘들의 투쟁의 산물로 본다는 점, 따라서 이분법을 넘어가는 사유라는 점이 기억에 남네요. 도덕과 철학을 이런 투쟁의 산물로 본다는 건 우선 '누구의' 도덕/철학인가를 묻는 일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