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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네 번째 강독 시간에는 자리 배치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공간에 여유가 생기면서 이전의 배치로 돌아가면 좋겠다는 의견에 따른 건데요, 저는 새로운 배치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전의 배치로 돌아오고 나니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한결 집중도 더 잘 되는 느낌이...^^ 습관이 무섭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습니다. 습관에 따르는 일이 편안하고 좋게 느껴지는 건, 같은 상태를 고수하려는 보존의 힘의지(권력에의 의지)와 관련이 있는 거겠죠?ㅎㅎ
세계와 우리는 ‘해석’으로 존재한다
이번 주에 읽은 3권 1장 ‘인식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에서 니체는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개념들(주체, 객체, 사물, 인식, 진리...)을 하나하나 문제삼습니다. 우리는 ‘진리’라는 것이 있고 인간은 그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사물’을 ‘인식’하는 ‘주체’가 있고, 주체에게 인식되는 ‘객체’로서의 대상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니체는 이런 생각과 믿음들이 모두 ‘거짓’이고 ‘환상의 조작’이며 ‘잘못된 믿음’이라고 주장합니다. 그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 개념입니다.
지난주에 샘께서는 이 개념이 이원론을 넘어가는 사유라는 점을 짚어주셨지요. 진리를 모든 것의 준거점으로 삼는 사유는 진리가 아닌 것에 대한 배타성과 폭력성을 포함할 수밖에 없습니다. 좋고 나쁨, 선과 악, 니편 내편이 계속해서 나뉠 수밖에 없죠. 니체는 우리가 이처럼 좋고 나쁜 것, 선하고 악한 것으로 가치 평가하는 것들의 기원을 묻는 계보학적 작업을 통해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있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그렇기에 “삶은 권력에의 의지”(233쪽)이지 다른 게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 자체’로 좋은 것, 선한 것이 있는 게 아니라, 복잡한 힘들의 투쟁의 결과로 일시적으로 좋은 것, 선한 것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이는 달리 말하면 “세계는 본질적으로 관계-세계”(479쪽)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은 복잡한 힘들의 관계 속에서 매번 새롭게 조직화되며, 어떤 가치도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가치 평가가 ‘해석’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해석하는 것은 ‘우리 정서’입니다. 내가 해석하는 게 아니라 나를 구성하는 힘들이 해석하는 것입니다. 쾌하거나 불쾌한 감정이 어떤 것을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해석하게 합니다. 따라서 어떤 것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관계한다는 것 자체가 해석입니다. 관계의 산물로서, 언제나 우리에게 해석된 것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사물이고, 주체이고, 객체입니다. 그건 ‘인식’도 마찬가지지요.
‘인식’은 발명되었다
이번 주에 샘께서 참고 자료로 나눠주신 니체 유고(<비도덕적 의미에서의 진리와 거짓에 관하여>)는 재미있는 우화로 시작합니다. ‘영리한 동물들이 인식이라는 것을 발명해낸 별’에 관한 우화인데요. 거기서 니체는 인간의 지성이 인간적인 것이며, 개체 보존을 위한 수단으로서 ‘표상’을 통해 전개된다고 지적합니다. 또한 표상은, ‘뿔과 이빨을 가진 맹수들과 투쟁할 능력이 없는 약하고 건강하지 못한 개체들이 스스로를 보존하는 수단’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인간 지성에 관한 이런 주장은 베르그손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베르그손도 지성과 의식을 진화과정의 산물이라고 보았지요. 인간의 지성이 고도로 발달하게 된 것은 다른 동물들에 비해 생존에 불리했던 조건들 때문이었다고 보았고요. 니체 역시 우리 인식이 철두철미하게 ‘유용성’과 관련되어 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의 모든 인식 기관과 인식 감각은 단지 보존과 성장의 조건에 대해서만 발달한다. 이성과 그 범주, 변증법에 대한 신뢰, 그러니까 논리학에 대한 평가는 경험을 통해 증명된 그것들의 삶을 위한 유용성만을 증명할 뿐이지, 그것들이 “진리”임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430쪽)
생성하고 변이하는 세계는 한순간도 멈춰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살기 위해 그 세계를 멈춰세우고 ‘무엇’이라고 규정해야 하죠. 니체는 인식을 ‘도식화하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우리 규정을 빠져나가는 세계는 우리에게 혼돈으로 다가오므로 그 혼돈에 ‘규칙성과 형식을 부과하는 것’이 인식이라는 겁니다. 또 이런 표현도 재밌습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단지 단순히 새로운 어떤 것을 예전의 것, 알려진 어떤 것에 관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할 뿐이다.”(415쪽) 니체는 이처럼 인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발명된 것이라는 점을, 도덕과 마찬가지로 인식의 배후에는 이것과 상관없는 힘들이 가득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인식 역시 다양한 힘들의 관계의 산물이며 복잡한 조작의 결과라는 점을 보여주면서, 주체와 객체, 사물, 진리의 개념을 무너뜨립니다. 1장의 마지막 [결론적인 요약]에서 니체는 ‘생성’에 있어서는 인식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인식은 ‘무언가가 있다’는 걸 전제하지 않으면, 멈춤이 없는 세계를 멈춰놓고 시작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니체는 인식을 ‘자기 자신에 대한 오류’이자 ‘기만에의 의지’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생성과 변이의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
“세계는 무언가 생성하는 것으로서, 끊임없이 위치를 바꾸면서도 결코 진리에 다가가지 못하는 거짓으로서, ‘흐름 속에’ 있다.” (516쪽)
“고안하고, 의욕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극복하는 것으로서의 생성. 어떠한 주체도 없이 행동하고, 정립하는 것이 창조적이다. 아무런 ‘원인과 결과’도 없다. (...) ‘원인과 결과’ 대신에 생성하는 것의 상호투쟁, 종종 적을 빨아들이면서.” (517쪽)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니체는 ‘생성’을 인식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생성으로서의 세계를 마주한 우리는 ‘존재의 세계’를 고안하고,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일”(516쪽)을 합니다. 니체는 이것을 ‘최고의 권력에의 의지’라고 표현하는데요. 이처럼 우리는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마주할 때 그것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강한 욕구를 지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생존에 유용하기 때문일 텐데요. 그 범주 안으로 넣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적의를 느끼며 비정상적인 것으로 단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결국 ‘생성으로서의 삶’을 비난하는 꼴이 되는 거라고 샘은 지적하셨죠. 그래서 인식의 문제는 결국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고요. ‘그것이 생성을 긍정하는 것이냐, 부정하는 것이냐.’ 니체에게는 이 문제가 새로운 가치 평가의 기준이 됩니다. 강함과 약함을 가르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생성이란 끊임없이 변화하고 관계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낯선 힘들의 침투를 허용하고, 그것들과 관계하며,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내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극복하는 것’이기도 한데요. 그렇기에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생성이라는 샘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건들을 불행으로 느끼고, 두려워하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기를 바라지요. 이처럼 부정적으로 느껴지는 늙음, 병, 죽음...등으로서의 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샘께서는 생성을 긍정한다는 것이 그 안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하셨는데요.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면 어려운 일처럼 느껴지지만, 쉽게 생각하면, 어떤 것을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생각하고, 그것에 대해 다른 태도를 가지게 된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니체를 읽고 숙고하는 일은 분명, 그런 삶을 실험하는 데 도움이 되고요.^^
사실, 표상을 발명한 인간은(그 이전에 유기체는)생성의 세계 앞에서 고정적인 틀을 부여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온 것이겠네요.
그렇게 보면 니체가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각인하는 일”을 ‘최고의 권력에의 의지’라고 부른 것도 납득이 되는 것 같아요.
이해 불가능한 것들을 마주할 때 그것을 이해 가능한 범주 안으로 집어넣으려는 강한 욕구, 그 역시 '권력에의 의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종의 생존을 위해 유용했다 하더라도 세계를 긍정하게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삶을 긍정하는 것은 언제나 같은 방향으로 가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라도, 정아샘이 적으신 것처럼 인식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와 맞닿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