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문의 임인년을 여는 첫 프로그램인 효암스님의 <내 마음이라는 차를 타고 떠나는 길> 불교심리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인트로에서 스님께서는 그 자체로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고 말씀하시면서, ‘코로나 덕분에’ 이렇게 여러분과 만나고 함께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고 하셨는데요. 제게는 이 말씀이 무척 깊이 남았습니다. 우선 16년이 걸리는 과정에서 졸업을 2년 앞두고 한국에 발이 묶이신 상황임에도 그것을 나눔과 배움의 기회로 삼으시는 스님의 모습이 놀라웠고, 그 다음은 정말로 판데믹이라는 시국이 우리를 제약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뜻밖의 귀한 자리로도 데려다준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콩 심은 데 다른 것이 나는 ‘이숙과’(異熟果)라고 할 수 있을까요? ^^) 스님께서 학업을 중단하신 것은 매우 유감스럽지만 그 덕분에 가까이서 배울 수 있으니 저로선 분명 기쁘기도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며 이번 주 수업을 스케치해보려 합니다.
왜 마음을 공부하는가?
시간은 없고, 볼거리 놀거리, 그리고 공부할 거리는 끝도 없이 많은데, 왜 우리는 마음에 대해 배워야 할까요? 다른 것이 아니라 마음을 묻고 공부하고 지켜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라는 노래가사처럼, 우리 안에는 너무나 많은 ‘나’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고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는 불쑥불숙 튀어나오는 강력하고 거친 감정이나 욕망, 판단들부터 형체도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정서나 느낌들까지 다양한 움직임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마음의 이런 움직임들이 우리를 멋대로 휘두르고 갈피를 잡지 못하게 합니다. 그것들이 대체 무엇으로 되어있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르는 이상, 우리는 운전법을 모르는 차에 실린 것처럼 중심 없이 계속 끌려다닐 수밖에 없지요. 바로 여기에 마음공부의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차의 각 부위의 기능들의 작동과 정비 방법을 알게 되면 더 이상 운전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마음의 갈래와 그 작동들을 배워서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확실히 안다면 그 움직임들에 당황하지 않고 중심을 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괴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휘둘리진 않고 자신을 보아줄 만하게는 되는 것이죠.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알고 그때그때 대처하고 정비해가며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이 마음 강의의 취지라고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더 정돈하면, 마음 공부는 세 가지 차원에서의 필요성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더 이상 내가 상처받고 아프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남들뿐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해서도 덫을 놓고 스스로를 괴롭히고 그물에 빠뜨리곤 합니다. 좌절하고 분노하고 자책하고 비하하죠. 이런 일들을 멈추고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건강함과 용기를 위해 마음을 공부합니다. 사회적으로는,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가 서로의 행복에 장애가 되는 적개심과 배제를 낳는 마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입니다. 불교적으로는, 복을 짓고 지혜를 증진시킴으로써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서입니다. 인트로에서 스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티벳불교 공부 과정 26년을 줄여서 핵심을 남기는 것이 마음이라고 말이죠. 부처님의 모든 말씀인 팔만대장경을 줄이면 반야부가 되고 반야부를 줄이면 반야심경이 되고 반야심경을 줄이면 마음심心 자 하나가 되기 때문이죠. 고로, 마음만 알아도 충분히 깨달음의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공부하는 일은 또 다른 커다란 이득이 있죠. 수행을 하든, 지식을 쌓든, 일을 하든, 삶의 행복을 추구하든, 마음 공부는 그 일들을 더 윤택하고 풍성하게 합니다. 마음은 마치 차와 같아서 그 메커니즘과 운전법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걸어가는 것보다 훨씬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공부로 밥벌이를 시작한 저로서는 무척 솔깃한 부분이었습니다. 어디로 가려하든, 두고 갈 수도 무시할 수도 없이 항상 함께 가고 있는 이 마음의 운전면허를 갖는 일이 다른 스펙을 쌓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음의 일곱 가지 갈래
마음에 대해 배울 때, 우리가 기존에 들어서 알고 있던 개념들과 헷갈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불교의 인식론에서 이야기되는 마음의 일곱 가지 갈래들에 대해 참고용으로 간단히 짚고 넘어가셨습니다. 티벳어-한글 사전에 따르면 이것을 칠종심식이라 하며 여기에는 현량식, 비량식, 재결식, 사찰식, 현이미정식, 의심, 전도식이 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나 티벳어는 전혀 모르는데다가 한자까지 잘 모르는 저로서는 무척 낯선 용어들이었는데요(공지&후기에서 ‘불교와 글쓰기’ 숙제방에 자료가 올라와 있습니다). 스님의 설명을 듣고 나니 이 분류가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1)현량식은 현재 눈앞에 나타난 모든 것을 헤아리는 식으로 근거가 따로 필요 없는 마음입니다. 2)비량식은 바른 논리를 통해 추론하여 바른 헤아림을 얻은 식으로 정당한 논리를 근거로 하는 마음입니다. 3)재결식은 현량과 비량의 결과로 식으로서 거듭해서 헤아린 마음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마음은 바른 헤아림, 즉 정량이라고 합니다. 4)사찰식은 샅샅이, 꼼꼼히 살피는 식이지만 명료한 근거는 없습니다. 5)현이미정식은 현상으로 떠오르긴 떠오르지만 인식으로 이어지지 않는 마음입니다. 재미난 게임에 빠져 있을 때 귀에 울리는 잔소리 같은 것이 그 예입니다. 6)의심은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 아직 결정 내려지지 않고 유예된 마음입니다. 7)전도식은 없는데 있는 것처럼, 이것인데 다른 것인 것처럼 뒤바뀐 마음입니다. 가령 동아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뒤의 네 가지 마음은 근거 없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믿는 것들입니다. 우리가 갖고 살아가는 대부분의 마음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하는데, 스스로 보고 품을 들여 추론한 생각은 적고 온갖 소문과 ‘카더라’와 ‘아님 말고’ 등의 생각을 마음 속에 채워두고 있는 걸 보면 정말로 그런 것 같습니다.
언제나 함께하는 마음, 변행심소
그렇다면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마음은 크게 심왕과 심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심왕이란 왕과 같은 마음으로서, 맑은 빛이나 물과 같이 모든 것이 비치고 왕래하는 마음의 본자리입니다. 심소들의 모든 작용을 관장하고 대표하는 마음이 심왕입니다. 심왕을 삼성이라는 회사 혹은 이건희라고 한다면, 심소는 갖가지 부서 혹은 직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소는 실제로 맡은 바 역할을 직접 수행하고 있는 마음입니다. ‘오위백법’에 따르면 심왕은 8개의 법, 즉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말라식, 아뢰야식으로 정리됩니다. 하지만 이 분류는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만 유행하며, 사실상 안이비설신의라는 6식을 말한다고 합니다. 심소는 51개의 법으로 되어있으며 6개의 종류가 있습니다. 모든 마음에 두루 퍼져 있는 다섯 개의 변행심소, 경계를 인식하고 구별하는 다섯 개의 별경심소, 선법을 증장하는 열한 개의 선심소, 여섯가지 근본번뇌를 말하는 번뇌심소, 그에 따르는 스무가지 수번뇌심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네 개의 부정심소가 그것입니다. 네 복잡합니다. 많습니다. 어쨌든 심왕은 대표하는 마음 여섯 개, 심소는 역할을 하는 마음 51개라고 알고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주에 저희가 배운 것은 ‘변행심소’(遍行心所)입니다. 스님께서 다람살라에서 공부하실 때, 많이 아프고 지쳐서 더 이상 못하겠으니까 딱 하나만 듣고 가야지, 하고 청한 법문에서 스승님께서 설해주신 것이 바로 ‘변행심소’였다고 합니다. ‘변’(遍)이란 두루 미친다는 의미입니다. 즉 변행심소는 우리의 모든 순간에 언제나 함께 하고 있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것을 잘 다스리지 못하면 끌려다닐 수밖에 없기에 반드시 배워야 하는 마음의 베이스이지요. 변행심소에는 수(受), 상(想), 사(思), 촉(觸), 작의(作意)가 있습니다. 이 다섯 심소들은 어떤 역할을 할까요?
수(受)는 보통 ‘느낌’으로 번역되지만 그보다는 더 큰 의미에서의 받아들임을 말합니다. 수는 개체에게 몸과 마음의 차원에서 편함, 불편함, 편함과 불편함의 가운데의 느낌을 수용하는 일을 하는 마음입니다. 수가 51심소 중 가장 첫 번째로 분류된 이유는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좌우되는 마음이며, 집착, 화, 어리석음 중 한 가지를 끌어당기기에 가장 먼저 알아야 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상(想)은 대상의 성질을 담은 표상(相)을 우리 마음에 쾅 도장 찍는 일을 하는 마음입니다. '대경', 즉 우리의 식이 상대하고 있는 경계에 '어소', 즉 다른 것과 구별되는 말의 기본 단위를 붙여서, 이거다 혹은 이게 아니다라고 가르는 일을 하는 것이 상이라는 심소입니다. 상은 여러개의 사물을 분리하여 비교분석한다기보다는, 지금 인지되는 이것이 다른 것과는 구별된다는 사실을 성립시키는 과정입니다.
사(思)는 자신의 부서에 있는 심소들이 대상 쪽으로 움직이게 해서 생각과 행동을 일으키는 일을 하는 마음입니다. 사라는 심소가 생겨나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공덕이나 허물 같은 대경 쪽으로 관련된 심소들이 전부 이동해서, 업(業)이 나타나고 머물고 사라지게 만듭니다. 사에는 본질의 차원에서는 선인 것과 불선인 것,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것이 있고, 윤회하는 세계의 차원에서는 복인 것, 복이 아닌 것,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의도와 행위의 차원에서는 행위 이전에 일어난 것과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있습니다.
촉(觸)은 한 부서 내에서 대경과 근과 판단을 서로 닿게 하여 다음 심소들이 일을 하게끔 하는 심소입니다. 항아리를 본다고 해봅시다. 항아리라는 대경이 눈의 기관을 통과하면, 안근이 그것을 안식에 비춰서 ‘항아리’라고 도장을 찍어 인식합니다. 도장을 찍은 일은 상이라는 심소의 일이죠. 촉은 그 도장 찍기 이전, 대경(항아리라는 외부)과 시각작용(안근이라는 근)과 판단내림(안식이라는상왕)을 갈무리는 작업입니다. 그 뒤에 나머지 심소들이 일을 하지요. 예를 들면 대경과 근이 만나고 그것들과 심왕이 만날 때, 편하고 편치 않은 느낌, 즉 수가 발생됩니다. 눈이라는 기관의 부서에서 벌어진 촉으로부터 수가 발생하고 상이 발생하고 덩달아 사도 발생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작의(作意)는 꽉 잡아서 마음을 짓는 혹은 만드는 일을 하는 심소입니다. 한번 형성된 마음은 미세해서 쉽게 휘발되고 다른 것으로 변화되기에, 마음을 대상에 집중시켜서 계속 붙잡아주고 기다려줘야 감지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한 대상 쪽으로 자꾸 움직이게 한다는 점에서 작의는 사와 비슷합니다만, 사가 대상의 총괄적인 면에 주목하는 반면 작의는 대상의 개별적 본질에 천착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작의는 잊지 않고 어떤 가르침 등을 떠올리는 ‘억념’의 베이스가 됩니다. 잊지 않고 배운 바를 상기하는 작업인 억념은 자신의 현재를 살피는 알아차림과 함께 수행자의 기본 덕목입니다.
수, 상, 사, 촉, 작의. 이 다섯 가지 심소가 그 어느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는 마음, 변행심소입니다. 이것들의 정의와 역할을 잘 알고 새기면, 즉 '억념'하면 우리는 마음의 기초 원리를 배운 것이 되겠네요. 용어도 낯설고 개념도 쉽지 않지만, 반복해서 익히고 살펴서 기초 운전 기술에 능숙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숙제 전해드리고 공지 마치겠습니다.
숙제 공지
-변행심소의 다섯 가지 마음이 자동차의 어느 부분에 해당되는 것 같은지 짐작해서 이유와 함께 적어오기. (예를 들면 사(思)는 핸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핸들이 꺾이는 방향으로 차 전체가 그 방향으로 틀어지니까.)
-스피노자를 공부하신 분들은 다른 분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수(受)와 스피노자의 정서 혹은 정동(affect/affectus)의 차이와 유사점을 적어보기. 서로 어디에 해당하며 어느 것이 더 크거나 작은 개념인지 3~5줄 정도로 간단히 적어보기.
*숙제는 스님께서 참고하실 수 있도록 규문 홈페이지 ‘공지&후기’에서 ‘일반강좌’ 숙제방에 월요일 저녁 6시까지 익명 혹은 가명으로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