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Seminar Board
'아침을 여는 논픽션 : <논어>와 철학 이야기 시즌 1' 개강 했습니다. 이른 시간대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분들이 신청해 주셔서 아침부터 모니터 안쪽이 시끌벅적 했네요. '글머리'가 트이고 싶다는 임반장님의 강력한 요청으로 시작된 <논어> 읽기! 덕분에 <논어>의 담백하고 깊은 맛을 아침마다 즐길 수 있게 되었네요^^ 1월 아침을 책임질 <논어>, 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논어> 학이편 1~13장을 읽었습니다. 그 중 인상적인 주제를 추려서 후기를 써 보겠습니다:)
책을 읽고 나서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
<논어집주>는 주자의 서문으로 시작됩니다. 주자는 스승 정이천의 말을 인용했는데요, 그 말씀이 참 주옥 같습니다. "<논어>를 읽은 후 아무런 변화가 없는 자도 있고, 한 두 구절을 터득하고 기뻐하는 자도 있으며, 좋아하는 자도 있고, 읽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손을 휘두르고 발을 놀리며 춤추는 자도 있다." "지금 사람들은 책을 읽을 줄 모른다. 예를 들면 <논어>를 읽었을 때,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 다 읽고 나서도 이런 사람이라면 읽지 않은 것과 같다." 그때도 '요즘 애들은 책 읽을 줄 몰라' 라는 말이 있었다니...! 정이천에 따르면우리가 책을 읽는 이유는 변하기 위한다는 것입니다. 말 몇 마디를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닌, 그것이 바로 행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 이 행위와 말의 일치는 <논어>에서도 계속해서 강조되는 바이기도 합니다. <논어>는 형이상학적인 담론이 거의 없는 것도 그 때문이겠지요.
<논어>의 시작, '學'
<논어>의 시작은 배움으로 시작됩니다. <논어>를 읽었다 하면 꼭 외워야 하는 문장이기도 하죠.
"배우고 수시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온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서운하지 않다면 군자가 아니겠는가[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때 '때[時]'라는 것은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수시로', 즉 배운 것을 늘 실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나머지 하나는 '때에 맞게'입니다. 그런데 그 때라는 건 주희에 따르면 '농사를 짓는 시간'이랍니다. 말고는 늘 배움은 이루어져야 하고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무에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주자는 인간은 이미 선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발현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성선설이란 착하니까 대충 살아도 된다는 게 아니라, 선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그걸 발현할 의무가 있다는 무서운(?) 담론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먼저 그 본성을 발현한 사람을 본받으면 됩니다. 그게 농사지으며 땅에서 난 것을 먹고 사는 인간의 의무이자 본성으로부터 기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죠.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은 배우기 위한 준비물(?)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벗입니다. '벗'이란 내가 알지 못하는, 이질적인 세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질적인 시공간을 지닌 사람과 뜻을 함께 하는 것이 공부라는 것. 그러니 공부는 재밌는 거겠지요. 어딜 가서 아침마다 열 명씩 모여 <논어>를 읽겠습니까^^;;
세 번째는 너무나 중요하고 또 공감 되는 구절입니다. 공부를 하면, 우리 엄마라도 나를 알아주면 좋겠는 이 마음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비로소 군자가 된다는 것. '서운함[慍]'이란 매우 가벼운 번역이고, 좀 더 진해지면 '울분'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서 서운하다'는 건 사실 참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지요. 분명 느껴지는데 막상 표현하자니 말도 안되고 괜히 내가 쪼잔한 사람이 되는 것 같고. <논어>는 그때 누구 탓을 하기보다는 왜 서운함이 느껴지는지 잘 살피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쁨을 다른 사람의 인정에서 찾기 때문이 아니냐고 말이죠. <논어>에 따르면 기쁨이란 배움, 이질적인 것과 함께 섞여서 변화하는 데서 오는 것이지 남이 내가 원하는 대로 좋은 말만 하고 인정해주고 따르는 데서 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꾸미는 말과 얼굴색
"말을 꾸미고 얼굴색을 좋게 하는 자 중 인(仁)한 이가 드물다[巧言令色 鮮矣仁]"
"제자들은 들어가서는 효도하고 나와서는 공경하며 행실을 삼가고 말을 성실하게 하며 널리 사람을 사랑하되 인한 이를 친히 해야 하니, 이것들을 행하고 난 후 여력이 있으면 글을 배워야 한다[子曰 弟子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논어>의 세 번째, 여섯 번째 구절은 말과 행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논어>의 키워드를 꼽으라면 첫 번째는 '배움[學]', 두 번째는 '어짊[仁]'입니다. 그런데 인(仁)은 '어질다'는 말로 해석하기 참 어렵습니다. 단지 친절하고 착하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죠. 인(仁)에는 상대방과의 거리감, 나와 맺는 관계, 전체를 보는 관점이 다 들어가 있는 복합적인 의미가 다 들어가 있습니다. 군자는 언제나 때에 맞게 행동하면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격식을 보이지만, 그게 꾸밈은 없어야 한다는 것. 남이 좋아한다는 이유로 입발린 소리를 하거나 좋은 표정을 짓는 게 아니라 내면의 덕이 드러나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행동을 해야 군자라는 것인데...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행위를 잘 단속하는 게 중요하겠죠. 유가의 시작은 가까운 데서 출발합니다. 들고 날 때 효도하고 삼가지 않는 사람이 백 가지 좋은 말을 배워봐야 소용없고, 교양 있는 척 해봐야 다 티가 난다는 것이죠. 배움의 바탕은 항상 일상의 행동거지를 단속하고 삼가는 것. 이게 정말 단순한 말인데, 곱씹을수록 어려운 <논어>의 가르침 같습니다.
개과천선!
"군자는 위엄이 있어야 하니 그러지 않으면 배움이 견고하지 못하다. 내면의 진실성과 관계에서의 신의를 중시하며 자기보다 못한 이를 벗 삼으려 하지 말고,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논어>의 여덟 번째 구절입니다. 공자님은 '군자'를 특정 계급을 지칭하는 말이 아닌 덕을 갖춘 사람으로 정의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군자의 배움을 진실성과 믿음을 지키는 것, 벗하기를 신중히 하며 누구에게나 배우는 자세를 취할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과천선으로 설명하셨죠. 특히 마지막 구절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꺼리지 말라'는 말은 동양식 윤리학을 잘 보여주는 말입니다. 서양에서는 선악을 말할 때 갈림길의 딜레마를 말하지요. 선과 악 사이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 선택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는 구도 말입니다. 그리고 선하지 못하면 곧 타락이라는 구도. 그런데 동양에는 애초에 갈림길도 타락도 없습니다. 어차피 길은 하나인데, 그 길을 가느냐 마느냐의 차이라는 것이죠. 가는 도중에 잘못을 반복해도 그걸 고치고 다시 그 길을 가면 그만이고 말입니다. 참 단순한데, 그만큼 모든 불선(不善)으로 가는 핑계를 일소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불선이란 자유로운 선택도, 책임져야 하는 짐도, 빠져나올 수 없는 타락도 아니라 그냥 가던 길에서 넘친 것[過]이기 때문에 흘러내린 걸 잘 닦고 다시 가던 길 가면 된다는 거죠. 이 단순함에서 오는 힘이야말로 <논어>를 계속 읽게 만드는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논어> 학이 14장부터 강독 시작해서 두 번째 편인 위정(爲政)편 완독을 노려봅니다(과연?). 본문만 보면 매우 짧으니 미리 읽어보시는 것도 좋겠죠^^ 그럼 수요일 아침에 만나요~!
혜원샘 후기 보니 우리가 이렇게나 많은 공부를 했군요. 배우나마나한 사람이 될까 무섭(?)네요.
갈림길? NO.
군자의 길을 가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졸음과 싸움시롱 논어에 몰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