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에 대해 1도 몰라도 버스타고 택시타고 다니는 데 아무 문제없었지만 막상 차를 운전하겠다고 시험 준비를 하면 머리가 아픈 법이죠. 지금 꼭 그런 기분이네요. 평소에는 마음에 대해 잘 몰라도 흘러가는 대로 거칠게 대응하며 살아왔는데, 마음 운전을 해보겠다고 차 구조부터 기능까지 하나하나 세세하게 배우고 있자니 만만치가 않네요. 모르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는 아니어도, 이 복잡한 작동은 들여다볼 생각도 않고 지금까지는 그저 맘 편해지기만을 바라왔던 것이 지나친 욕심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장난 버스에 실려 있으면서 원하는 도착지에 빨리 정지하기만을 바랬던 것이었죠. 난해한 세계에 빠져들었지만 그래도 더듬더듬 알아가보는 재미가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지난번에 배운 오변행에 이어 오별경에 대해 배웠습니다. ‘변행’이 언제 어디서나 그 어느 순간에도 함께한다는 뜻이라면, ‘별경’(別境)은 대상을 구별하게 하고 낱낱이 인지하는 일을 하는 마음입니다. 욕락, 승해, 념, 정, 혜. 어떤 대경과 관련해서 각각을 바라는 마음, 믿으려고 하는 마음, 떠올리는 마음, 오롯하게 모으는 마음, 낱낱이 가리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별경을 이루는 이 다섯 가지 마음이 있을 때 대경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됩니다. 없다면 대충대충 인식하게 되죠. 스님께서는 이 오별경이 선법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깨달음에 이르는 서른일곱 가지의 법’ 즉 삼십칠조도품을 이루기 쉬워지고, 욕계에서 색계(마음에 뭘 떠올리든 그대로 이뤄지는 나라)에 이르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수행에는 물론이고, 우리가 일상 속 어디에서 마음을 쓰든 간에 알아야 할 것이 바로 오별경입니다.
마지막에 질문이 나오기도 했던 ‘욕락’(浴樂)은 우리가 흔히 아는 욕구보다는 더 근본적인 차원의 마음의 움직임입니다. 욕구는 욕락이 더 나아간 것이며, 더 거칠고 구체화된 마음작용이지요. 욕락은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 곧 ‘바람(wish)’이라고 표현되고, 여기에는 번뇌를 쌓는 것 뿐 아니라 번뇌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마음까지도 포함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욕구는 아마도 욕락의 갈래 중 번잡함(물질)을 쫓는 마음에 해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근본적으로 욕락은 정진을 바지런히 해나가는 의지처가 되는 일을 합니다. 자칫 수행을 방해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되는 마음이 수행의 가장 밑바닥이자 원동력이 된다니, 참 신기합니다. 수업 시간에 들었던 욕락의 예시는 이거였습니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노인을 부축해주는 것을 보고서 ‘어 저사람 좋은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던 경험이 있어서, 다음에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어 저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마음이 들어 나도 모르게 입술이 옆으로 벌어지게 된 상황이요.
다음으로는 욕락 못지않게 의외의 높은 평가를 받는 마음인 ‘승해’(勝解)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선법의 뿌리라고까지 말했다고 하네요. 한마디로 승해는 믿으려는 마음입니다. 저는 믿음 하면 맹신이나 사고의 거부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는데요, 이것은 아마도 위에서 욕구를 생각하는 방식과 비슷하게 승해의 거친 갈래만을 떠올리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승해는 그러한 믿음보다는 더 미세하게, 마음에서 일어나는 붙들기 작용입니다. 스님께서는, 불교철학은 사천년에 걸쳐서 마음을 정의하려는 시도를 했으며 그때 설정된 마음 작용의 조건은 두 가지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1)거울처럼 비춰져 떠올라야 한다. 2) 잡아야 한다. 즉 저게 뭐다, 라고 사진 찍듯이 잡아야 한다. 마음에 떠오른 대경을 잡는다고 하면 오변행의 ‘상’이 떠오르는데요. 지금 비춰지는 표상을 이것이나 아니냐를 가르고 도장찍는 일을 하는 상과는 달리, 승해는 이미 인지한 대경, 즉 기억된 바를 오직 이것뿐이라고 소중히 붙잡고 견고하게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잡은 것을 의지해서 다른 무엇이 그 기억을 빼앗아가지 못하게 단단히 방어를 하는 것이죠. 그 대경이 바른 것이기만 하다면(즉 무상과 무아를 보여주는 것이기만 하다면) 승해는 정말 모든 선법의 강력한 뿌리가 되겠네요.
세 번째 별경인 ‘념’(念)은 다른 단어들과 많이 헷갈립니다. 자칫 생각 사와는 어떻게 다르고, 기억과는 어떻게 다르며, 기능상 작의와는 어떻게 다른 걸까 막막해지기도 합니다. 되는 데까지 해보죠. ‘앞서 익어진 법(식이 인식한 것)을 잊지 않으려고 거듭거듭 떠올리는 일을 하는 심소’라는 정의가 보여주는 것은 우선 사와의 차이입니다. 사는 우선 핸들처럼 자신이 주목한 대경 쪽으로 마음 다발의 방향을 바꿔주는 역할을 하지만, 념은 이전에 경험했던 뭔가를 다시 재생하게 하는 역할을 하기에 둘은 같은 ‘생각’이라고 불리지만 상당히 다른 일을 합니다. 념은 핸들이 아니라 이전에 운행한 경로를 불러오는 네비게이션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기억은 념에 의해 떠올려지는 데이터 같은 것입니다. 이전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순간순간의 경험다발이지요. 그럼 작의와의 차이는 뭘까요? 작의는 자신 주변의 심소들이 한눈을 팔지 않게, 그래서 대상을 잊지 않게 다른 심소들을 꽉 잡는 것이죠. 저는 왠지 작의와 념이 똑같이 마음을 짓고 익히게 하지만, 서로 반대의 방법으로 그 일을 하는 것 같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의가 기억을 붙잡아 유지시킨다면, 념은 그 기억을 꺼내어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라고요. 명료하게 갈라내기가 힘드네요.(^^;;) 스님께서, 념이 ‘어제 본 그것과 비슷하네’라고 하며 앞서 친근해지고 다시 떠올리게 하고 인식하게 하는 수납창고 같은 일을 한다고 하셨던 것이 기억나네요.
한마음이라고 불리는 ‘정’(定)은 흩어지는 마음들을 오롯하게 모아서 머물게 합니다. 이 역시 ‘사’와 약간 헷갈리지만, 핸들처럼 심소들의 방향을 틀기만 하는 사와는 달리 정은 그 방향으로 온전하고 완전하게 주행을 이어가게 하는 진득한 몰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정은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고 전방을 주시하는 운전이자, 도끼질을 한 타점에 맞추고 있어서 힘이 모아진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도끼가 노리는 것은 번뇌입니다. 이러한 선정은 슬기로움을 늘리는 의지처가 됩니다.
슬기로움, 즉 지혜를 의미하는 ‘혜’(惠)는 념이 대경(지나간 실제의 흐름)을 떠올릴 때 차별을 두서 허물과 공덕을 따지고 낱낱이 제대로 가려내는 일을 합니다. 대경이 그렇게 따지는 것으로 인지될 때 의심은 끊어진다고 합니다.
바라고, 믿고자 하고, 거듭 떠올리고, 오롯이 머물고, 낱낱이 따져 가리는 일을 하는 다섯 가지 심소가 오별경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요약일 뿐, 우리가 평소 우리의 마음을 살펴보는 일에서는 각각의 정의에 근거해서 더 세세하게 구별해서 인지해야겠죠? 스님께서는 많이 들은 것(聞)을 자기 논리에 따른 결론(思)로 옮기는 데에는 반드시 예라는 징검다리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고로, 다음 주 과제는 이 다섯 가지 별경에 해당하는 마음을 근거를 들어 찾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렇기 때문에 이거다’라고 예를 통해 증명하지 못하면 알았다고 할 수 없다는 거죠. 그래서 저희는 ‘내가 어떤 때 어떤 마음이 들었는데, 이것이 이런 점에서 욕락이인 것 같으며, 이 상황에서 승해는 이런 면 때문에 이것이라고 생각된다’라는 식으로 예를 찾아오시면 됩니다! 숙제는 토요일 오후 6시까지 ‘일반강좌-숙제방’에 익명 혹은 가명으로 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