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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하는 일요일] 4학기 4주차 후기
지난주 강의에서는 맹자의 정치론의 바닥에 있는 '본성에 대한 이해'와 함께 성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이번주에는 맹자의 정치 이상인 內聖外王에 대한 내용이 이어졌습니다.
1) 사(士)들의 시대
맹자의 정치론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중국의 지식인들을 대표하는 말은 사(士)입니다. 사(士)가 중국의 지식인을 규정하고, 또한 조선의 지식인을 규정하는 중요한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선비들의 시대'에 선비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사'를 선비로 번역하면, 노동 안하고 거들먹거리는 그런 사람들처럼 생각되지만 이는 전문 지식인 집단을 말합니다. 그리스 아테네 소피스트하고 같다고 할 수 있죠. 소피스트는 자기 나름의 전문적 지식을 지닌 지식인들로, 발달하는 아테네에서 정치가들을 양성하는 교육자로서 요청되었습니다. 그런 소피스트 집단이 '사'집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사'는 조건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지식이 현실 속에서 유용하게 쓰여야 된다는 점입니다. '사'가 언제나 관리를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사' 뒤에 대부(大夫)가 붙습니다. 대부란 관리라는 뜻으로 그것을 합쳐서 사대부(士大夫)라고 합니다. 즉 사대부란 지식인으로 그 지식인이 현실에 자신의 지식을 어떻게 쓸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지식과 정치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죠.
'사'가 전국시대 모여든 곳이 제나라의 수도 임치입니다. 이곳에 설치된 직하라는 곳은 왕실의 후원을 받는 곳으로 당시 전란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식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고, 자신의 지식을 모으고 소통할 수 있었던 중요한 기관이었습니다. 이곳 직하의 선비들은 실제로 정치에 참여한 건 소수지만 이런 지위와 녹봉을 받고 국사를 논의하기도 하고 정보를 주기도 하는데, 지금의 대통령 전문 자문 위원단 같은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도 여기서 7년 정도 머물렀다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제나라 선왕을 만나는 이야기가 맹자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우를 받긴 했지만 공자처럼 실제로 쓰이지는 못하고 결국 돌아옵니다.
조선의 문화의 기반은 중국의 송나라 사대부의 시대입니다. 조선사람들이 특히 맹자를 좋아했습니다. 중국사람들은 의외로 맹자를 읽지 않고, 일본은 사무라이 문화라 맹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맹자는 임금을 가르치려 하기 대문입니다. 위계가 엄격한 문화일수록 맹자가 불편합니다. 그럼 조선은 왜 맹자를 좋아했을까요? 조선이란 나라는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했고 그 이후에도 계속 장자 계승이 안됐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이라는 나라는 자기 정당성을 위해 맹자가 필요했던 거죠.
주자학의 정통은 중국에 있는게 아니라 조선에 있습니다. 주자를 계승한 사람은 송시열입니다. 조선 성리학의 거두 송시열 선생은 맹자를 천번 이상 읽었다고 합니다. 주자는 송나라 당시에 가택연금되어 있었고, 그의 학문은 위학이라하여 금지학문이 되었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을 보면 신하가 왕 앞에 엎드려 "전하 그러시면 아니되옵니다."라거나 "통촉하시옵소서"라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는데요, 사대부들의 생각은 왕은 지식인들의 말을 계속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하의 발언권이 강하다보니 왕이 함부로 할 수 있는게 거의 없었겠지요.
맹자에서는 "너는 왜 그렇게 이익을 좋아해?" 너가 지금 이런거 이런거를 잘못하잖아'라는 것을 거침없이 이야기 합니다. 이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다는 맹자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만해 보이기도 한 것이 맹자의 텍스트입니다.
맹자가 유세하는 법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를 보면, " 내 선생에게 유세에 대해 얘기해 주겠노라. 상대방이 알아주더라도 꿋꿋해야 하고,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역시 꿋꿋해야 한다." 그러니까 나의 유세는 왕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에 달려있지 않다는, 곧 내 말 자체가 진리라는 것이죠.
"덕을 높이고 의를 즐거워한다면 꿋꿋할 수 있다. 그러므로 士는 뜻을 이루지 못해도 의를 잃지 않으며, 뜻을 이룬다 해도 도를 떠나지 않는다. 뜻을 이루지 못해도 의를 잃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지킬 수 있고(得己) 뜻을 이루더라도 도를 떠나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실망하지 않는다. (...) 뜻을 이루지 못하면 홀로 자기 자신을 선하게 하고(獨善) 뜻을 이루면 천하와 선을 함께 한다.(兼善)" (〈맹자〉 진심 상)
이때 독선과 겸손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때 독선을 우리는 나쁜 의미로 쓰지만 여기서는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서 자기 혼자 선을 지키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의 어떤 가치 평가가 왕 따위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유세에는 왕의 비위를 맞추는게 아니라 자기의 옳바름과 정당성을 끝까지 설파하느냐 못하느냐 집요하게 얘기하는게 맹자입니다. 이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기 때문에 자기 수련이 강조됩니다. 이것이 맹자의 기백과 기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비자는 '황제의 역린을 거슬리면 안되며, 왕의 비위를 맞춰가며 할 말을 해야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대찬 사람을 나타내는 맹자의 용어가 대장부입니다. 채운샘은 대장부라는 말을 함부로 쓰면 안된다고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유세할 수 있는 심지가 서 있는 그런 사람이 대장부라고 하셨죠.
2) 자기수련
대장부에 대한 이야기가 맹자 <등문공>에 나옵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서 천하의 대도를 행해야 한다. 뜻을 얻으면 백성들과 더불어 도를 따르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니, 부귀도 그 마음을 어지럽히지 못하고 빈천도 그의 뜻을 바꾸지 못하며, 위압과 무력으로도 그를 굴복시킬 수 없다. 이를 일러 대장부라 한다." (〈맹자〉 이루 상)
천하가 자기 집이고 거기에서 자기가 올바로 서서 똑바로 그 길을 걸어가야 된다고 하는 부동심이 대장부의 핵심입니다. 한마디로 '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내뜻을 바꾸지 않겠다'는 것이 대장부의 삶입니다. 또 하나 맹자가 강조한 것이 '모든 결과에 대한 것은 자기에게 돌이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에서 출발해 자기로 귀결되는 철학인거죠. 그래서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해야합니다. 천하와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내성외왕인 것입니다. 자기를 이 천하와 일치시키게 되는 내적 역량의 최고 상태가 성인인 거죠.
맹자는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자포자기가 무엇인가가 나옵니다. 스스로를 해치는 자가 자포자입니다. 맹자는 말합니다. "스스로를 해치는 자(自暴者)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는 자(自棄者)와는 함께 알 할 수 없다." 자포는 자기가 하는 말이 마땅함에 맞지 않는 것으로 자기가 자기를 때리는 것을 말합니다. "인이란 사람들의 편안한 거처요, 의는 사람들의 바른 길이다. 편안한 집을 비워두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버려두고 따라가지 않으니, 안타깝도다." (〈맹자〉 이루 상)
우리는 순간순간 수없이 자기를 버리고 있는게 아닌지요. 무엇이 편안하고 쉬운 것인지 정신이 생생해지는 문장입니다. 자신을 때리는 줄도 모르고 때리고 있으니 맹자의 안타까움이 전해지는 것 같네요.
지난주에 나왔던 본성에 대한 내용이 다시 언급되었는데요, 우리의 마음에 아주 짧은 순간이라도 의도하지 않는 선한 마음으로 누구를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그 소중한 마음이 우리의 밑바닥에 있으니 그 마음을 놓치지 말고 그 자연스러운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다하는 자는 본성을 알게되고, 그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을 다한다는 게 뭘까요? 그것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괴리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 떳떳하지 못하죠. 그런 면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매우 능동적인 것입니다. 본성을 회복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채운샘은 본성이라는 건 인간 개체를 흘러넘치는 힘이러고 하셨는데요, 본성이 우리의 어떤 기질과 만나서 개체를 구성하는 것이지 개체의 정체성 같은 게 아니라고 합니다. 본성은 우리 마음의 내재하는 우주의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하는 우리 자신을 흘러 넘치는 비개체적 차원인거죠. 비개체적 마음을 알면 결국 하늘을 알게 되는 것, 내 안에 하늘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상을 발전시키면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는 인내천이 되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이이해가 부족해 두고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맹자의 자기 수련 논리는 자신을 수련하면서 운명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맹자에게 중요한 건 부끄러움의 미학입니다. 떳떳하지 않다는 것은 부끄러움입니다.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어서는 안되니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야말로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타자 속에서 자기를 전혀 타자를 통해 자기 스스로를 돌이켜 볼 수 없는 무능력입니다. 인간이 부끄러움을 안다고 하는 것이 끊임없이 엄격한 자기 수련을 거쳐서 이것의 결과로 모든 왕 앞에서 당당하게 유세를 할 수 있는 존재가 '선비'인 것입니다. 그래서 맹자가 왕을 만나면 언제나 맹자의 정치론의 핵심은 이(利)가 아니라 의(義), 인(仁), 예(禮), 지(智)입니다.
3) 利의 시대 - 맹자의 일성은 '하필왈리(何必曰利)
맹자가 양혜왕을 뵈었을 때 왕이 말씀하시길, "장차 내 나라를 이롭게 함이 있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하시길,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의가 있을 뿐입니다..."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위에서 이익을 얘기하면 아래까지 다 이익을 얘기하기 때문에 아래서부터 반란이 일어나 다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왕이 이익을 따질 때 이미 가진게 많은데도 무언가를 빼앗아서 더 늘리지 않으면 만족하지 않는 세상이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맹자는 이기심은 제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본성이 이기심이 아니기 때문이죠. 맹자는 본성론과 정치론을 연결시킵니다. 정치는 이익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한 공존의 역량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정(仁政)입니다.
4) 인정(仁政)과 왕도(王道)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의 논리가 맹자의 정치 구도입니다. 정치는 인으로 해야한다는 인정(仁政)을 행하는 정치가 왕도 정치로 맹자의 핵심 개념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 자기 땅을 키우려고 하고 지배하려는 자가 패자입니다. 패자의 백성은 큰 땅을 가지만 기뻐하지만 그 뒤에 늘 근심이 있습니다. 언제 또 전쟁이 일어날지 불안하기 때문이죠. 그러면 왕도(王道)정치의 인정(仁政)이라는 것은 뭘까요? 맹자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민심이 천심이다'입니다. 인정은 백성들의 본성을 일깨워주는 것으로, 사람들의 마음에는 모두 인의예지가 있기 때문에 그 마음이 선하게 되는 마음이 건드려지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죠. 사람들의 정치의 핵심은 어떻게 마음이 다른 사람과 통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느냐입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무엇으로 기뻐할까요. 맹자가 본성이 선하다고 할 때 그 본성은 없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우주자연에서 왔으니까요.
우리 시대 맹자의 정치학을 갖고 오려면 어떻게 바꿔야 할까요? 이 질문은 우리는 기쁨을 뭐라고 생각하는지, 진짜 기쁨을 다르게 정의하는게 먼저 필요한게 아닐까싶습니다. 맹자는 기쁨을 본성을 나눌 수 있을 때, 본성이 통할 때 그것을 기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같이 즐거워할 수 있다면 이 정치가 인정이라고 했습니다.
맹자가 민과 천이 통한다고 했을 때, 천으로 바로 사람들 마음 속에 있으므로 권력이 내가 가진다고 가져지는게 아니라 사람들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천명 때문에 맹자는 두고두고 논란의 여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맹자의 정치학은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채운샘은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게 사실은 우리가 지금 뭔가를 놓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말씀 하셨는데요, 현실에서 우리가 절대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을 놓쳐야만 될 것 같은 어떤 것들을 우리는 더 이상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게 아닐지요. 이상적이란 말은 할 수 없다가 아니라 어렵다는 것일 수 있고, 근본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로 다 되지 않는 그 어떤 지점들을 언제나 대면하면서 가야 된다, 그랬을 때 우리가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길을 잃었다는 느낌이 들수록 정신을 차리고 검토해 봐야 되는 근본적인 지점"이라고 하신 채운샘의 말씀이 깊이 와닿았습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사유를 보여주는 건 노자와 장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노자와 장자도 우리가 이런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저 밑받닥의 본성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합니다.
이어서 장자의 전체적인 스케치가 있었습니다만 이번 주 후기는 이것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맹자 몇 구절만 봐도, 용케 죽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ㅋㅋ;; 군주에게 저렇게 유세하는 맹자 본인이 이미 부동심을 보여주고 있는지라, 이야... 이거 참 읽는데 저도 같이 혼나지만, 맹자에 대한 존경심도 같이 든단 말이죠? 아마 군주들도 비슷한 걸 느끼지 않았나 싶고, 그래서 저렇게 급진적인 말들을 내뱉고도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ㅋㅋㅋ
진짜로 저런 말을 뱉었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겠죠. 지금 우리가 맹자의 말들을 어떻게 소화할 것이냐가 중요할 텐데요. 으음... 확실히 '이상주의'가 맹자를 읽을 때 두고두고 되새겨야 할 핵심 중 하나인 것 같아요. 너무 현실로부터 고원한 말을 던지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맹자 입장에서는 저런 근본적인 것을 빼놓고는 어떤 것도 얘기할 수 없었던 것이겠죠. 새삼 왜 근본적인 것이 가장 급진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는지도 생각이 되고. 알면서도 뜨거워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