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일요일 4학기 다섯 번 째 시간 <장자莊子>.
다른 철학들도 마찬가지이겠으나 장자는 유독 무슨 말인지 아리송하여 무언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공부의 깊이가 더해지면 무슨 말인지 조금씩 이해가 가지 않을까하고 생각하며, 당장은 이해가 안가도 정리를 하며 되돌아보면 조금은 낫지 않을까하는 심정으로 시작해봅니다.
위진 시대. 한나라라는 제국이 쇠락하고, 그 중심을 이루던 문화, 정치 이념들이 깨어지고 흩어지면서 그야말로 아사리 난장판이 되어버린 시대로 노장 사상이 유행하던 시기라고 합니다. 불교라는 외부 사상이 유입되어 외부 사상과 자기식의 문제의식이 더불어 섞이면서 생각의 오염과 생각의 번역이 일어나던 시기였기에 유가에 비해 다양한 해석과 재구성이 가능한 노장 사상이 힘을 얻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겠습니다. 약 500년이 지나 위진시대에 이르러 장자의 사상에 대한 재편집, 재구성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지금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판본인 곽상 주석본도 이 시대의 것으로 총 33편-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의 구성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중 내편 7편이 장자의 저작일 것이라 추정된다고 합니다.
곽상은 장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장자는 가히 근본을 알았다고 말할 만하다. 그리하여 자신의 광언(狂言)을 숨기지 않았으니, 말은 비록 잘 이해되지 않아도 무언가 감응하는 바는 있다. 감응하는 바는 있어도 잘 이해되지 않으니, 그 말이 마땅해도 쓸 데가 없다. 또 그 말이 사물과 현상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 고원하여 행할 수가 없다... 진실로 세속의 것과는 사이가 있다. 가히 無心을 아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노자와 장자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노장 둘 다 근본에서 출발하나 노자는 근원으로 돌아갈 것을 얘기하는 반면, 장자는 그 근본 위에 다채로운 현상 세계가 있고, 그 세계를 그냥 거닐면 된다고 얘기합니다. 채운선생님은 그 차이를 뼈대를 드러내는 느낌의 흑백영화와 살 속에서 뼈대를 유추하게 하는 컬러영화,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과 칸딘스키의 다채로운 추상화에 빗대어 설명해주셨습니다. 노자는 성인에 대해 얘기하지만 장자는 비표준적, 비규범적 존재들, 규범성으로 포착되지 않는 괴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습관적 사물의 형상을 해체하는 것이지요. 또한 노자는 잠언 혹은 시편과 같다면 장자는 우화적이고 풍자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툭 던져놓고 그 안에서 무엇을 끄집어내어 어떻게 구성할 지는 읽는 이의 몫입니다. 윤리학 측면에서 본다면 노자는 분별에 끼어 맞추어 억지로 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장자는 계속해서 무엇인가로 해체, 생성되어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 있는 존재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질 들뢰즈는 철학책은 일종의 SF소설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SF소설은 이미 여기에 있지만 아직 여기서 포착되지 않는 이야기에 가깝습니다. 철학도 마찬가지로 이미 여기서 작동하고 있지만 아직은 포착되지 않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나의 현상으로 고착되어 누구나 포착할 수 있기 전에 우리 삶을 잠식해나가는 지점을 미리 읽어내는 것이 철학입니다. 여기서 채운샘은 12연기(十二緣起)의 출발인 무명(無明)에 대해 이야기하셨습니다. 무명은 말 그대로 어리석음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어리석음은 무엇일까요?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별적 지(知)에 사로잡혀 있는 한 '무명'이라고 합니다. 생사를 이해하지 못하면 계속 어리석은 상태인 것입니다. 삶에 내재된 것으로 죽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무명'인 것입니다. 무명 속에서 계속 쳇바퀴 돌 듯 계속 살아가는 것이 행(行)입니다. 근본을 다루고 있는 철학은 우리는 어디서 왔지? 어디로 가지? 라는 궁극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세속의 행복을 누린다고 할지라도 이 질문 없이 살아가는 삶이 과연 허무함의 벽을 넘어갈 수 있을까요? 라는 채운샘의 말씀이 가슴속에서 오래도록 맴을 돕니다.
어슐러 르 귄은 SF가 문학에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은 열린 우주를 마주하는 포용력이라고 얘기합니다. SF는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열려 있고 어떤 문도 닫아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문이 열려 있고, 모든 연결이 가능한 아주 거대하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그런 집. 그런 의미에서 장자는 가장 오래된 SF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곽상은 장자의 '호접몽'에 대하여 꿈에서는 나비인 채로 흡족하고, 깨어서는 나인채로 흡족하니, 저절로 유쾌하고 흡족한 것은 구분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지 구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인 상태이든 저것인 상태이든 그 자체가 긍정되면 이것과 저것이 둘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는 하에서 다름을 넘어가는 차원인 것입니다. 이것이 되었든 저것이 되었든 서로의 상태를 그리워하거나 갈망하지 않으며, 펼쳐지는 세계가 있는 대로의 세계인 것이지 어떤 세계가 더 우아하거나 진짜이거나 이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나카지마 다카히로는 '호접몽'의 요점을 '급진적 타자화'라고 말하는데, 이는 네가 있고 내가 있는데 우리는 하나야 라는 관념적 봉합이 아니고, 너는 너이고 나는 나인데 너는 너인채로 나는 나인채로 충분히 긍정하면 우리는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억지로 일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각자가 각자의 삶에 흡족한 채로만 우리는 위계나 구분을 없앨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비는 나비이고 나는 나인데, 나비인 것으로 어떤 결여도 없고 나인 것으로 어떤 결여도 없으니 그러므로 나의 세계와 나비의 세계는 다르지 않다는 바로 지금의 존재 방식에 대한 절대적 긍정인 것입니다. 공자가 환란에 있을 때는 환란에서 편안하게 거하고, 오랑캐 땅에서는 오랑캐 땅에서 편안하게 거한다고 하셨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모든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기쁨으로 인도될 수 있느냐가 진정한 윤리의 문제인 것이라며, 여기 있지 않은 것을 꿈꾸는 것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내가 사람들과 관계에서 기쁨을 구성해야 하는 것이라는 채운 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곱씹으며 4학기 5주차 후기를 마칩니다.
어째서 노자와 장자가, 그것도 특히 장자의 사유가 사람들에게 널리 읽혔는지는 분명 시대적 배경과 무관할 수 없죠. 여기서 시대를 설명할 수 있는 말로 '생각의 오염'과 '생각의 번역'이란 키워드는 아주 적절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호접몽에서도 나타나듯, 장자는 '오염'과 '번역'을 더욱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사유라 할 수 있죠. SF 소설과 장자. 강의를 들으면서 이 둘은 아주 찐한 만남이 되지 않을까, 혼자 두근두근했습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