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자신의 삶을 살라: 이탁오와 함께 읽는 <논어> 15주차 「위령공」편 후기
후기를 지금 올리다니 죄송합니다. 쓰다가 마무리를 안 하고 깜빡했더니 오늘입니다.
이번 주 <논어>는 위령공 편을 공부했습니다. 벌써 15편까지 읽었네요. 읽다보니 익숙해서 다시 음미해보는 문장도 있지만, 처음 보는 것처럼 너무 생소하게 느껴지는 문장도 있어 놀라게 되네요. 강의 초반엔 원문도 베껴 쓰고 좋은 문장은 킵해 놓기도 했는데 편이 길어지고 한두 번 밀리니까 어느새 흐지부지 마음의 짐만 되어버렸어요. 샘 말씀대로 서너개라도 좋은 문장 남기는 걸로 선회했습니다. 논어의 문장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생략도 많아 짚으면서 해석하기가 수월하지 않은데, 그래도 위령공편까지 오니까 반복되는 이야기들이 있어 어떤 것을 강조하는지는 알 수 있는 것 같아요. 샘 강의 중 저에게 남았던 문장들을 간단히 보겠습니다.
人能弘道 非道弘人 :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혀주는 것이 아니다
28장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아주 간단한 문장인데, 공자의 핵심적인 사유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공자님의 말씀에 따르면, 사람 바깥에 道가 없고 道 바깥에 사람이 있지 않기에 도가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道는 추상적인 실체라기보다는 인간이 펼쳐내는 德(덕)에 가까운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익숙하게 진리를 외부에 둡니다. 목표를 세우고 성취하고 달성하기 위해 달려가는 것에 너무나 익숙하지요. 추진력이 좋다거나 효율성이 좋다는 말로 성취 속도를 부추기는 게 우리 시대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도가 어디에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그 이치에 참여 하는가의 여부입니다. 샘은 ‘의지처 없음’이라고 하셨는데,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참여로, 나의 실천으로 도는 작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상엔 지금도 온갖 오류와 비극들이 난무합니다. 전쟁과 무고한 학살이 이어지고 있고, 역사를 통해 봐도 같은 실수가 계속 반복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봐도 자신의 습에 매어 스스로를 괴롭히게 되지요. 그래서 공자님도 “잘못이 있어도 고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잘못이다”(過而不改 是謂過矣)라고 하셨습니다. 도란 이를 자각하고 바로 잡는 것이기도 합니다. ‘앞에 있는 듯’, ‘멍에 위에 기대어 있는 듯’ (立則見其參於前也, 在輿則見其倚於衡也)늘 가까이 두고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을 강조합니다.
人無遠慮, 必有近憂 : 사람이 먼 앞일을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눈앞에 근심이 있게 된다
이탁오가 역경의 핵심 표현이라고 평을 단 11장의 문장입니다. 8글자에 아주 많은 생각거리가 담겨 있습니다. 멀리 보면, 넓게 보면, 가까운 데 근심은 별거 아닌 게 된다는 말인데요. 작은 문제에 너무 연연하지 말라는 말로도 읽히구요. 이것이 눈앞의 당면 문제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은 아니겠지요. 모든 것은 늘 변화하기 때문에 긴 안목에서 보면 지금 당장 벌어진 일들에 대해 전전긍긍하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일 겁니다. 변화의 국면을 이해하고, 변화를 유연하게 수용하는 것을 중요한 역량으로 보고 있죠. 이것이 지금 당장, 바로 나에게 적용되는 것을 넘어, 관점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遠慮’를 무엇으로 볼 것인지가 우리에게 남은 질문인 것 같네요. 중년을 넘어선 저도 시대의 흐름이 몇 번 바뀌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앞으로는 그 변화가 더 빨라지겠죠. 가까이는 남은 시간을 살아가기 위한 지혜를 구하는 것부터 나의 세대를 넘어 지속될 삶에 대한 지혜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어떤 행위가 다음의 다른 국면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면, 원려는 지금 이 순간의 나의 행위이기도 한 것이죠. 뉘앙스는 좀 다르지만 공자님이 恕에 대한 말씀이 연결되는데요, 미루어 확장한다는 것을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恕 己所不欲, 勿施於人)” 이라고 했죠.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상대도 살게 해주고, 내가 싫은 것을 상대에게 미루지 않는 것으로부터 원려를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失人과 失言 그리고 知人
말할 만한 사람에게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말할 만하지 않은 사람에게 말하면 말을 잃는다.(可與言而不與言, 失人, 不可與言而與之言, 失言) 라는 7장의 문장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失人이나 失言하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 마음일 겁니다. 失人이란 마음을 터놓고 말할 사람을 만났는데도 터놓지 않아 사람을 놓치는 것입니다. 失言이란 바뀌지 않을 걸 알면서 괜스리 필요 없는 말을 해 말만 허비하는 걸 말하겠지요. 그런데 실인에 비추어 생각해보면 고칠만한데도 말해주지 않아 그가 더 큰 과오에 빠지게 만드는 것도 “失”이 아닐까 합니다. 그래서 말은 늘 신중하게(愼言語) 해야한다고 강조합니다. 샘은 실언과 실인에 빠지지 않을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하셨는데, 知人의 다른 버전 같습니다. 어떤 말을 건넬 사람인지 알아보는 안목이 있은 연후에야, 실인도 실언도 하지 않을 것이기에 결국 자신을 수신하는 것으로 돌아오게 되네요.
전 이탁오가 ‘견식의 중요성’을 말하는 부분이 실언과 연결해도 재미있게 읽혔는데요, 이탁오는 다른 글에서 견식이 본성을 가린다고 매우 우려합니다. 지식을 절대화하고 남의 해석에 기대는 것을 경계한 것일 텐데요. 여기서는 견식이 ‘재주와 용기’라는 두 가지 부분에서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공부를 하는 과정에 이 두 가지가 서로를 추동하며 길러진다는 것인데요, 배움이 함께 따라가지 않는 용기는 필부필부의 용기일 뿐이고 그 반대는 공허하겠지요. 그런데 배우게 되면 부족한 듯해도 반은 재주가 되고 반은 용기가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을 보충해 줄 수 있다는 거예요, ‘지혜로운 자는 흔들리지 않고’ ‘용감한 자는 두려워하지 않’기에 배움이 이것을 기른다는 거죠. 그래서 지혜로운 자는 어떤 자를 사귈 것인지, 어떤 말을 용기내어 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28장은 정말이지 한문의 맛을 깊이 느낄 수 있는 문장이기도 한 것 같아요. 어려운 단어도 없고, 앞뒤 구절에 살짝 변화만 줬을 뿐인데도 의미가 엄청 깊어지죠. 강의에서는 우리가 진리를 외부에 존재하는 걸로 좇는지, 자기 삶 속에서 실천하는 건지 두 개의 태도로 설명해주시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공자님은 利, 命, 仁에 대해 별로 말씀하지는 않으셨지만, 道에 대해서는 꽤 말씀하신 것 같군요. (사실 '인'도 드물게 말씀했다기에는 너무 여기저기 출몰하긴 하지만요. 아마 제자들이 기를 쓰고 듣고 기록한 덕분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결국 '도'가 결국 무엇인지도 말씀하진 않으셨죠. 확실히 공자님에게 진리는 하나의 의미로 정의되기보다 실천해야 할 무엇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이번 논어 읽기에서 개인적으로 이탁오의 평을 재밌게 읽게 되는데요. 논어를 이렇게 뜨겁고도 신랄하게 읽는 이탁오의 모습과 더불어 논어에 대한 저의 이미지도 바뀌고 있습니다. 옥과 같이 따뜻한 공자님의 기운이 뜨겁고도 날카롭고 유쾌한 이탁오의 기운과 섞이는 것 같달까요? 분명 비슷한 얘기인 것 같은데, 공자님이 말씀하실 때와 이탁오가 말할 때가 참 다르단 말이죠. 그게 배움과 용기의 관계에 대한 해석에서도 드러났죠. 공자+이탁오. 곱씹을수록 아주 맛나는 조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