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자>에게로 더 가까이
<철일>의 4학기 여덟 번 째 강의는 열자와 산해경입니다. 열자는 노장 계열의 사상이라고 지난 시간에도 말씀하셨죠. <열자>나 <산해경>이 쓰여진 것은 전국시대로 추정되지만 여기저기 흩어져 전해지다가 한나라 때에 정리된 것으로 보여진다고 하셨는데요. 왜 이 시대에 정리되었는가라는 채운샘의 해석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시다시피 한나라(BC202~AD 220)는 한학(漢學), 한자(漢字), 한의학(韓醫學), 한지(漢紙) 등에서 보여지듯 중국 문화의 기틀이 형성된, 400년 이상 지속된 제국입니다. 한나라는 유교 중심으로 사상과 정치 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기준으로 만드는 힘이 견고하게 작용했는데 여기의 반작용으로 더불어 이탈하는 힘도 강하게 생겨납니다. 중심은 어디에도 없을 뿐 아니라 황당하고 기이하여 현실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보이는 <열자>와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요괴 같은 동물이 많이 등장하는 <산해경>이 정리가 되는 것이죠. 중심화의 힘이 강한 만큼 외부로 도주하는 힘도 강한 시대로 볼 수도 있겠죠. 이 양극성의 힘이 같이 커지는 것이 인간 삶의 이치이자 역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우리 시대만 보아도 1970년대와 80년대의 억압의 시대에 전국에서 반대하는 힘이 강하게 표출되었고, 개인들의 투지도 강했던 것 같네요. 이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번뇌와 불행한 사건, 견디기 힘든 사건이 생겼을 때 절실하게 질문을 하면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되는 것이죠.
- 저절로, 저절로
일단 열자의 두 축은 우주론과 죽음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우주론을 볼까요? 우주론은 <열자>의 <천단>편에 많이 나온다고 하네요.
“만물은 (...) 저절로 생존하고 저절로 변화하여 저절로 형체를 이루게 되고 저절로 빛깔을 지내게 되며, 저절로 알게 되고 저절로 힘을 발휘하여 저절로 없어지고 저절로 멈추게 된다.” 이는 노자에 나온 얘기를 빌어온 것이기도 한데, “저절로”라는 단어가 말하듯 생존하고 변화하고 형체를 이루는 것에는 주재자가 바깥에 따로 없다는 것이죠.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이 딱 떠오르지요. 만물은 시작도 끝도 없고 이를 움직이게 하는 외부의 초월적인 힘도 없으며, 궁극의 시작도 없이 저절로 생존하고 또 없어진다는 것이 열자의 우주론입니다. 서구의 기독교적 신에 의해 천지가 창조되고 운영된다는 것과는 아주 다릅니다. 만물을 낳아 준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낳아진 존재는 낳아준 존재에 비해 열등한 존재가 되고 종속될 수 밖에 없게 되죠. <열자>는 외부적 힘을 상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나는 원인과 결과도 분리하지 않습니다. 열자를 포함한 노장 사상은 저절로 생존하고 저절로 변화하고... 이런 식으로밖에 근원을 말할 수 없습니다. 밖에서는 근원을 조망할 수가 없다는 것, 개체를 낳아준 존재가 개체 밖에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알아가는 것이 노장을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2. 음과 양을 근거로 해서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
열자의 우주론에서 ‘저절로’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것은 역시 ‘천단’편에 나오는 “
옛날 성인들은 음과 양을 근거로 해서 하늘과 땅을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음과 양을 근거로 다스렸다는 것은 세상에는 늘 동시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익히 들었듯이 음과 양은 절대로 대립이 아닙니다. 구체적으로 양은 볕, 음은 그림자. 이 둘은 언제가 서로가 서로를 전제하며 어느 것이 먼저랄 것도 없습니다.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 동시에 존재합니다. 마치 노장 사상이 유교의 중심적 사상에 탈주하는 힘으로 동시에 발달했기에 당시 사상적으로 풍성하고 서로를 더 잘 이해하게 된 것으로 비유해 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음과 양으로 다스림은 현실에서도 아주 실천적으로 사유해볼 수 있는데요.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세상도, 언제나 항상 행복한 세상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은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세상에서 그래도 함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고민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생각의 지평이 확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면 폭력을 사용하게 되거나 모두가 만족하게 만든 척하게 된다는 채운샘의 말씀을 깊이 헤아려 봐야겠습미다. 음과 양을 근거로 다스린다는 것은 이렇게 했을 때 저런 사람에게는 안좋을 수 있고, 저렇게 하면 이런 존재에게는 안 좋을 수 있다는 걸 아는 것인데 장자의 “양행(兩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그럼 이 세상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요? 하늘과 땅은 어디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열자는 태역, 태초, 태시, 태소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각각 기운도 나타나기 전(태역), 기운이 생겨난 것(태초), 형체가 이루어진 것(태시), 성질이 나타난 것(태소)이며 이들이 막 섞여 혼돈을 이룬 상태를 혼륜(渾淪)이라 합니다. 이들은 아직 형체와 변화가 없는 혼돈상태인데 여기서 물질이 생겨나고, 물질은 음양과 오행의 원리에 따라 변하여 다시 끝에 이르게 됩니다. 이 끝머리는 다시 변하여 또 다른 물질이 생겨나고 또 늙고 죽고 썩게 됩니다. 이런 순환과정에서 맑고 가벼운 기운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탁하고 무거운 것은 내려와 땅이 되며 중간의(중간에서?) 조화를 이룬 기운은 사람이 된다고 합니다. 하늘과 땅 가운데서 음양의 기운으로 형성된 인간이니, 성인들이 음과 양을 근거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게 이해가 될 법합니다.
물질이 생겨나서 변화를 겪어 다시 소멸하고, 또 다시 생성되는 것은 분화와 미분화의 순환으로 볼 수 있는데, 서양철학적으로 말하며 현실화와 잠재화의 과정으로 이해해 볼 수 있습니다. 현실화의 과정이 우리의 삶입니다. 현실화되어 나타난 우리의 삶은 하늘과 땅의 기운을 조화롭게 받아야, 그 원리에 따라 삶을 영위해야 할 터인데 지금은 전자기기가 신체의 일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전자기기에 의존한 삶은 위성에 의한 하늘의 기운에 치우친 것으로 이 때문에 감정이나 생각이 수렴되기 보다는, 매듭을 짓지 못하고 계속 붕-붕 떠 있어 길을 헤매는 모양인 것 같기도 합니다.ㅠㅠ
음양의 조화는 하늘과 땅의 기운을 조화, 아니 땅을 디디고 사는 우리 인간은 계속 수렴하고 마무리 짓는 과정을 의식적으로 노력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그리고 현실화와 잠재화가 계속 순환됨을 이해한다는 것은 각자의 삶의 과정에서 늙음과 죽음을 편안하고 가볍게 받아들이는 태도로 드러날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현실화로서의 삶과 잠재화로서의 죽음의 과정을 체득하는 것을 노년의 목표로 삼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죽음과 삶
열자의 우주론에서 죽음은 삶이 해체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자 새로운 생성입니다. 열자 사상의 다른 한 축인 죽음이 우주론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됩니다. 열자는 죽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고단한 삶에서 이제 자유로와지는 과정, 무거운 육신에서 가벼워지는 과정으로 봅니다. 그렇다면 삶도 다르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열자>의 유명한 고사인 ‘기우’와 ‘우공이산’ 이야기를 통해 삶을 다르게 들여다 볼 실마리를 찾고자 합니다.
1) 몸 있는 곳에 마음을 두어라 - 기우
‘기우(杞憂)’는 기(杞)나라 사람의 걱정, 곧 쓸 데 없는 걱정이라고 많이 쓰이고 있지만 <열자>의 여러 버전을 보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입니다. 기나라에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하는 사람, 그 걱정하는 사람을 걱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를 안타까이 느낀 사람이 깨우쳐 주려고 찾아가서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하늘은 기운이 쌓인 것은 맞지만 해, 달, 별은 아주 가벼운 빛이 쌓인 것이므로 떨어져도 부상당하지 않을 것이며, 땅은 흙덩어리가 쌓인 것이지만 세상 빈 곳을 모두 채우고 있으므로 무너질 리 없다고 하여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장려자가 이 얘기를 듣고 하늘은 기운이 쌓인 것이고 땅은 형체가 쌓인 것으로 무너지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이란 너무나 커서 끝장나기도 어렵고, 인간으로서는 알기도 어려우니 걱정할 필요는 없죠. 그럼에도 언젠가 무너질 때가 오긴 함으로 그때에는 걱정하는 것도 타당하다고 합니다.
열자는 이 모든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늘과 땅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도, 무너진다는 것도 모두 잘못이다. 우리는 무너질지 무너지지 않을지를 알 수가 없으니 거기에 마음을 둘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기우가 맞죠?) 태어날 때는 죽음을, 죽을 때는 태어남을 알지 못하니 살아 있는 동안 잘 살면 되고, 죽어서는 잘 죽어 있으면 된다고, 올 때는 갈 때를 알지 못하고 갈 때는 올 때를 알지 못하니 지금 일어나지 않는 일이나 과거의 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이전의 걱정과 논의를 무화시켜 버립니다. 지나간 과거의 일에 끄달리거나, 오지 않는 미래에 마음을 둘 것이 아니라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잘하면서 지금, 여기서 잘 살아라고, 지금 자신이 처한 곳에 마음을 다하면 된다고 합니다.
2) 무모함이 하늘을 감동시키다 - ‘우공이산’
‘우공이산’도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기는 이야기로 치부하고 마는데 실제 <열자>를 보면 다른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이 90인 우공이 산이 막혀 가까운 거리를 돌아가는 일이 힘들자 가로막힌 무지하게 큰 산의 엄청난 흙과 돌을 옮겨 평평하게 할 생각을 합니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의심에도 몇 사람과 더불어 실제로 옮기는 작업을 하며 어렵지만 한번만 작업을 하면 많은 이로움이 있다고 합니다. 우공이 산을 옮기는 일에 마을의 노인에서 어린 아이까지 참여합니다. 이런 무모함을 시도하는 노인에 감동하여 뱀을 부리는 신이 하늘의 도움을 얻어 결국 그 산을 통째로 옮겨주게 합니다. 결국 산을 옮기게 되죠. 미리 계산해서 안될 것 같으면 시도조차 하지 않고 무기력에 빠지곤 할 때 깊이 생각해봐야 할 고사로 읽힙니다. 일종의 지리 전설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매우 어리석은 이야기이지만 누군가를 크게 감동시키는 동화처럼 읽히지만 많은 함축이 있는 얘기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텍스트는 가히 접근도 못하고 채운샘의 강의와 유인물을 통해 접하는 열자이지만 비현실적인 것처럼 보이는 얘기들과 새로운 해석이 자꾸만 끌어 당기네요. 더 기이하고 중심성과 멀어지는 흥미진진한 <산해경> 얘기는 다음 시간 후기로 넘깁니다.
새삼 음양에 기반한 사유는 어디까지 확장할 수 있을지 궁금해집니다! 중심화하는 힘과 이탈하는 힘이 동시에 강해지고,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이 예리해지고, '모두'와 행복하게 살 수 없어도 '함께' 사는 것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고... 여러 화두가 음양의 관계에 바탕해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생각이 많아지네요... 그리고 열자의 '기우'와 '우공이산'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엄청 상식 밖의 이야기, 상식을 깨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우공이산을 단순히 무모함으로 볼지 아니면 지성감천으로 볼지 생각하는 것도 재밌지만, 저는 '기우'가 좀 더 우리가 어떻게 근심 걱정을 이어가는지 잘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 와닿았습니다. 걱정의 실체가 없다는 걸 보여주면서 걱정거리를 끊어버리는 건 한순간에 가능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자만큼이나 인상적인 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