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한여름에 시작된 논어 강의가 벌써 겨울 종강을 앞두고 있네요. 후기를 쓰려고 앞 선 강의노트를 넘겨보니, 온전히 기억나는 문장이 거의 없었습니다. 복습을 한다고 했는데 제 것으로 소화되지 못한 것이죠. 그러나 논어를 펼칠 때마다 매번, 어딘가 낯선, 이 문장들을 ‘멀리서 찾아온 친구(有朋自遠方來)’로 즐겁게 마주하며 호학에 대해 생각합니다.
양화 편 중 호학의 중요성을 강조한 8장을 주목하여 보았습니다. 공자님이 자로에게 ‘육언육폐’를 들어 호학(好學)의 효용 또는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배우기를 좋아함(好學)에서 ‘좋아함(好)’은 무엇일까. 채운 선생님께서 옹야 편 18장 강의에서 好자의 뉘앙스에 대해 설명해주셨는데요, 好는 끌림을 내포하는 글자로서 책을 안보고 싶어도 저절로 자꾸 보게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더 나아가 지속성과 평안이 결합될 때 ‘즐긴다(樂)’에 이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好’는 욕망, 지향, 추구 이런 단어들과 연결됩니다. 인간이 태어나서 배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배운다는 자체보다는 무엇을 배우고자 하는지가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 배움의 대상 혹은 목적은 자신의 지향, 욕망과 관련이 있겠지요. ‘배움(學)’에 대해서 채운 선생님께서 함축하는 뜻이 많이 들어가 있는 글자이며, 보통 기껏해야 책을 읽고 판단하는 정도를 배운다고 생각하지만, 사람들을 어떻게 이롭게 하는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배워야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여섯 개의 새겨들을 만한 말과 여섯 개의 폐단, ‘육언육폐’ 는 지, 인, 용, 신, 직, 강이라는 여섯 덕목을 추구하더라도 배우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탕, 우, 난, 적, 교, 광이라는 폐단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어떤 좋은 가치나 덕목은 단지, 추구하거나 고수한다고 해서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끝없는 배움의 과정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전혀 엉뚱한 곳에 이를 수 있음을 가르치는 구절입니다.
“호지-불호학-기폐야탕(好知不好學, 其蔽也蕩)”
“호인–불호학-기폐야우(好仁不好學, 其蔽也愚)”
“호용-불호학-기폐야난(好勇不好學, 其蔽也亂)”
지, 인, 용 ‘삼달덕’, 이 세 개의 궁극의 덕도 호학이 전제되지 않으면 폐단에 빠진다고 합니다. 지는 판단역량, 인은 감성능력, 용은 실천능력입니다. 채운 선생님은 이인 편 강의에서 지, 인, 용은 마음의 능력인데 이들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합된 역량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인을 좋아하는 데 배우지 않으면 사리불변을 못해서 어리석게 됩니다. 이인 편 3장, “오직 인자는 능히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 있고, 능히 다른 사람을 싫어할 수 있다(惟仁者能好人, 能惡人)”와 연관해서 생각해봅니다. 인은 단순히 감정이입이 아니라 판단능력이 포함된 것, 즉 지가 겸비되어야 할 덕목으로서, 인자만이 의와 예에 근거해서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무지한 데 배우지 않고서 착하기만을 원한다면 자기도 모르게 불의와 비례에 빠지는 것은 아닐까요.
지를 추구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방자해 진다고 합니다. 똑똑하고 싶으면 세상이치, 과학, 인간도 배워야 합니다. 도청도설로 주워들은 지식의 파편들로는 앎의 역량을 키울 수 없는데, 이는 자기화하여 체화된 지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길에서 듣고 길에서 내뱉는 도청도설은 숙고하지 않는다는 뜻이며, 자기가 전하고 자기가 습해야 한다고 합니다. 공부는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자기 몸과 마음의 역량, 즉 덕이 될 수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은 덕을 버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공부, 덕이 되는 지(知는) 어떤 것일까요? 이인편 15장에서 “배우기는 하는데 생각하지 않으면 다 빠져나가고 생각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와 함께 새겨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채운선생님은 생각 사(思)는 밭갈 듯이 마음을 갈고, 길을 내듯 정리 정돈하는 것이라고 풀이하셨습니다. 배움은 바깥에서 오는 씨앗, 생각은 자신의 내면의 밭이라고 보면, 싹 혹은 그 이상의 꽃이나 열매가 앎이 되는 것일까요?^^ 아무튼 배움과 사유의 결합이 없는 편협한 잘난 척은 ‘탕’, 방자함, 오만함으로 귀결되니까 열심히 밭을 갈아야겠습니다.
용하기를 좋아하는데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지럽힘에 있다고 합니다. ‘용자불구(勇者不懼)’, 용은 두려움 없는 실천과 행위의 덕목입니다. 현실화하는 힘입니다. 그런데 배우지 않고 직진하는 어리숙한 용맹은 자신과 주변을 망가뜨리기 쉬울 것 같습니다. 실행의 힘도 인과 지가 통합된 역량으로 발휘되어야 가치가 있다고 하겠습니다.
“호신-불호학-기폐야적(好信不好學, 其蔽也賊)”
“호강-불호학-기폐야광(好剛不好學, 其蔽也狂)”
“호직-불호학-기폐야교(好直不好學, 其蔽也絞)”
신뢰,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을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자신과 남을 해치는 데 있습니다. 위정 편 22장에서 신의에 대한 의미가 비유적으로 나왔는데요. 말과 수레의 연결고리인 멍에처럼 사람과 사람의 연결고리가 신(信)이라고 했습니다.(人而無信, 不知其可也. 大車無輗, 小車無軏, 其何以行之哉) 신의를 추구하는 것은 연대, 공유의 관점에서 필요한 가치이지만 ‘나’와 ‘우리’의 바깥을 배우지 않으면, 배신하면 죽는다 등의 극단적 해악으로 표출될 수 있습니다. 패거리 의식, 조폭 의리 같은 것. 배타적 결속과 닫힌 신념은 서로를 해치는 죽음의 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강과 직도 주변 사람들, 맥락, 상황을 고려하면서 추구해야지, 혼자만 잘났다고 고결하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강(剛)은 굳세고 강직한 것인데 상황 판단을 하지 못한 채 방자(狂)해진다고 합니다. 광(狂)의 의미가 잘 와 닿지 않아 찾아보니, 개 견과 임금 왕이 합한 글자로 거만, 진취, 어리석음, 경박함 등의 뜻이 있었습니다. 왕처럼 고원하고 진취적이지만 행동은 날 뛰는 개처럼 미성숙하고 경박하다 정도로 이해하였습니다. 광(狂)은 16장에도 언급됩니다. 공자님이 고금을 비교하면서 옛 광자는 방자(사 肆)하고, 지금 광자는 그냥 넘쳐흐른다(탕 蕩)고 근심하셨는데요. 이 탕(蕩)은 똑똑하고 싶은 데 배우지 않는 자에게서 나타는 폐단이기도 합니다(호지 불호학 기폐야탕). 정리하면 배우기를 게을리 하면서 잘나고 굳세고 싶은 욕심만 있을 때는 주변을 분탕질 치며 흐리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직(直)의 경우 자기 진실과 곧음만을 내세우면서 여타 상황을 보고 배우지 못하면 남을 팔아서라도 자기를 증명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배움 없이 직에 매달릴 때 나타나는 폐단인 교(絞)입니다. 옹야 편 17장에 직에 대한 구절 “사람이 산다는 것은 직이다. 직이 없이 사는 것은 요행히 죽음을 면하는 것일 뿐이다.” 이에 대해 채운 선생님은 ‘직’은 떳떳함으로서 단순히 거짓과 진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고귀한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떳떳하게 해주는 거짓말도 있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정직은 자기 마음에 꾸밈이 없고 중심이 서 있는 떳떳함이지, 남에게 인정받는 결백은 아닙니다. 남에게 증명하고 받고자 ‘직’에 집착하면 고자질, 비방, 모략도 서슴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육언육폐’는 일상 속에서 저 자신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악행과 실수들- 착한 사람 병, 잘난 척, 고자질, 방자함, 어리석음 등 이런 폐단들이 애초에는 가치 있는 덕목의 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문제는 알맹이 없이 추구만 했다는 것인데요. 그 진주 같은 알맹이는 배움을 통해서만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세상의 이치와 상황, 여러 관계, 타인에 대한 앎의 성숙의 과정이 있다면, 최소한 주변에 민폐를 덜 끼칠 수 있음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목적이 선하더라도 결과는 선하지 않을 수 있고, 선으로 향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밖에 없네요. 배움, 好學!
채운 선생님, 박규창 선생님, 문빈 선생님 매회 강의, 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양화편 8장을 바탕으로 <논어>의 핵심 개념들이 다시 정리되고, 관련 문장들을 환기할 수 있는 아주 꼼꼼한 후기네요! '지', '인', '용' 같은 덕뿐만 아니라 '신', '강', '직' 같은 윤리적 태도들도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알 수 있었는데요. 하지만 이 개념들이 어딘가에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니었죠. '배움' 없이 막연히 추구하기만 하면 오히려 폐단에 빠지게 된다고 했죠. 저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말하는 부분마다 조금씩 찔리더라고요. ^^;; 당연히 저러한 가치들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정말 제가 배움 속에서 추구하고 있는지 자신할 수가 없겠더라고요. 어떻게 보면 저러한 폐단에 빠지지 않는 것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육언'과 '육폐'만큼이나 중요한 건 '배움'이네요!
선생님 후기 덕분에 ‘육언육폐’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게 됩니다-! ‘지’, ‘인’, ‘용’, ‘신’, ‘강’, ‘직’을 좋아하더라도 ‘배움‘이 없다면 ’탕‘, ’우‘, ’난‘, ’적‘, ’교‘, ’광‘이라는 폐단에 빠지게 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리 좋은 덕목도 상황에 맞지 않게, 치우치게 사용하게 되면 폐단이 생겨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더라구요! 배움을 통하여 덕목을 충분히 체화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배우고 익히며 육언을 추구해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