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일 철학하는 일요일 후기
1. <산해경>, 포스트휴먼의 가능성
본격적으로 <산해경>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루쉰은 왜 어린시절부터 <산해경>에 매료되었을까요? 루쉰은 소설의 기원을 신화와 전설로 바라보고 있는데요, <산해경>에 담겨 있는 온갖 별난 이야기들 속에서 이야기란 무엇인가를 탐색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채운 선생님은 이야기가 만들어진다는 것 자체가 자기 존재를 자각하는 것이라고 하셨어요. 또한 자기가 경험한 것이 파편으로 남아있으면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에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시간을 깔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시간을 구성하는 문제라고요.
그렇게 우리는 다른 시간을 경험하는 느낌으로 <산해경>을 만났는데요, 도대체 이 기묘한 책이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된 것인가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있다고 합니다.
1. 우정설禹鼎設 : 순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우가 쇠붙이 모으기 운동 같은 걸 했나 봐요. 그걸로 제사용 큰 솥을 만들고 먼 나라에서 받은 여러 그림으로 솥에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거기에 새겨진 그림들에 대한 설명이 나중에 책으로 묶여졌다는 설입니다.
2. 지도설 : 고대의 토지 그림을 지도로 만들었는데, 지도에 나와 있는 각각의 기호 표시가 후에 <산해경>이 되었다는 설입니다.
3. 무도설巫圖設 : 루쉰이 주장하는 설인데요, <산해경>은 무사巫師들이 무속활동을 할 때 사용한 그림들을 기원으로 묶여진 책일 거라는 겁니다.
이중 무도설이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하는데요, 그러고 보니 <산해경>에는 온 세계가 신으로 가득한 세계가 그려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은 우리가 흔히 신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인간보다 빼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가슴에 눈이 달렸다든가, 머리가 둘이라든가, 말의 몸에 사람 얼굴을 하고 있다든가, 정상이라는 가치에서 한없이 벗어난 비정상적인 존재입니다. 채운 선생님은 거기에서 포스트휴먼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지금의 생태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철학적 가능성도 읽어내셨구요. 그러니까 기괴한 신체성이라는 것도 철저히 인간중심주의적인 관점이라는 것이죠. 우리 눈에 괴물로 보이는 그 존재가 인간을 바라볼 때는 마찬가지로 괴물로 보일 테니까요. 그런 식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천성처럼 붙어 있는 인간중심주의를 조금은 떨어뜨려 놓게 되지 않을까요?
2. 유세의 달인 한비자
한비는 이름입니다.(그럼에도 성씨만 따서 ‘한자’로 불리게 되지 않은 이유는 후대에 한비보다 더 유명한 한씨 성을 가진 문장가 한유가 ‘한자’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라네요.) 전국시대 때 한나라 명문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하고요, 순자의 문하에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재밌었던 건 대단한 필력으로 이름을 날린 분이 말더듬이셨다는 겁니다. 보통 유세가를 떠올리면 현란한 말솜씨를 먼저 생각했던 저로서는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유세를 한다고 할 때 말보다 중요한 것이 글이었다니! 한비자는 주변국들의 위협 속에 시달리는 한나라의 정치적 현실 속에서 울분을 느꼈고, 노자의 무위지치無爲之治에 바탕을 둔 새로운 정치적 비전을 가진 글을 썼습니다.
그게 오늘날 55편으로 묶여진 <한비자>라고 합니다. 한비자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5권은 “고분”, “오두”, “내외저”, “세림”, “세난” 등인데, 그는 유세의 어려움과 가능성을 깊이 꿰뚫고 있었고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는 비유가 탁월합니다. 비유란 누구라도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하는 방식이죠. 말을 재밌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고요. 정치인의 기본 덕목이 ‘비유로 말하기’라는 말씀을 들으며 기본 덕목조차 갖추지 못한 오늘날 정치인들의 말하기 방식을 비춰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해로”와 “유로”는 노자 도덕경에 대한 최초의 주석서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요, 한비자에게 노자는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만드는 데 큰 영감을 주었던 게 분명합니다. 한비자는 법이라고 하는 시스템이 올바르게 갖추어져 있으면 노자가 말하는 무위지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던 겁니다. 유가의 사상에서 현실감의 결여를 느끼던 왕이나 제후들에게는 그의 생각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던 것이고요.
진시황도 한비자의 책을 읽고 그에게 호감을 가졌다고 하네요. 근데 순자의 문하에서 한비자와 함께 공부했던 이사가 모함을 해서 한비자는 진시황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결국 죽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세의 달인 한비자도 결국 유세가의 삶에서 비운을 겪는 것을 보면 정치의 냉혹함과 유세의 어려움이 실감이 납니다.
덧. 감기에 걸려 후기가 늦어졌습니다. 오늘이 벌써 종강일인데요, 오래된 이야기 속에서 새로운 사유의 관점을 발견할 수 있어서 (조용히) 기뻤습니다. 고맙습니다!
저도 감기로 고생했는데, 동병상련입니다. ㅎㅎ 산해경은 확실히 당시 사람들의 세계가 어떻게 배치됐을지를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자료인 것 같아요. 이 세계는 인간만이 아니라 온갖 존재들, 지금 우리 시선에서 봤을 때 엄청 기괴해 보이는 존재들까지 살아간다고 생각할 때, '타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까요? 공포스럽다고 배척할 수도 있지만, 익숙하지 않은 형상의 존재에 대해 호기심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고... 문제는 우리가 점점 더 익숙한 모습을 벗어던지고 있고,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것인데요. 산해경이 쓰인 시대와 지금이 그렇게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