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를 종횡하며 온갖 사유에 접속했던 철학하는 일요일이 드디어 마무리됐습니다~! 하지만 이 기나긴 시간이 무색하게도 남아 있는 건 한줌 밖에 되질 않는데요.^^;; 그래도 정보적인 것보다 어떻게 공부를 하면 좋을지 감이 잡힌 것 같아요. 채운쌤께서도 말씀하셨듯이, 모든 철학은 언제나 자신보다 앞선 흔적들을 곱씹으며 특정한 시공간 속에서 출현하죠. 특정 시공간은 그 철학의 한계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철학이 탄생하기까지 어떤 마주침이 있었는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죠. 어찌 보면 1년 동안 채운쌤께서도 하나의 철학이 탄생하는 데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하나의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반복해서 말씀하신 게 아니었나 싶네요.
하지만 저희에게는 1년 동안 공부하면서 마음에 남은 철학자들이 하나씩은 있죠! 마무리로 철학하는 일요일이 어떻게 남았는지를 공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르는 일요일 아침! - 청라쌤
학기를 마무리한 지금에 와서 돌아보니 제 일상 안에 ‘철학하는 일요일’을 끼워 넣게 된 건 엄청난 축복이었구나 느끼게 됩니다. 대충은 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많은 사상가들을 만나면서 제 내면의 뿌리가 보다 단단해진 것 같거든요. 특히 맹자님을 배우는 시간이 가장 은혜로웠습니다. 미련스럽고 답답한 것 같아도 인간 본성의 선함을 믿어주는 그 마음이 얼마나 든든하던지요. ‘호연지기’는 세계를 믿고 자신을 믿는 용기와 같다는 채운 선생님의 해석도 놀라웠어요. 그 말씀의 영향 때문인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애니메이션을 볼 때 마히토가 힘차게 자신의 세계로 가는 문을 열어젖히는 장면에서 호연지기가 떠올랐고요, 저도 제 삶의 현장에서 보다 힘차게 제 몫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 ‘철학하는 일요일’로 촉발되다 - 연주쌤
제 개인적인 삶과 연결하여 고민을 많이 했던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나의 인생을 어떤 식으로 조형할 것인가? 여기에 답해야 하고 답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이다.’의 구절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동안 공부를 하는 이유가 자기 삶 속에서 자기만의 질문을 찾아가는 길이라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얘기한 원자들의 작은 비켜남. 우연한 마주침의 일탈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가 한 개인의 인생에서 무수한 변화 역시 자연의 현상이며,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그 변화는 살던 대로 살지 않을 수 있는 가능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변화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변화도 있겠지만, 거부하고 싶고 받아들이지 않은 변화도 무수히 많겠지요. 특히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란 변화는 철없던 저에게 나름 큰 힘든 일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일어나는 일들이 네가 바라는 대로 일어나기를 요구하지 말고,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 그러면 모든 것들이 잘 되어 갈 것이다.’(에픽테토스)
그때 위 구절은 저에게 아픈 마음과 동시에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습니다. 자연 안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고, 그 상황을 제가 어떻게 보내느냐는 저의 공부이기 때문입니다. 미약하게나마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조금은 생각해본 시간이었습니다. 2023년은 규문에서 채운 선생님 강의를 들으며 무슨 말인지 이해는 되지 않지만 마음속에 뭔가가 느껴지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앞으로 조금씩 알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3) 이름만 익숙했던 그 분, 공자 - 정희쌤
동서양의 많은 철학자들을 공부했지만 1, 2학기에 공부했던 서양철학자들의 이름은 이미 까마득하고, 이름만 익숙하게 알고 있던 동양의 철학자들 몇몇만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그 중에서도 ‘공자’라는 이름은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논어조차 제대로 읽어 본 적이 없어서 그 분의 삶과 사유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채운 선생님의 공자 수업을 들으며 어렴풋하게나마 공자의 이미지를 그려보았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두 가지는 ‘호학(好學)’과 ‘락(樂)’이었다.
호(好)라는 글자는 일종의 기호를 나타내는 말로 의식하지 않아도 끌리는 것이라고 한다. 지식이나 진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배움’을 좋아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수업할 때마다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모르던 것을 알게 되는 건 참 기쁜 일이야’라고 말을 해왔다. 뚜렷한 결과물을 만들고 성취를 이루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는 과정 자체가 즐거운 거라고 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하는 말과는 별개로 나는 공부의 장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때 힘들어하고, 조금만 어려우면 안하고 싶고, 그래서 자꾸 미루거나 대충 넘어가려고 했다. 의식하면서 해도 어려운 게 배움인데, 의식하지 않아도 배움에 끌리는 신체로 만드는 것은 가능할까? 모르던 것을 알게 되고, 배움을 통해 내 신체와 생활을 바꾸어 나가려고 공부의 장에 들어왔는데 자꾸 꾀만 부리게 된다.
호학(好學)보다 더 어려운 공자의 ‘락(樂)’은 범접할 수 없는 경지로 느껴진다. 무엇을 하든 즐거운 삶, 어떤 곳에 있든 내가 있는 곳을 즐거운 곳으로 만드는 삶은 어떻게 가능할까? 환경이 바뀌고 주변 사람이 바뀌고 맡은 일이 바뀔 때마다 적응하느라 급급하고 실수할까봐 마음이 초조해지는 생활을 반복하는 나로서는 공자의 경지를 가늠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채운 선생님의 수업을 들으며 어디에 있든, 누구와 만나든, 무엇을 하든 그 안에서 즐거움을 만들고 즐거움을 느끼는 삶은 결국 나를 둘러싼 공간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배움의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학(好學)’과 ‘락(樂)’은 한 몸이구나. 현실의 삶과 공부를 분리한 채 양쪽 길을 기웃거리기만 했던 그간의 생활을 반성해본다. 배움을 좋아하고, 무엇을 하든 즐거운 삶을 살도록 실천해봐야겠다.
4) 디오게네스, ‘개’멋있어! - 문영쌤
저의 원픽은 단연 ‘디오게네스’입니다:)) 그의 솔직당당함, 대담한 존재감은 ‘개’멋있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올해 규문공부를 통해 만났던 공자, 이탁오, 몽테뉴 그리고 디오게네스.. 그들의 공통점이자 최대 덕목은 솔직함(파레시아)이었습니다. 디오게네스의 진실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의 것 즉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이었어요. 사회적 통념, 관습의 흐름을 거스르고 본성을 따르는 것이 솔직함이라고? 생각해보니 통념, 관습을 따르는 삶은 남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어서 ‘숨기거나 혹은 꾸미거나’.. 그러네요 절대 솔직할 수가 없겠네요. 평범하고 평균적이고 적당히 묻혀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기를 바랐고 쟤 공부하더니 좀 이상해졌어라는 말 듣지 않기 위해 눈치 봤던 저와는 참 많이도 다르네요. 그게 왜 볼품없고 매력 없는 삶인지 알게 됐습니다.
물론 본성을 따른다는 게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감정을 그대로 표출하는..그런 유아적 의미는 아니겠죠. 채운샘이 주신 힌트는 희노애락, 생로병사, 춘하추동의 리듬을 밟는 것이었습니다. 그 리듬을 어떻게 밞아야 보이는(행하는) 그대로가 바로 나인 삶이 되는지.. 스승과 벗들 곁에서 계속 배우면서 물들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