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탁오와 함께 읽는 논어가 마무리됐습니다~! 처음에는 이걸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정신 차려보니 미자, 자장 요왈편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전에도 몇 번 읽어봤지만, 읽어도 읽어도 새롭고, 읽어도 읽어도 쏜살같이 읽게 되는 게 바로 논어의 매력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탁오 덕분에 논어에 한 층 더 깊이 빠질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인생의 진리가 적혀 있는 텍스트로 논어를 읽는 게 아니었어요. 마치 공자와 대화하는 것처럼, 한 구절 한 구절마다 자신의 마음을 풀어놓은 주석을 보면서, ‘아, 이 사람은 논어를 통해 공자님과 그 제자들과 대화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논어에서 ‘배운다(學)’는 것은 ‘듣기(聞)’를 포괄하고, 배움이 일어나는 현장은 곧 대화였죠. 이탁오는 논어의 모든 구절을 대화하듯이 읽음으로써 ‘배운다’는 행위와 ‘논어’라는 텍스트에 새로운 뉘앙스를 부여한 것 같았습니다. 이제야 무언가를 배우고, 읽을 준비가 된 것 같단 말이죠? 개인적인 감상은 이쯤하고, 그렇다면 선생님들께서는 어떤 구절이 남으셨는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규창
맹인 악사 면(冕)이 공자를 뵈러 와서는 계단에 도착하였다. 이를 본 공자가 말했다. “계단이네.” 면이 계단을 거쳐 자리에 이르렀다. 공자가 말했다. “자리이네.” 모두 자리에 앉았다. 공자가 면에게 말했다. “아무개는 저기에, 또 아무개는 저기에 앉아 있네.” 악사 면이 나갔다.
자장이 말했다. “악사와 이야기하는 도리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 이것이 참으로 악사를 도와주는 도리이니라.”
師冕見 及階 子曰 階也 及席 子曰 席也 皆坐 子告之曰 某在斯 某在斯 師冕出 子張問曰 與師言之道與 子曰 然 固相師之道也 - 위령공 41장
나와 다른 감각, 다른 신체를 가진 자들과의 만남이야말로 우리의 배움이 나타나는 장소라 생각합니다. 말은 쉽지만, 실제로 이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매번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 장면에서 공자님이 생각하는 도(道)가 결코 일상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 맹인 같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일상을 구축하는 것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자장이 이 장면에서 질문한 것도, 공자님이 악사 면과 함께하는 모습에서 무언가가 느껴졌기 때문이겠죠. 담담하게 흘러가고 있지만, 공자님과 제자들이 생각하는 배움이란, 도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재겸쌤
자로가 석문에 하룻밤 묵게 되었다. 문지기가 말했다. “어디서 오는 길손인가?” 자로가 말했다. “공자의 문하에 있는 사람이오.” 문지기가 말했다. “아,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세상을 위해 노력하시는 그분.”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子路曰 自孔氏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 헌문편 41장
나이가 들수록 정해진 길, 실패하지 않을 길만을 걷고 싶어진다. 계산해 보고 안정된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길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안될 것 같은 삶을 살아갈 때 자신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할 것이지만 다른 살길이 생긴다. 그러니 시도하고 애쓸 뿐이다.
문영쌤
공자가 말했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자기 떳떳함(直)’이니, ‘자기 떳떳함’이 없는데도 삶이라고 하는 것은 요행히 (비난, 불행, 죽음)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子曰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兔 - 옹야편 17장
당당하게 살고 싶다. 말은 늘 그렇게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는 개운치 못함, 찝찝함, 미진함은 뭘까? 결과가 좋아도 공허한 이유는? 조그마한 실수나 실패에 쪼그라든다면? 마지막 강의를 들으면서 결국 ‘마음’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가능성을 점치고 결과를 재면서 사는 삶은… 지금 별일 없이(?) 살고 있다 해도… 요행히 목숨만 붙어있는 정도라고. 참 봐주는 게 없는 얄짤 없는 공자님이십니다.
‘그 길에 마음이 깃들어 있는가?’…… 자기 떳떳함은 마음을 다해 한 걸음을 자기 힘으로 걸을 때 오는 것이라는 것.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 길을 가신 공자님의 마음을 오래 헤아려봅니다.
경숙쌤
계로가 귀신을 섬기는 일에 대하여 여쭈었다. 공자가 말했다. “산 사람도 잘 섬기지 못한다면 어찌 귀신을 잘 섬길 수 있겠느냐.” 계로가 여쭈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묻고자 합니다.” 공자가 말했다 “삶을 알지 못하면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 선진편 11장
삶이 담담하면 죽음도 담담하고, 삶이 불안하면 죽음도 불안하다 삶과 죽음이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지인용(智仁勇)을 갖추어 담담하게 살 것인가?
호정쌤
공자가 말했다. “공부는 산을 쌓아 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서 멈추는 것도 자신이 멈추는 것이다. 또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서 나아감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 자한편 18장
한문 수업 유익했어요! 바쁜 와중에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고, 덕분에 감사히 잘 들었습니다.
은주쌤
공자가 말했다. “공부는 산을 쌓아 올리는 것에 비유할수있다. 한삼태기 흙이 모자라서 멈추는 것도 자신이 멈추는 것이다. 또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서 나아감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 자한편 18장
현미쌤
애공이 말했다. “제자 중에 누가 학문을 좋아합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안회라는 이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남에게 옮기지 않으며 같은 잘못을 두 번 다시 저지르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은 볼 수 없으니, 아직 학문을 좋아한다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哀公問 弟子孰爲好學 孔子對曰 有顔回者好學 不遷怒 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 - 옹야편 2장
그동안 논어 수업 감사했습니다 🙏🏻😊
은동쌤
“영원한 실패”가 예상되는 일들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고 시도하는 것. 그 각각의 실패에 낙담하지 않고 “원모어 타임”을 외치며 경쾌하게 걸어가는 것. 결국은 ‘실패’라는 상황조차 의식하지 않는 것!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저에게도 또 주위의 많은 친구들에게도 꼭 필요한 말이 아닐까 생각해요.
그리고 가끔 “공자님은 이럴 때 어떻게 하셨을까?”라는 생각이 툭 하고 떠올라요. 그게 저는 좀 신기하고 재밌습니다.
문빈샘과 규창샘의 ‘떠먹여 주는 문형 정리’의 반복 학습으로 한문의 문형이 점점 친근하게 느껴지는 경험을 했어요. 그리고 채운 샘의 강의는…말해 무엇할까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월요일 밤에 모여 같이 공부해 주신 샘들께도 감사하단 말을 전해요.
신우쌤
논어는 그동안 2번 정도 본 것 같은데, 이탁오 선생과 채운샘의 해석을 곁들여 공부하니 새롭게 다가오네요. 아마 혼자 읽었으면 역시 고리타분하구나고 생각했을 텐데 역시 해석의 중요성을 깨닫습니다. 올해 크크랩에서 주로 근현대의 서양 미술사를 공부했는데, 가을부터 생기 세미나를 하면서 현시대의 문제를 가로질러 만날 수 있었고, 논어를 공부하며 시대를 거슬러 올라 생각해 볼 수 있었네요! 그렇다고 제가 종횡무진 공부를 했다는 건 아니고요! ^^ 시대를 종횡하며 공부를 했으나 ‘종횡무지(無智)’함을 알게 되었네요.
그래서 제가 고른 논어의 한 문장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學而時習之 不亦悅乎”입니다. 여기서 ‘시습’을 ‘때때로 익히면’으로 생각했는데 이제 좀 ‘시간을 들여 익히면’으로 해석할까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글쓰기나 복습을 하여 자기 것으로 체화하는 것이겠지요. 글쓰기는 완성의 즐거움은 있으나 에세이 합평으로 기쁨이 오래가지 못하니 우선은 스스로 복습하며 즐거워하기로! ^^
함께(무려 5개월이나) 공부하신 샘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