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어떠한 모습으로 노자를 만나고 있을까?
항상 읽고 싶었던 고전 몇 권을 사 놓고 몇 장만 반복해서 읽다가 멈춘 책들이 있다. 「도덕경」도 그 중의 한 권이었다. 이게 무슨 말인지... 쉽게 글자는 읽히는데 의미는 선명하게 들어오지 않고, 이상하게 마음은 편안해지고 잠이 오던 책. ‘노자’에 대한 이야기를 지난 일요일 철학 강의에서 만나게 되었다.
[상식의 전복]
“철학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상식과 도덕에 짓눌러 죽지 않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야 한다.”
철학은 중심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중심을 의심하는 것. 중심을 이탈하는 힘으로 상식의 세계와 싸우는 것이 철학이며, 그런 점에서 공자와 노자도 그 지평선 속의 철학자란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막연하게 공자와 노자를 대립적으로 바라봤다. 공자는 이성적 영혼, 노자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이미지로 객관적인 근거 없이 그냥 그런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자 역시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관습적인 삶의 가치보다 호학의 삶을 중시하며 살았기에 세상의 상식에 맞서 싸우며 배움의 즐거움을 누린 철학자이다. 상식을 이탈하여 더 나은 이상적 사회, 주공이 실현했던 정치 사회에 대한 열망과 치열함. 그러한 사회를 이루어내고자 한 것이 공자이다. 이에 반해 노자는 그러한 이상을 부수면서 이성의 관념들을 근원적인 것으로부터 의심하고 해체하여 사유하는 철학자이다. 즉 유가는 더 좋은 중심으로 향하는 것이라면, 도가는 그 이상을, 좋음을 해체하는 철학이라 할 수 있다. 상식을 뒤집는 두 철학이 양극의 모습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이 글을 쓰면서 아주 미세하게 느끼고 있지만, 앞으로 공부를 하면서 조금씩 더 선명해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해체의 철학, 노자]
들뢰즈는 우리가 어떤 삶에서 진리라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아니라 끊임없는 분화, 차이와 반복에 의해 현실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시적인 것 뿐이라고 한다. 물음이 달라지고 문제를 구성하는 장이 달라지면 또 다른 진리가 만들어진다. 이에 어떤 문제의 장 속에 있느냐에 다양한 이야기가 전개된다. 데리다는 모든 것은 텍스트를 통해 존재할 뿐이라고 한다. 실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텍스트의 해석을 통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견고한 진리처럼 보이지만 어떻게 해석하고 변형하느냐에 따라 진리를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도가는 현대 철학자들에게 흥미를 준 철학이라고 한다. 대안이나 진리를 제시하는 철학이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고 믿는 신념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바깥의 철학으로서 노자의 철학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즉 여러 해석의 길들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사유의 방법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1장)
故常無欲以觀其妙
其. 여기에 맥락화해서 집어넣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노자가 된다고 한다. 김영효 선생님은 이를 ‘無’로 보고 있다. 지금의 내가 어떠한 삶의 장 속에서 고민하고 사유하는 과정에서 그 해석을 달리할 수 있기에 해석과 번역이 같이 가는 텍스트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여기에 무엇을 집어넣을 수 있을까?’라고 고민하지만, 아직은 머리가 하얗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과정에서 노자와 만나는 지점이 생긴다면 어떠한 해석을 하나씩 더 해나갈 수 있을까? 그러한 기회가 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6장) (40장)
綿綿若存 用之不勤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위 두 장을 연결하며 읽다가 지난 서양 철학 강의 중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이 떠올랐다. 원자의 운동은 ‘허공’ 즉 비어 있으니, 틈으로 다른 원자들이 들어오고 서로 결합하고 또 해체하는 것의 반복으로 변화와 생성이 이루어진다. 원자들의 우연한 마주침으로 다양한 운동의 차이와 반복이 이루어지는 내용에서 (40장)의 ‘道之動’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이러한 도의 반복된 운동은 ‘若存’, 겉으로 확연히 보여지는 존재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움직이며 살아가는 내적인 세계로 읽혀진다. 이렇게 면면히 이어져 오는 자연의 움직임이 ‘弱’으로써 끊임없는 도의 활동으로 그려진다.
사실 수업을 들으면서, 복습하면서 노자의 이야기는 미세한 실같이 보였다. 선명한 이야기를 계속 찾고 싶은데, 아직 보이지 않는다.^^
“노자는 텍스트의 원본은 없다. 우리는 어떤 입구로 들어가느냐에 따라 다양한 노자를 만날 수 있다.”
이것이 노자를 읽는 방법이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앞으로 어떠한 길로 향하면서 무수한 노자의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쌓을 수 있을까? 그러한 과정 속에서 노자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보일까?를 생각하며 이 글을 마무리 한다.
노자에 대한 반응이 매우 뜨겁군요! 한 선생님은, 노자의 성이 '이'씨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됐다고 하셨고, 강의 때 소개된 가치에 대한 계보학적 탐사가 매우 흥미롭다고도 하셨어요. 새삼 노자를 재밌어 하시는 선생님들 반응을 보면서, 저도 같이 노자를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 그리고 새삼 공자의 사유도 다시 생각하게 되고요. 확실히 공자와 노자의 사유는 결정적으로 '중심'에 대해서 다른 것 같아요. '더 좋은 중심'을 향하는 공자와 '좋은 중심' 같은 건 없다는 노자. 따라서 이 둘은 같은 길을 걸었다고는 할 수 없겠죠. 그러나 사람들이 관습적으로 '좋다'고 여기는 모든 가치에 대해 의심하면서 각자의 道를 발명했다는 점에서 이 둘은 그리 멀지 않은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년에 한 번 노자 읽기를 같이 해보시는 것도..?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