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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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나 묵자가 몇천 년의 시공간을 뛰어넘어 지금 여기에 와있다면 어떤 모습을 하고 무슨 말을 할까. 영화로 만든다면 어떤 배우가 그들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질까. 이런 상상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철학과 사상도 그것이 처음 태어난 시공간에 갇히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지금 나의 삶의 현장에서 마주치는 문제를 직시할 수 있는 무기로 작동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언어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다시 소환된 노자와 묵자, 혹은 공자. 그들을 내 앞에 데려와 본다. 내일 줌 강의 화면에 노자가 나타나 강의를 한다면? 상상하다 보니 왠지 그의 사상이 유례없이 경쾌하게 느껴진다. 노자는 나의 삶의 무기가 되어줄 수 있을까.
<노자>
해체론적 관점에서 바라본 노자의 사상은 단순한 파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것이 옳은 가가 아니라 그 옳음을 전제하는 기반을 허무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반 위에 성립하는 어떤 가치와 신념도 절대화하지 않는 유연성 속에서 만물은 무위로 드러날 뿐이다. 노자가 해체하고자 하는 인위는 인위 그 자체가 아니라 인위가 이뤄내는 문명의 극단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위의 동력인 호학(好學) 대신 절학(絶學)을 말한다. 절학은 배움 너머 더 큰 앎을 말한다. 그래서 인위로 이뤄낼 수 없는, 포착할 수 없는 근원적 생명력으로 돌아가(歸無) 이를 귀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貴食母). 노자에 현빈(玄牝), 식모, 아이 등 여성성과 관련된 비유가 많은 것은 유가의 중심지향적이고 남성적 정치 논리가 아닌 그 바깥, 근본을 향하기 때문이다. 일상에서는 그 근본을 보고 질박함 속에서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것이며(見素抱樸견소포박 少私寡欲소사과욕) 그래서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小國寡民 소국과민)을 이상으로 했다. 그 나라는 배와 수레,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고 이웃에서는 닭과 개 소리만 들릴 뿐 왕래하지 않아도 백성들은 자기의 풍속을 지키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곳이다.
노자가 지향하는 무위는 어둡고 도피적이며 무력한 세계가 아니었다. 만물을 돌보고 생성시키는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우리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은 모든 것을 길러내는 우주의 힘일 뿐이고 이것 믿고 뭐라도 조금이라도 하는 것 외에 무엇이 더 있을 수 있을까’ 강의 중에 위로가 된다고나 할까 가장 마음에 다가온 말이다. 나에게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더라도 우주 자연은 여전히 뭔가를 길러내고 있을 것이다. 그 생명력에 온몸의 힘을 빼고 내맡긴 채 잠시 유영해 본다. 이것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면 노자가 분명 나에게 와서 작동하고 있다는 작은 흔적일 게다.
<묵자>
묵자는 오랫동안 잊혀졌던 인물이지만 공자나 노자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실천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묵가는 엄밀한 규율을 지닌 공동체였으며 구성원은 대부분 하층민으로 노동과 절용, 절장에 기반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러나 공자와 노자가 비교,대립되기도 하지만 공유하는 부분도 많듯이 묵자도 그렇다. 기본적으로 묵가도 늘 삶의 이상을 요순우에 두었다. 특히 우임금이 부지런함과 근검절약을 본받고자 했다.
장자의 <천하>에 나온 묵가에 대한 당대의 인식은 양가적이다. 그들의 실천과 절제는 너무 극단적이어서 사람들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고 비판하지만 묵자는 정말로 온 세상 사람들을 사랑했으며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다고 평가한다.
루쉰은 <고사신편>에서 고대의 성인을 데려와 현실의 시공간에 놓아보는 작업을 했다. 루쉰은 처량하기 그지없는 묵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을 막은 업적을 세웠지만, 누구도 그 공을 알아주는 이가 없는 듯 돌아오는 길에서 몸은 지치고 발은 아프고 배가 고프다. 게다가 큰 비를 만나 잠시 피한 곳에서도 이내 쫓겨나 온몸이 흠뻑 젖고 만다.
자신의 신념을 극한까지 몰아붙여 온몸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사상가의 모습이 이렇게 초라할 수밖에 없는 것은 숙명일까. 그래서 양계초는 그를 작은 예수, 큰 마르크스라고 말했던 것인가. 다음 시간에는 묵가 철학의 핵심 개념인 묵가십론 즉 상현, 상동, 겸애, 비공, 절용, 절장, 천지, 명귀, 비악, 비명에 대해 알아본다.
노자가 나타나 강의를 한다는 상상 자체가 이미 경쾌한데요? ㅋㅋㅋ 철학과 사상을 그것이 태어난 시공간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게 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때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보다는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느냐가 철학과 사상이 살아남는 길인 것 같아요. 그렇게 봤을 때, 하나의 철학이 과연 어떤 때에, 누구에게 유용할지 생각할 필요가 있겠는데요. 고대 중국의 사상 중에서도 노자는 '폐허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우 유용할 것 같아요. 애초에 무언가를 세우기보다 세우려고 하는 무엇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유니까요. 그리고 지금처럼 국경부터 삶의 터전, 정치적 신념, 민족성 등이 무너지는 시대일수록 노자의 사유가 필요한 것 같고요. 묵자는 또 어떨지 궁금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