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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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에 공부한 先進편은 공자의 제자들이 주인공인 챕터입니다. 논어의 대부분이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말들이긴 하지만 이 편에선 특히 그들 사이에 오고간 일상의 말들이 나옵니다. 이를 통해 그들 사이의 관계를 볼 수 있는데 거기엔 애정과 갈등, 그리고 꾸짖음도 있습니다. 후기를 위해 다시 보니 마치 공자님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말이나 상황이 규문에서 벌어지는 일들과 비슷한 점도 많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자님의 제자들이라면 따르기만 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아 보이는 구절도 있고, 특히 안회를 얼마나 편애하셨는지 짐작하게 하고요. 이번엔 제자들이 많이 나오는 만큼 이름도 정리해 주셨는데요, 저처럼 헷갈리는 사람에겐 꼭 필요한 자료입니다. 다 중요하지만 그래도 중유(자로, 계로), 염구(자유, 염유, 염자), 안회(자연, 안연, 안자) 이 3명은 꼭 알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표를 참고하다보면 익숙해지겠죠^^
선진편에서 특히 유명한 구절은 25장입니다.
한 장면에 여러 사람(자로, 증석, 염유, 공서화)이 등장해서 자신들의 포부를 이야기 하죠. 정치에 관심 있는 자로는 한 나라가 전쟁에 기근까지 덮쳐 혼돈에 빠졌더라도 등용된다면 잘 다스려 3년 만에 백성들이 용기를 갖게 살려놓겠다고 말합니다. 염유는 등용된다면 살림살이를 풍족하게 하겠다고 하고, 공서화는 외교 정도의 업무를 맡아보는 소상이 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어 그 유명한 문장을 증석이 말합니다.
“暮春者, 春服旣成, 冠者五六人, 童子六七人, 浴乎沂, 風乎舞雩, 詠而歸.”
늦봄에 새로 지은 봄옷을 차려입고 친구들 대여섯 명, 어린 아이 여섯 일곱 명 데리고 기수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봄바람도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다고요. 이어지는 공자님의 깊은 탄식“吾與點也!”(나도 점과 똑같은 생각이다). 이 부분이 논어에서는 보기 드문 장자적 세계라는 겁니다. 이 구절에 대해 이탁오는 ‘공자가 증점과 뜻을 같이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유일하게 다른 해석을 했습니다. 이런 해석에 대해 채운샘은 공자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삶에 대한 각자의 이해대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고대 문헌을 해석할 때 꼭 이래야 한다는 건 없으니까요. 자기 마음속에서 뭘 원하는지에 따라 다시 말해 자신의 문제의식 속에서 바라보는 관점을 중요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번 주의 읽기자료를 보았는데요, 소자유의 <노자해>에 이탁오가 쓴 서문입니다. 남쪽과 북쪽 사람들의 주식은 쌀과 기장으로 서로 다르지만 다 배부르게 함이 목적인 것처럼 깨달음에 대한 갈증이 있는 사람은 누구의 道인지 가리지 않고 모두 배운다는 거예요. 배고픈 사람이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는 것처럼 ‘나에게 있어 도道라는 것은 오늘 먹은 밥과 같으니, 공자와 노자를 따질 겨를이’ 없다고 말합니다. 배고픔 달리 말하면 간절함이 공부를 이어가게 하는 힘이란 말로 들렸어요. 이어 맹자의 공부법인 以意逆志(나의 마음으로 작자의 뜻을 맞이한다)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요, 채운샘이 늘 말씀하셨던 자기가 가진 문제의식 속에서 텍스트를 만나라는 말이 맹자부터 이어져 왔었나 봅니다^^
선진편은 25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표 제자 안연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습니다.
안회는 내 말에 대해서 기뻐하지 않는 것이 없어 내가 긴장하지 않으니 나를 돕지 않는다(“回也非助我者也, 於吾言無所不說.”3장)고 말씀하시고, 제자 중에 누가 학문하기를 좋아하냐고 물으니 바로 안회인데 불행히 명이 짧아 죽었고 이제는 그런 사람이 없다(“有顔回者好學,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6장)며 다른 제자들에게 의문의 1패를 남기셨죠. 안회의 죽음과 관련된 7,8,9,10장에서는 안연의 죽음에 대한 공자의 통곡, 자기 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지만 그래도 예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 그걸 몰라주는 제자들과의 의견 불일치 등이 보입니다.
11장은 불가사의한 것들에 관심이 많은 자로가 귀신에 대해 묻습니다.
季路問事鬼神. 子曰, “未能事人, 焉能事鬼?” 曰, “敢問死.” 曰, “未知生, 焉知死?”
삶을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 죽음을 알 수 있겠느냐는 공자의 답에 대해 채운샘은 공자가 죽음에 대해 몰랐다기보다 자로가 물어봤기 때문에 그렇게 답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힘있고 용기있는 다시 말해 상황에 따라 욱하고 정의감이 강해 섣불리 움직일 가능성이 짙은 자로가 이상한 실수를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죠. 자료가 없지만 안회가 물어봤다면 다르게 말씀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자공은 주로 비교하는 질문을 많이 합니다. 15장은 자장과 자하에 대한 비교인데요. 익히 들어본 과유불급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子貢問, “師與商也孰賢?” 子曰, “師也過, 商也不及.” 曰, “然則師愈與?” 子曰, “過猶不及.”
사(자장)는 지나치고 상(자하)은 미치지 못한다는 말씀에 그럼 사가 더 낫다는 거냐고 한 번 더 질문합니다. 그에 대한 공자님의 대답이 지나침(過)은 미치지 못함(不及)과 마찬가지(猶)라는 거죠. 요즘 우리는 과 보다 불급이 낫다는 의미로 많이 쓰는데 원뜻은 똑같이 中이 아니라는 점에서 ‘같다’입니다.
정치적인 맥락과 관련된 얘기에는 자로와 염유가 주로 나옵니다. 16장은 노나라 대부 계씨 집안에서 벼슬을 하며 백성들을 수탈해 그의 재산을 늘려준 염유를 비난하는 장면입니다.
季氏富於周公, 而求也爲之聚斂而附益之. 子曰, “非吾徒也. 小子鳴鼓而攻之, 可也.”
여기서 취렴聚斂은 세금을 걷다라는 뜻인데 싹싹 긁어 모으다란 의미로 수탈의 뜻도 있습니다. 자기에게 배운 자가 취렴이라는 도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자 화가 난 공자는 북을 울려 그를 비난하라고 합니다.
유사한 갈등 장면은 23장, 24장에도 나옵니다. 계자연이 자기 집안에서 일하는 증유와 염구에 대해 대신이라 칭할 만 하냐고 물으니 대신은 도로써 임금을 섬기다 도를 행할 수 없으면 그만두고 물러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구신(구색 맞추는 신하)라고 잘라 말합니다. 그럼 따르기만 하는 자들이냐는 물음에 그래도 아버지(임금)를 시해하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고 엄하게 경고합니다.
季子然問, “仲由冉求可謂大臣與?” 子曰, “吾以子爲異之問, 曾由與求之問. 所謂大臣者, 以道事君, 不可則止. 今由與求也, 可謂具臣矣.” 曰, “然則從之者與?” 子曰, “弑父與君, 亦不從也.”
자신이 가르친 도와 다르게 행하는 제자들의 행태를 책망하지만 마지막 믿음까지는 저버리지 않는, 아끼던 두 제자에 대한 공자의 마음이 보입니다.
24장에서는 계씨 집안의 벼슬을 살던 자로가 공부 잘하고 있던 자고를 비땅의 수령이 되게 추천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공자가 한마디 합니다. 이에 자로의 대답. 백성과 사직이 있으니 이를 다스리는 것도 학문이 아니냐, 어찌 책 읽는 것만이 공부냐는 자로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내 이래서 말잘하는 인간을 싫어하지’ 라고 말씀하십니다.
子路使子羔爲費宰. 子曰, “賊夫人之子.” 子路曰, “有民人焉, 有社禝焉, 何必讀書, 然後爲學?” 子曰, “是故惡夫佞者.”
이런 대목들에서 말년에 아끼는 제자들과 현실적 갈등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로와는 노선이 달랐고 이후 아끼던 제자들이 먼저 죽고 공자님은 홀로 고독하게 죽음을 맞이하죠.
마지막으로 본 21장은 제자들의 성향에 따라 맞춤 교육을 펴시는 공자님을 볼 수 있습니다.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하냐“聞斯行諸?”는 자로의 물음에 부모형제가 있는데 어찌 그럴수 있겠냐“有父兄在, 如之何其聞斯行之?”고 답하시고, 염유의 물음에는 들으면 바로 실천해야 한다‘聞斯行之’.고 하십니다.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공서화의 물음에 염유는 늘 계산하며 머뭇거리고 자로는 이기려는 마음이 강해 바로 행동에 돌입하기 때문“求也退, 故進之, 由也兼人, 故退之.”이라고 답하십니다.
공자와 제자들의 여러 모습을 보여주는 선진편은 흥미진진했습니다. 그들이 삶과 일치하는 공부를 추구했음을 볼 수 있었고요. 후기를 위해 다시 읽으니 그 맛이 더해짐을 새삼 느낍니다. 월요일에 만나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대동소이한 것 같아요. ㅋㅋ 그리고 증점의 말에 대한 공자님의 반응은 편애라고만 생각했는데(증점만 줌인해서 자세하게 묘사한 것도 다소 편파적이라고 생각했어요 ㅋㅋ), 이탁오는 거기서 공자님의 심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느끼고 있더라고요. 그 지점에서 논어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공자님의 파토스가 더욱 절절하게 느껴지는 해석이었어요. 그러고 보니, 굳이 공자님의 훌륭한 가르침만 적은 게 아니라 제자들과의 갈등까지 기술된 것도 이 책의 매력은 파토스를 진하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인 것 같아요. 후기에서도 파토스가 느껴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