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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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한 장 한 장 읽다 보니 어느덧 가을이네요. 총 20편 중 12편을 읽었으니 이제 반이 못 되게 남았습니다. 이번 주는 공자의 애제자 안연의 仁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하는 <안연>편을 함께 읽었습니다. 일상 예법에 대한 구절이 많은 향당편과 제자들 간의 대화가 주를 이루는 선진편을 읽다가 오랜만에 仁과 정치에 대한 말씀이 나오는 안연편을 읽으니 논어가 주는 묵직함이 새삼 다시금 느껴졌습니다.(한동안은 ‘공자님은 음식을 아무 장에나 안 찍어 드신다’는 등의 대목이 기억에 남았던 거 같아요..ㅎㅎ)
지난 주 읽은 선진편에서는 안연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뜨자 밀려오는 슬픔을 어찌할 수 없어 통곡을 하는 공자님의 모습이 그려졌었는데요.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이 하는 생활 속에서도 불평이나 흐트러짐 한번 없이 공부에 진심 전력을 다했던 제자의 단명을 마주하는 스승의 마음이 어땠을지..상상조차 잘 되지 않습니다.
공자님이 무척 아끼셨던 안연의 질문과 그에 대한 공자의 응답은 안연이 나아간 공부만큼이나 수준이 높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문답을 통해 그 경지를 엿볼 수 있지만, 그것을 이해하고 소화해내기는 쉽지 않지요.^^
우리에게 좀 더 친근한 번지의 질문
그래서 채운샘은 우리의 살갗에 좀 더 와 닿을 수 있는 장부터 짚어주셨습니다. 바로 제자 번지가 ‘덕을 높이고 악함을 제거하며 미혹한 일을 변별’하는 것에 대해 묻는 21장입니다.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인 번지는 한번에 세 가지나 묻는 일타삼피의 질문 폭탄을 시전하네요. (樊遲從遊於舞雩之下, 曰 敢問崇德, 修慝, 辨惑) 이에 공자님은 ‘좋은 질문이로다!’라며 세 가지 답을 주십니다. 번지가 구체적으로 물어보았기에 대답 역시 구체적입니다.
첫번째로, 덕을 높이려면 일을 먼저 하고 얻는 것을 뒤로 여겨야 합니다.(先事後得) 이것은 순서를 바꾸는 문제인데, 어떤 일을 할 때 나에게 떨어질 이득 혹은 결과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그 일을 행하는 것을 먼저의 순서로 삼는 것이지요. 두번째로, 악함을 제거하려면 자신의 나쁜 점은 따지고 남의 나쁜 점은 따지지 말아야 합니다.(攻其惡 無攻人之惡) 악함이라고 번역된 慝은 간특하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쉽게 말해 ‘못 됨’을 뜻합니다. 못 된 습성을 고치려면 이렇게 하면 된다는 거죠. 세 번째로, 미혹한 일을 변별하려면 미혹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순간적인 분노를 참지 못하여 자신을 망각하고 그 해로움을 어버이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것이 바로 미혹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도 충분히 찔리는 이야기들인만큼 잘 간직하여 새겨두어야겠습니다.
번지는 22장에서 이번에는 仁에 대하여 묻습니다. 이 대목은 마치 콩트와 같은데, 번지가 공자님의 말씀을 세 번이나 못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결국 지나가던 자하를 붙잡고 그 말씀이 무엇인지 물어보지만 번지가 알아들었는가 아닌가는 나오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ㅎㅎ 번지가 인에 대하여 묻자 공자님은 愛人이라 답하시고, 번지가 다시 知에 대해 묻자 공자님은 知人이라 답하십니다. 번지가 이해 못 하는 기색을 내비치자(樊遲未達) 공자님은 “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바르지 못한 사람 위에 둔다면, 바르지 못한 사람들이 정직하게 될 것이다.”(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라고 한번 더 풀어 말씀하십니다.
공자님의 답을 통해 우리는 두 가지를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질문을 한 번지의 인간상이고, 또 하나는 정치의 핵심입니다. 인에 대한 질문은 많은 제자들이 하지만 그때마다의 공자님 답변은 천차만별입니다. 번지라는 사람에게 있어 인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공자님은 보았습니다. 21장에서 번지가 간특함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질문한 것과도 연결되는 답변이겠지요. 知人은 저에겐 좀 고원한 경지의 일처럼 느껴졌었는데, 채운샘께서 공자님 목소리로 “남들을 좀 알아봐줘 번지야~”라고 번역해주시니 知人하는 것이 한층 친근(?)한 일로 다가왔습니다. 지인은 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정직한 자를 알아보는 것이 곧 남을 알아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바로 유학이 생각한 정치의 핵심이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그를 등용해야 천하를 다스림이 마땅해진다는 거지요.
유학이 그리는 정치 미학적 세계
정치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어서 채운샘이 정치에 관해 가장 중요한 장이라 꼽으셨던 11장을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제나라 경공이 공자께 정치를 묻습니다. 공자 나이 35세 즈음에 이루어진 만남이라 하니 한창 때인 공자로서는 등용에 대한 기대가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배치에서의 대답은 공자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이었습니다. 공자의 대답은 간명합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여기에선 반복되는 앞의 단어는 명사로, 뒤의 단어는 동사로 읽으면 됩니다.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입니다.”
동양철학의 언어는 구구절절 복잡하지 않은 것이 아름다움이자 동시에 어려움으로 다가오는데요. 단 여덟 글자로 유학이 그리는 정치 미학적 세계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잠시 그 세계를 상상해보자면, 우선 유학은 세상을 불평등한 것으로 인식합니다. 높고 낮음이나 귀천, 좋고 나쁨 등의 기준으로 존재를 가르는 것은 아니고, 이름과 자리에 따라 수행해야 할 것이 다르다고 여깁니다. 농부는 농부다워야 하고, 임금은 임금다워야 한다는 것. 농부가 임금보다 비천한 것이 아니라, 농부가 임금다우려고 하는 것이 비천한 것. 농부든 임금이든 자기만의 고유한 역할을 자기 자리에서 수행하는 것으로써 조화를 이루는 세계. 그것이 곧 각각이, 나아가 모두가 잘 살 수 있는 질서의 세계라는 것. 그래서 유학에서는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正名), 명실(名實)이 상부(相符)한 것을 중시여깁니다. 엄마가 친구 같고, 정치인이 기업인 같을 때 각각의 자리에서의 도는 확실히 흐트러지는 것 같습니다.
공자는 제경공에게 이런 정치를 하자고 지도를 펼쳐보였지만, 이어지는 제경공의 답변을 통해 우리는 그의 뜻을 읽을 수 있습니다. 공자를 등용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다는 뜻을요. “참으로 좋은 말이로다. 만일 군주가 군주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며, 아비가 아비 노릇을 못하고, 자식이 자식 노릇을 못한다면, 비록 곡식이 있다고 한들 내가 먹을 수 있겠는가.” 거의 그냥 흘려듣기 수준입니다. 만일 공자의 비전에 감응했다면 더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것을 물었을 테니까요.
유학이 그리는 조화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구절을 하나 더 보자면, 이번엔 노나라 대부인 계강자가 묻는 19장입니다. 공자가 계강자를 얼마나 싫어하고 비판적으로 보았는지가 안연편 17~19장에서 드러납니다. 세 장 모두 형식이 비슷한데, 계강자가 무엇을 물어보면 공자가 한결같이 “네가 이렇게 이렇게 하면 다 해결되는 문제야~~~!”라는 투로 답합니다.ㅋㅋ 근데 그 대답의 수위가 꽤나 높아서 보고 있으면 아슬아슬합니다. 계강자는 분명 막강한 권력자였을텐데 말이죠. (채운샘 말씀처럼 목 안 날아간 게 다행…) 이탁오는 짧고 굵은 평을 달았습니다. ‘도둑을 잘 잡는 노련한 포졸(老捕快).’ ㅋㅋㅋㅋ…
19장에서 계강자는 정치에 대하여 묻습니다. “만약 무도한 놈들을 죽여 백성들을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한다면, 어떻습니까?”(季康子 問政於 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이에 공자가 답합니다. “그대는 정치를 한다면서 어찌 살육을 하려 하십니까. 그대가 선하려 한다면 백성들은 착해질 것입니다. 위정자의 덕은 바람 같고 백성들의 품성은 풀잎 같습니다. 풀 위에 바람이 불어오면, 풀은 반드시 그리로 쏠리기 마련입니다.” 여기에서 유명한 구절이 바로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입니다. 백성을 뜻하는 ‘민초’라는 말이 이 구절에서 파생되었다고 하지요.
바람은 이곳 저곳 드나드는 역할을 합니다. 미세한 틈으로도 드나들 수 있습니다. 주역에서는 이러한 바람의 습성으로 부드러움, 공손함(巽)을 이야기합니다. 무언가 고집하는 힘이 아니라 여기저기를 드나들며 모든 것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힘이라는 것이지요. 공자는 이런 힘이 곧 군자의 덕이라고 말합니다. 풀을 짓누르거나 꺾어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사이를 부드럽게 지나다니는 바람으로서의 덕. 그렇다면 풀은 어떨까요? 우리는 쉽게 풀, 잡초를 하찮고 지위가 낮은 것으로 인식하지만 그 시선을 거두고 풀 자체만 보면 늘 무리지어있다는 속성을 알 수 있습니다. 바람은 그 무리 사이로 스며들어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바람이 불어 풀이 눕는다, 쏠린다는 건 바람에 굴복한다는 뜻보다는 풀이 바람을 받아들인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그걸 사람 사이의 일로 번역해보면 감화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풀이 바람을 받아들이듯 백성들이 군주의 덕을 받아들여 마음으로 응낙하게 되는 것. 감화의 상태는 참 신기한 거 같아요. 마음이 마음에 응해 저절로 변하게 되다니 말이지요. 유학에서는 그런 감화를 조화(和)의 덕이라 보았다고 합니다. 결국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가 나타내는 정치의 세계는 군자가 소인을 무력으로 복종시키는 모습이 아니라, 군자가 소인 사이에 스며들어 마음으로 응하게 하는 모습으로 그려질 수 있습니다.
仁에 대한 중궁의 질문
이번 시간에는 유학의 정치를 다루고 있는 구절들을 주로 살펴보았고, 또 하나의 굵직한 주제인 仁에 대해서는 채운샘이 공유해주신 읽기자료와 함께 다음 시간에 자세히 보기로 했는데요. 마치기 전 중궁의 질문을 통해 살짝 맛보기를 했습니다. 2장에서 중궁이 인에 대해 여쭈자 공자님이 답합니다. “문을 나서면 몸가짐을 큰 손님 맞이하듯이 하며,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도 원망이 없으며,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이번 시간에 배운 것들 속에서 이 구절을 이해해보면 좀 더 뜻이 와 닿는 것 같습니다. 바깥에 나서는 순간부터는 몸가짐을 조심스럽고 공경스럽게 하며, 백성을 부릴 때도 마찬가지로 함부로 하지 말고 큰 제사를 받들듯이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에서 보았듯이 각자의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중요한 신분사회이니 말이지요. 큰 손님 맞이하듯이 하고 큰 제사 받들듯이 할 때의 그 조심하고 공경스럽게 하는 마음은 유학에서 중요한 덕목입니다.
그 다음 구절인 己所不欲 勿施於人은 1장의 克己復禮와 함께 아주 많은 해석이 가해지는 인에 대한 가장 철학적인 멘트(!)라고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않는다.’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없이 어려워지는 구절입니다…ㅎㅎ 제 일상을 돌아보면 제가 하기 싫은 일을 옆 사람에게 시키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데요, (예를 들면 청소..) 그렇게 할 때의 마음 안에 그 사람에 대한 고려는 확실히 없습니다.^^; 단지 이 일을 (나는 하기 싫지만) 해야 한다라는 생각만 있죠. 그 일이 집안 청소일 때는 잔소리 정도로 이어지지만, 똑같은 마음장이 다른 여러가지 일들에서 발현된다면 상대에 대한 고려가 없는 여러 가지 명령과 압박과 갈등으로 드러나겠지요. 그것이 인에서 멀어진 상태라고 한다면 타인의 입장과 처지, 마음 등을 충분히 알려고 하는 것이 인에 가까워지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건 1장의 극기복례와는 또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인에 대해 이렇게 저렇게 상상해보며,, 다음 시간에는 (벌써 내일이네요!) 이번 시간에 받았던 이탁오의 사물설(四勿說)을 읽어오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면 청소.." 가끔 수요일 아침에 "청소하고 갑니다!" 류의 카톡이 오는데, 이런 사연이 있었군요. ㅋㅋ
확실히 한자의 매력 중 하나는 간결하게 뜻을 전달한다는 데 있는 것 같아요. 가끔은 너무 함축적이어서 이게 뭔 소린가 싶을 때도 있지만, 동시에 상대방으로 하여금 말을 더욱 곱씹게 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죠. 그런 점에서 한문은 한문 텍스트를 공부하면 할수록 유리한 것 같습니다. 주역을 공부하기 전에는 '바람'의 역량에 대해 이렇게 고민하진 않았는데, 주역을 통해 공자의 말을 곱씹어 보니, 군자가 단순히 무력을 가진 우월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저도 이게 이렇게 연결되네 하면서 신기했습니다. ㅋ 재밌게 읽고 계시는군요! 다음엔 중국 것도 함께 공부해보심이..!?
중궁이 인에 대해 묻고, 공자님께서 답변하시는 장면은 언제봐도 인상적이네요! “문을 나서면 몸가짐을 큰 손님 맞이하듯이 하며, 백성을 부릴 때는 큰 제사를 받들듯이 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나라에서도 원망이 없으며,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을 것이다.”(出門如見大賓 使民如承大祭. 己所不欲 勿施於人 在邦無怨 在家無怨.) 언제 어디서나 공경하는 마음, 경건한 마음을 잃지 않는 것! 마음이 절로 따뜻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