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에 시작한 논어가 벌써 7부 능선을 눈앞에 두고 입동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계절의 흐름처럼 조금씩이나마 공부가 여물어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아리송합니다. 그래도 한발 한걸음 묵묵하게 걸어가 봅니다. <논어>에서 조금씩 제자들의 개성도 알듯하고, 또 공자님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에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면서도 제자들의 질문에, 군주들의 질문에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답하시는 모습을 보며 혼자 웃음짓곤 합니다. 13강에서는 <안연>편에서 인에 관한 최고 수준의 내용과, <자로>편의 단편들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강의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1. 克己復禮
<안연> 1장은 안연과 공자의 인에 관한 문답입니다. 가장 뛰어난 제자와 스승간의 수준 높은 대화입니다.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아주 많은 함축을 담고 있습니다. 안연이 인에 대해 질문하자 공자님은 克己復禮爲仁이라고 하십니다. 하나하나 풀어볼까요?
克己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극기,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자기를 이긴다는 것이죠. <논어>를 해설한 핑거레트는 극기란 ‘사사로운 자기를 벗어나는 것’이며, 사사로운 자기를 벗어나야 모든 것과 소통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때 克己의 己는 사사로운 자기라고 볼 수 있는데요 고대의 私는 자신의 존재성을 외부와의 관계성 속에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하죠. 그렇다면 핑거레트의 극기란 편협함에서 벗어나는 것, 자신의 존재를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고 이것이 소통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청대 고증학에서 말하는 克이란 개념이 더 깊게 꽂혔는데요. 채운샘은 克이란 ‘하나를 계속 반복해서 능숙하게 되는 것’이라고 고증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극기란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려는 훈련을 끊임없이 반복함으로서 자기 자신을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을 바꾸어 예로 돌아가서(復禮) 사는 것이 인이다(爲仁)라고 하십니다. <논어> 뿐 아니라 <주역>에서도 復, 歸, 反復은 자주 나옵니다. 어디로 돌아간다는 것일까요? <주역>에서는 道로 돌아간다. 본성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채운샘은 반복, 돌아간다는 것은 모두 죽음을 전제하는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으며 이것은 근원, 즉 인간이 만들어지는 생명의 분기점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십니다. 復만 나오면 여전히 이해가 어렵고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다 보니 그저 진리일거냐 라고 머리로만 되뇌고 ‘넘사벽이야’, ‘내 주제에 ~’ 하면서도 또 뒤돌아보며 미련을 버리지 못합니다. 어쨌든 자신을 바꾸어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라는 것이지요.
공자님은 곧 이어 一日克己復禮 天下歸仁 (단 하루라도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면 천하사람들이 모두 인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예로 돌아간다(復禮)와 인으로 돌아간다(歸仁)가 한 문장에 들어가 있습니다. 채운샘은 仁이란 “인간의 저 마음의 밑바닥에는 인간 자신을 초월하는 보편적인 것과의 공감능력”이라고 하셨습니다. 도올샘께서 인을 ‘심미적 감수성’으로 해석했던 기억도 나에요. 핑거레트는 ‘거룩한 예식을 실행하는 데서 발산되는 마술적인 힘’을 인이라고 해석한다고 합니다. 어쨌든 우리 안에 들어있는 아름다운 공감의 힘 같습니다. 저는 인이 예보다 한 차원 높은 개념이라는 느낌이 있었는데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거의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과 예를 질과 문의 관계라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구요. 인을 質로, 예를 文으로 볼 수 있겠다고 했는데 사실 <논어>에서도 좀 헷갈립니다. 文(무늬)과 質(바탕)에 있어서도 둘이 잘 조화를 이루어야(文質彬彬)이라고 하기도 하고 <안연> 8장에는 문과 질이 같다(文猶質)이라고 하고, <팔일>편에서 繪事後素에서는 그래도 질이 우선한 것이라 이해했던 기억도 나서요. 이번 강의에서는 쌤은 인과 예의 관계에서 인은 예로 드러난다고 하셨습니다. 인은 예를 통해서 개념을 드러내고, 예는 그 드러냄으로 인을 말하는 것으로 그런 점에서 인과 예는 상호근본이라고 하셨는데요. 저는 스피노자의 신과 양태의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신처럼 드러나지 않은 것(인)이 양태로 드러난 것(예)으로 비유하면 좀 이해에 다가갈 수 있을까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위에서 인은 자기 자신에게서 말미암는다는 것이지요. 爲仁由己, 而由人乎哉 (인을 행하는 것은 자기로부터 말미암는 것이지 다른 사람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겠는가?) 인을 행하는 근본은 나 안에 있는 것, 내가 하는 것, 나로 말미암는 것이라는 스승의 말씀에 안연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구체적인 방법(目)을 질문합니다. 여기서 유명하다는 四勿이 등장합니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내용을 이해해서라기보다 발음이 쉽고 라임이 딱딱 잘 맞아 좀 익숙해진 어구들입니다. <안연> 1장을 四勿章이라고도 한다는 데 사실 내용을 읽어보면 勿이 중심이 아니라 禮가 중심입니다. 보고, 듣고, 말하고, 행위함에 있어서 예에 적합하게 하라는 것이지요. 일상을 돌아보면 내가 관심이 가는 것,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으로만 사물을 바라보고, 듣고, 나를 유리하게 할 만한 것에 꽂혀서 말하고 행동하는 게 아주 습관적으로 박혀 있습니다. 다른 사람 말을 놓치는 게 다반사입니다. 이것은 사사로움이며 非禮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克己 언저리에도 못갈 것이고 그러면 復禮는 먼나라 얘기일 뿐입니다. 일상의 보고, 듣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서 편협함을 버리려는 노력을 세심하게 하는 克이 곧 四勿을 통한 실천이 될 것입니다. 자신에게 떳떳해 질 때까지 계속 자신의 감각과 행위를 훈련하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안연은 이렇게 구체적인 실천을 알려주시는 스승님께 자신은 민첩하지 못하지만 그 말을 잘 받들겠다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공부한대로 인을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지요.
2. 己所不欲, 勿施於人
<안연> 2장에는 己所不欲, 勿施於人이 나옵니다.(지난주 후기에도 있으니 같이 읽어보심 좋을 것 같아요) 제자 중궁의 인에 대한 질문에 공자님이 답하신 말씀입니다. “네가 원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행하지 말라.” 이를 서양의 황금률과 비교하기도 하는데요, ‘네가 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베풀어라’는 황금률은 <옹야> 28장의 자공과의 대화에서 나오는 ‘인이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남이 먼저 하게 해 주는 것(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과 더 가까워 보입니다. <옹야>에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남도 바랄 것이니 남이 먼저 이루게 해 주라고 하고, <안연>편에서는 자기가 원하지 않는 바는 남도 원하지 않을 터이니 남들에게도 행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바를 먼저 남에게 베풀라’는 것과 ‘내가 원하지 않은 것은 남에게 행하지 말라’는 것. 왠지 전자가 더 능동적으로 보이고 후자는 소극적으로 보입니다. 채운샘은 여기서의 역설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소극적으로 보이는 것이 되레 가장 능동적으로 발휘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간디의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의 예를 들어서 영국의 폭력적 지배에 대항하는 방법은 영국이 행하고 있는 폭력적 방법이 아니라 가장 비폭력적인 불상생, 금식, 단식으로 저항하는 것이 더 능동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의 무장 독립 투쟁을 폄하하는 것은 아닙니다.) 절대적인 옳음이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에서 각각을 발현하는 방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맹자의 權道를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3. 正名
이제 <자로>편입니다. <자로>편에는 정치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해관계가 얽히고 소인들이 통치자가 되어 다스리는 현실적인 조건에서 어떻게 인을 펼쳐야 하며 어떻게 코치해야 하는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듯 합니다. 3장을 먼저 보겠습니다. 자로가 묻습니다. 위나라 군주가 스승님께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당시 위나라의 군주는 아사리 난장판으로 군주가 원칙을 어기며 계승되고 있었습니다.) 공자님은 “必也正名乎!”(당연히 명분을 바로잡는 것이지!)라고 하십니다. 저는 언제나 자로의 솔직하고 거침없는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이에 “有是哉, 子之迂也! 奚其正?”(무슨 답답한 소리를 하십니까?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 어떻게 명분을 바로 잡는 것을 제일 먼저 하신단 말씀입니까?) 제자의 꼴통같은 답답한 응대에 공자님은 상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名不正, 則言不順(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꼬이기 마련이지) 言不順, 則事不成(말이 제대로 안되면 일(행위)은 제대로 하겠어?) 뒤이어 나라 일이 제대로 안되면 예악도 안되고 형벌도 원칙대로 되지 않아 무고한 백성을 막 잡아가게 된다고. 그러면 백성은 수족을 둘 곳이 없어져서 떠돌게 되는 것이지 라면서 군자는 명분이 분명해야 말과 행동이 떳떳하게 되어 구차하지 않을 수 있다고 차근차근 논리적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4. 直이란 무엇인가 : 直在其中矣
섭공이 공자에게 정직에 대해서 자랑삼아 말합니다. 자신의 지역에는 아버지가 양을 훔치자 자식이 솔직하게 그 사실을 증언했다는 것이지요. 이에 공자님은 ‘우리 마을에는 자식은 아버지를 위하여 숨겨주고 아비는 자식을 위하여 그 사실을 숨긴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직이란 “直在其中矣” 그 가운데 있다고 하십니다. 언뜻 읽으면 숨겨주는 것이 더 부모와 자식간의 올바름의 情(도리)로 보여질 수 있는데 직이란 그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아버지의 비행에 대해 섭공이 말하듯 사실대로 증언하는 것과 공자님의 숨겨주는 것 사이의 그 넓은 스펙트럼 가운데인지, 아니면 부모의 비위를 숨겨야 하는 여러 정황들, 상황들 가운데에 직이 있다는 것인지 저도 좀 헷갈리긴 합니다만 하나의 언어, 개념에 기계적으로 갇힐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채운샘은 이 정직에 대해서 공야장 25장의 미생고의 이야기와 비교해서 생각해 보라고 하셨는데요. 미생고는 자신에게 식초를 빌리러 온 사람에게 자신에게 식초가 없어서 그 이웃에서 빌어다 주었다며 이 미생고를 과연 直하다고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식초를 빌어다가 주며 좋은 사람이 되고자(좋은 사람으로 보이고자)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공덕을 가로채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지요. 저도 좀 생각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5. 좋은 사람이고 싶은가?
저도 평소에 욕먹는 걸 싫어하고 좋은 사람이라 불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데요. 그럼 누구에게 좋은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생각해보니 참 막연하게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싶어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에게 칭찬받아야, 누구에게 욕을 먹어야 좋은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통쾌한 말씀이 <자로> 24장에 있습니다. 자공이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사람과 모든 사람에게 욕을 먹는 사람은 어떠냐고 각각의 경우를 질문을 합니다. 공자님은 둘 모두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답하십니다. 그리고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고 착하지 않은 인간들이 미워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누구에게나 칭찬을 받는 사람은 공자님이 그렇게도 싫어하는 향원(鄕原)입니다. 평판에 그다지 신경쓸 일이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좋지 않은 사람에게 욕먹고 있다면 잘 살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이걸로 저를 합리화하는 우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돌아봅니다.
강의를 정리했으나 여전히 인과 예에 대해서는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또 계속 공부를 해야겠지요. 게으름 피우다 늦게야 후기 올립니다.
안연편 첫 3개의 장은 '인'을 묻는 제자들과 각각의 수준에 따라 '인'을 변주해서 설명하시는 공자님의 모습을 볼 수 있죠. 내용도 내용이지만, '인'이란 개념을 제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했을지 고심했을 공자님의 고뇌도 느껴졌습니다. 그런 공자님에게 자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답답한 소리를 하시는군요!"라고 말하니, 공자님 속이 얼마나 뒤집어졌을지. ㅎㅎ (저희도 자주 채운쌤 속을 뒤집으니, 이것은 제자들의 숙명인가요!?)
그리고 '인'은 유학을 공부하는 이상 피할 수 없는 개념이죠. 논어를 여러 번 읽어도 도대체 '인'이 뭔지 감이 잡히질 않을 것 같습니다아... 아마 정랑쌤도 그런 어려움을 겪고 계시는 것 같은데, 일단 스피노자의 신-양태 개념으로 인-예를 파악하는 건 조금 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ㅋㅋ 신과 양태는 잠재와 현실, 전체와 부분의 이야기로 풀 수 있는데, 아무래도 인과 예는 그런 것 같진 않단 말이죠? 아니면 저희가 스피노자와 유학을 같이 공부하면서 본격적으로 토론하면서 궁리해본다거나? 바로 와닿지는 않았지만 매우 흥미로운 접근이네요! '인'을 이해하기 위해 저희도 좀 더 좌충우돌을 해봐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