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 주는 ‘헌문’편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헌문(憲問)의 의미는 공자의 제자 중 '원헌이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헌문’편은 내용이 많아 중요한 구절 위주로 정리해봅니다.
우선 1장을 보면 원헌이 ‘부끄러움(恥, 치)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는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녹봉을 받지만, 나라에 도가 없을 때 녹봉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고 말합니다. 우선 나라에 ‘도’가 있다는 것이 지금에 있어서는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인지 규정되어야겠지만 현재 우리의 정치를 보면 음.. ‘도’가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군요. 채운샘께서는 ‘나라가 도가 있을 때는 정규직으로 월급을 받지만, 도가 없을 때에는 비정규직을 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재미있게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
9장은 글쓰기와 관련된 구절이라 에세이를 쓰는 샘들께 많은 도움이? 될 듯 합니다. 글을 쓰는 순서는 ‘1)초창(草創), 2)토론(討論), 3)수정(수식,修飾), 4)윤색(潤色)’의 단계로 이루어 진다고 합니다. 채운샘께서는 글쓰기 후 수정(퇴고)을 하라고 말하면 항상 우리는 ‘초안(초창, 처음부터 쓰기)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하셔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계속 초안만을 쓰니 대다수는 검토(토론)의 단계에서 지쳐서 주저 앉을 수 밖에 없답니다. 이 단계를 넘어서야 글쓰기의 발전이 있을 것이라 조언해 주셨습니다. 언젠가는 완벽한 글쓰기의 단계를 거쳐 에세이를 완성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글쓰기의 4단계를 머릿속에 담아놓습니다. 과연!
25장도 중요한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대한 구절입니다. 공자께서는 “옛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공부했는데, 지금의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공부한다.”라고 탄식하셨습니다. 자기를 위한 공부는 서양 철학에서는 자기 배려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결국 자기의 질문을 찾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나는 어디에 속박되고 있는가? 나는 왜 편치 않은가? 인생의 문제가 무엇이고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불교에서는 문제의 상황과 원인을 알면 해결 가능하니 고집멸도의 길을 자연스럽게 걷게 됩니다. 그렇게 자신의 문제를 푸는 것이 위기지학, 자기를 위한 공부가 되겠지요. 저는 과연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아니면 삶에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번 들여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36장은 재미있으면서도 알송달송한 구절이었는데요. 누군가 “원망을 덕으로 보답하면 어떻겠습니까?(以德報怨)”란 물음에 공자께서는 “직(直)으로서 원망을 갚아야지(以直報怨)” 라고 대답하십니다. 여기서 ‘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사실 원망을 덕으로 갚는 행위나 마음은 노자나 예수, 부처님과 같은 성인의 경지에서야 가능한 일인데요. 아마 공자님은 이를 알기에 우리 같은 소인에게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고 상대의 감정을 수용하여 도리로서 원망에 대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 나는데 그것을 숨기고 관대한 ‘척’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단 생각이 듭니다. 물론 덕성스러운 태도가 좋고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겉으로는 관대하게 상대의 원망을 포용하면서 덕을 베풀어도 마음 한편에는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더 좋지 못한 것이기에 공자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닌가 합니다. 공자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제자인 안회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자신의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정도는 되어야 공자가 보기에 ‘인’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화를 남에게 옮기지 않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남의 화를 덕으로 갚는다는 것은 대단히 ‘인’한 경지가 아니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겠죠. ‘인’의 경지에 이르기가 쉽지 아니하기에 공자께서는 혹자(이 사람은 웬지 공자에게 원망을 가지고 있었던 듯 싶어요)에게 현실적인 답을 해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공자의 사상이 다시 한번 현실 정치와 생활에서 통용되는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부처님, 예수님 같은 경지를 존경하고 숭앙하며 따라야겠지만 저는 아직 소인이기에 현실적인 공자님의 충고가 더 와닿습니다. ^^
마지막으로 41장은 오늘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습니다. 자로가 새벽에 한 마을에 들어서는데 문지기가 어디서 오는지 묻습니다. 공자의 제자라는 답변에 “아! 안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자!(知基者不可而爲之者)”라고 공자에 대한 논평을 합니다. 문지기는 노장 계열의 사람으로서 정치 바깥의 사람들입니다. 이 노장 계열의 특징은 안되는 일은 미련 없이 훌훌 털고 일어나는 기질이라고나 할까요? 연이은 42장에 나오듯이 ‘물이 깊으면 옷 입은 채로, 물이 얕으면 바지를 걷고 건넌다’는 스타일의 사람들이지요. 주로 산수화에 많이 그려지는 케릭터(어부, 문지기 등)들인데 저 역시 이런 노장 계열의 말과 삶에 끌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지기는 ‘안될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지만 그 뉘앙스가 공자를 비판한다기보다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공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정치를 추구한 사상가이지 결코 이상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정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안될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었기에 문지기도 찬사를 보내는 것이겠지요. 진정한 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공자를 보며 ‘우리는 왜 이토록 비겁한가?’ ‘우리는 왜 이렇게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시며 공자의 위대한 점은 여기에 있고, 우리가 따르기 어려운 성인의 경지는 이와 같은 부분일 거라 말씀해 주셨답니다. 저 역시 많이 공감이 되었고 어려워 보이는 일에도 결과를 너무 생각하지 않고 용기를 내어보아야겠다는 각오를 다져봅니다. 다만 이 구절을 읽은 장대 선생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하셨으니 주의를 해야겠지요.
“ 안되는 줄 모르고서 하는 이는 ‘바보’이고, 안 되는 줄 알고서 하지 않는 이는 ‘현인’이며, 안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이는 ‘성인’이다.”
일단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공부를 더 해야겠습니다! ^^
확실히, 이번 헌문편도 감동적인 구절이 많이 보였던 것 같습니다! ’부끄러움’(恥)이라는 인간의 내적 역량을 강조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 = 자기를 위한 공부를 이야기하는 부분이 저도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 같네요. 동양의 위기지학과 서양의 자기배려는 결국 삶의 고통(문제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의 공부를 말하는데, 어떻게 우리가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이 듭니다!
원망을 '덕'으로 갚는다는 말은 '좋은 말'처럼 들리지만, 어쩌면 현실적이진 않을 수 있죠. 중요한 건 잉여를 남기지 않고 마음을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직'을 얘기한 건가 싶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우리 같은 범인들을 위해 '직'으로 원망을 갚으라는 말이 참 따뜻하게(?) 들렸어요. ㅋㅋ 그리고 공자를 아는 것은 공자와 '도'가 다른 사람들이라는 것도 엄청 인상적이었습니다. 공자는 무언가를 함께 도모하기 위해 자신을 알아봐줄 군주를 찾아 돌아다녔는데, 그를 안 것은 군주들도, 함께 돌아다닌 제자들도 아닌 '도'가 다른 사람들이었다는 게 참... 여러모로 가슴이 아리더군요. 그런데 나중에 또 공자는 "이들이 아니면 누구와 함께하겠느냐!"라고 말하긴 했지만요. ㅋ 참 재밌는 편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