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가 처서였어요. 그래서 그런지 오늘 아침 공기의 기운이 사뭇 다르네요. 서늘해서 기분이 좋아요. 처서를 찾아보니 한자가 ‘處暑’네요. ‘暑’ 자는 ‘더위 暑’겠거니 했었는데 ‘處’는 좀 생소합니다. ‘處’를 ‘곳 處’ 정도로만 알고 있었는데 ‘멈추다’라는 뜻이 있네요. @@ ‘處暑’에서는 이 뜻으로 쓰인 듯합니다. 네이버 한자 사전에서 25번째로 나오니 흔하게 쓰이는 뜻은 아니겠죠. 논어 공부하면서 익숙한 단어라도 가능하면 한문을 한번 찾아보려고 합니다.
한문 문형 꼼꼼하게 정리해 설명해 주시는 빈샘과 규창샘에게 항상 감사합니다. 1시간 정도 한문 문형 공부로 몸을 푼 다음에 채운 샘 강의를 들으니, 뭔가 예습에 철저한 모범생이 된 느낌입니다. 예습 때문에 본 강의를 좀 더 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아요. 물론 진짜 모범생은 복습도 게을리하지 않겠죠.
이번 편은 里仁篇입니다. 채운 샘의 강의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써보겠습니다.
26장)子游曰, “事君數, 斯辱矣, 朋友數, 斯疏矣
임금을 섬길 때 간언을 ‘자주 하면’ 욕을 당한다는 말인데요. 간언에도 기술이 있다는 거죠. 진짜 마음먹고 자기 자리 걸고 간언해야 한다는 겁니다. 친구 간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어요. 안 볼 각오하고 충고든 뭐든 해야지 안그러면 관계가 소원해 집니다. ‘자주 삭’자로 쓰인 ‘數’에 방점을 찍으면 좋겠네요. 말을 자주 하게 되면, 말이 가벼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묵직하게 자기 존재 걸고 임금에게 간언하고, 친구에겐 충고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욕을 당하거나 친구를 잃게 되겠죠. 그렇게 진심으로 신중하게 말을 했는데 내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래서 내가 임금을 떠나야 하는 상황이 되거나 친구를 잃게 된다면, 그것 또한 어쩔 수 없는 겁니다.
전 이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진짜 꼭 해주고 싶은 말을 숨기는 경우가 더러 있거든요. 그리고 뭐랄까 에둘러 말한다고 해야 할까..그런 화법을 써서 우회적으로 상대방을 비난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면 참 찜찜하죠.
18장)子曰, “事父母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26장에서 임금과 친구는 뜻으로 만난 사이기 때문에 뜻이 통하지 않으면 끊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모는 그럴 수 없습니다. 하늘이 맺어 준 부모자식의 관계는 끊을 수 없다’가 유학의 기본 태도죠. 물론 부모님에게도 간언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넌지시, 에둘러, 간곡하게” 이게 기술입니다. “幾諫”하라는 거죠. 공경의 마음을 가지고 완곡하게 간언해야 합니다. 그 일이 참으로 피곤하고 수고로운 일이지만, 원망하지 말아야 해요. 부모님께는 그래야 합니다. 관계를 맺는 것의 도가 부모와 임금과 친구는 다 다릅니다.
관계가 끊겨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부모님께 얼마나 자주 거친 말들을 퍼부었던지요. 생각해 보니 부모님이 저를 참 많이 참아주셨던 것 같습니다.
24장)子曰, “君子欲訥於言而敏於行.”
‘訥於言’은 직역하면 말을 어눌하게 한다는 말인데요. ‘어눌하게’는 ‘신중하게’라는 말과 같습니다. ‘敏於行’은 행동을 민첩하게 하란 말입니다. 學而편 14장에 비슷한 표현이 있어요(敏於事而慎於言). 우리가 자주 그러듯, 뇌와 가슴을 거치지 않고 혀에서 바로 나온 말을 우수수 쏟아내면, 우린 그걸 행동으로 감당할 수 없어요. 일단 신중하게 한 말이 뱉어지면, 행동은 바로 그 뒤를 따라야죠. 저도 가끔 말은 번지르르하게 뱉어 놓고 계산하고, 걱정하느라 행동에 있어선 머뭇거립니다. 그건 반드시 잉여가 되고 업이 쌓입니다. 혀끝에서 말이 간질거릴 때 “진짜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를 먼저 되뇐 다음, 아니다 싶으면 말을 뇌와 가슴으로 다시 돌려보내야겠습니다.
23장)子曰, “以約失之者鮮矣.”
채운 샘은 위 문장에서 “約” 자가 정말 중요하다고 하셨어요. 논어에 자주 나오는 말이고 문장마다 다른 뜻으로 쓰인다고 해요. 여기에서는 “묶다, 요약하다, 단속하다”의 뜻입니다. “묶는다”라는 것은 마음을 방만하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을 유학에서는 “約” 이라고 합니다. 사실 수련의 의미로 공부하고 책을 읽는다고 했을 때,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하지 않으면, 마음이 엉망이 됩니다. 마음은 항상 어딘가로 튈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세한 틈을 마음은 놓치지 않죠. 저는 이런 패턴을 너무 잘 알고 있어요. 어려운 책을 읽거나 했을 때, 나에 대한 보상으로 아주 가벼운 유튜브를 보고 싶은 생각이 밀려옵니다. 써놓고 나니 정말 어처구니 없는 생각이네요. 누구를 위해 공부하는 것이 아닌데 왜 나에게 보상을 해줘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마음 단디 붙잡고 살아야겠어요. “이렇게까지 해야 돼?” 라는 싶은 생각이 밀려오면 “응. 그렇게까지 해야 돼!” 라고 매섭게 혼내고요. 채운 샘께서는 스피노자의 말도 이 구절과 관련해서 인용해 주셨어요. “우리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도 저것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16장)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군자는 “義”에서 깨우치고 소인은 “利”에서 깨우친다는 말인데요.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보면, 내 욕망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말해서 어떤 삶을 보고 “멋있다. 저렇게 나도 살아보고 싶다” 라는 마음의 향방을 좇아 가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 알 수 있습니다. 채운 샘은 다음과 같은 예를 들어주셨어요. 하루에 1억을 버는, 그러나 운동선수로서의 수명은 그리 길지 않은 축구선수 음바페의 삶보다는, 돈은 좀 없어도 죽을 때까지 공부라는 일을 할 수 있는 삶이 채운 샘에겐 멋지게 느껴지셨다고. 게다가 공부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깊이를 더해가니, 젊음을 부러워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거죠. 공부를 너무 늦게 시작한 저에게 힘이 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개그맨 박명수 어록 중 하나가 생각났어요. “늦었다고 생각할 때는 진짜 너무 늦었다…” ”…” 에는 “그러니 빨리 시작해. 시간이 없다고!!”라는 말이 숨어있겠죠.
15장)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問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논어에 仁이 나오는 문장이 59개라고 합니다. 앞으로도 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공자님의 말씀이 계속 나올 텐데요. 15장에서는 인을 “忠恕”라고 하십니다. “忠”은 자기 마음의 중심입니다. 외적인 것에 따라서 흔들리지 않고 진실하다는 거죠. 임금에게 “忠” 하겠다는 것도 자기 마음의 중심을 잡고 임금을 따르는 겁니다. 자기의 떳떳함이 동반된 “忠”이죠. “恕”는 내 마음과 다른 사람의 마음이 똑같이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즉 “忠恕”란 내 마음의 진실함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10장)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군자는 반드시 해야 하고(無適),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는(無莫) 것이 없습니다. 군자는 비전이 같다면 타협할 여지가 있다는 말이죠. 생각이 유연하죠. 군자에게는 절대적 원칙보다는 사람과 함께 살며 복락을 누리고자 하는 비전이 더 중요합니다. ‘無適無莫’의 자세로 나이들어 가면 좋겠어요.
8장)子曰, “朝聞道, 夕死可矣.”
채운 샘은 각 편마다 자신에게 딱 와닿는 문장을 선택해서 외워보는 게 좋다고 하셨는데요. 이번 편에서 채운 샘의 선택(일명 채운스 초이스)은 8장의 “朝聞道, 夕死可矣.”입니다. 道에 대한 절실함을 말하고 있어요. 바로 이탁오의 삶이 그런 도에 대한 절실함에 따라 산 삶의 교본이라 할 수 있어요. 그의 죽음도 또한 조금의 여한이 없기 때문에 담담할 수 있었어요. 언제 죽어도 잉여가 없는 삶이죠. 삶 자체가 잉여가 없으니 죽음 또한 그런 거겠죠.
8장의 “朝聞道, 夕死可矣.”와 관련해서 이탁오의 텍스트를 살펴보겠습니다.
이탁오는 공부하는 자는 의심할 줄 모르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의심의 혼란에 기꺼이 빠지라고 합니다. 공부하는 것에서 삶의 문제를 제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문제 속에서 기꺼이 헤매라고 해요. 끊임없이 의심하는 과정 속에서 어느 순간 깨우침이 찾아온다는 거죠. 그 깨우침은 道를 말하는 것이겠죠. 이탁오는 유불도(儒佛道)에서 방법은 조금씩 달랐지만, 도를 깨침으로써 세속을 벗어나려는 그들의 바람만큼은 똑같은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뭐가 되었건 세속의 부귀는 도를 절실히 찾아 헤메는 사람에겐 고통입니다. 계속 벗어나려는 시도를 해야 했죠. 그러면서 이탁오는 제자들에게 일침을 가해요. 겉으로는 道를 공부한다면서 속으로는 세속의 부귀를 열망한다고요. 앞뒤가 맞지 않는거죠. 저도 매우 뜨금합니다. 간절히 이상 하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 행동은 절실함이 전혀 없죠. 반성을 습관처럼 하고 다시 또 시작하고, 오히려 이런 패턴이 안락함을 주는 이상한 상태를 저는 잘 알아요. (또 반성을 하고 있네요.하하)
비가 거침없이 옵니다.
한편으로는 義에 따라 맺고 끊는 군신, 붕우 관계를 얘기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끊을 수 없는 부모와의 관계를 얘기하고. 지금 시대에 그대로 쓸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지만, 저는 모든 관계를 동질적으로 보지 않는 이들의 사유가 인상적이었어요. 저에게 어떤 사건을 겪어도 포기할 수 없는 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직 부모님이 매해 나이가 드시는 것에 대해서도 공자님처럼 큰 감흥이 있지도 않고요. 아마도 '죽음'을 비롯해 사건이든 관계든 절실하게 생각하게 되는 게 없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공자님은 '부모님'과 '도'를 붙잡고 사셨던 것 같은데, 이탁오 선생님의 따끔한 일침을 떠올리면, '도'를 탐구하는 자세가 안 된 거죠. ㅋㅋㅋ;; 아, 그동안 이런 구절들을 읽을 때마다 너무 빡세게 공부하는 것 아니냐, 초심자로서 어떻게 이런 마음을 내면서 공부할 수 있냐 등 안주할 만한 거리를 만들었는데요. 많이 혼났습니다. 정도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태도의 문제라는 걸 다시 되새기며 이번 논어를 읽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