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의 길을 더 확장해서 천지자연과 합일을 이룰 때까지>
규문 홈페이지에 후기를 올리는 건 처음이라 일단 간단히 인사라도 드려야겠네요.
저는 시골에서 농사를 기반으로 살림하고 사는 청라라고 합니다. 3년 전부터 겨울 농한기에 <중용> 필사를 하고 있는데요,
그걸 하면서부터 제 스스로가 많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습니다.
땅에 착 달라붙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불안감이나 두려움이 많이 사라지고 두 다리에 단단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아요.
예전에는 감내하고 무릅쓰고 쉼 없이 이어가야만 하는 일에 대한 저항감이 컸는데 이제는 기꺼이 납작 엎드려지고요.
(후기 쓰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도 그런 마음…^^)
이게 뭘까, 대체 어떤 힘이 작동하는 것일까 궁금해서, ‘철학하는 일요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6주차 수업에서는 마침 <중용> 이야기를 해주신다고 해서 무척 반가웠는데요, 본격적으로 <중용>들어가기 전에 사서인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이 어째서 사서가 되었을까부터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북송 때 주희가 유학 공부의 체계적인 기틀 같은 것을 마련하기 위해 세트로 엮어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논어>, <대학>, <중용>은 공자학파의 유산이라지만 거기에 <맹자>는 왜 끼워 넣는 것인가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도 많았는데, 주희는 그렇게 함으로써 공자-맹자-정명도, 정이천 선생에서 자신까지 이어지는 도의 계통에 정당성을 부여했던 것이라고 하네요. 채운 선생님께서는 주희 선생의 이러한 일련의 작업을 서양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나란히 읽어주시기도 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 또한 고전의 파편을 종합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했다고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주희가 지금에 와서는 유학계의 주류, 꼰대 선생과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에는 비주류 지식인으로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거의 감금되다시피 한 고립된 상황에서 공부에 몰두했던 거라고요. 그때나 지금이나 모든 철학은 불온함을 깔고 있기에 권력의 견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합니다. 그러한 운명임에도 공부에 목숨을 건 사람처럼 평생 공부벌레처럼 살았던 주희 선생님도 참 대단한 분 같아요.
주희 선생님은 사서를 읽을 때도 순서를 정해두셨습니다. <대학>, <논어>, <맹자>, <중용> 순으로 읽어야 한다고 해요. <대학>이 일종의 거푸집, 긴 여행의 가이드라인 같은 역할을 하기에 가장 먼저 읽고, 형이상학적인 논의의 집대성이라고 볼 수 있는 <중용>은 가장 마지막에 읽는 방식인 것이죠. 또한 주희 선생님은 깨알 공부팁으로 자세히 모르더라도 쭉 넘어가 대강의 흐름부터 파악하라고 강조하셨다고 합니다. 지도를 볼 때처럼 전체를 보는 눈이 중요하다고요.
그렇다면 <대학>을 통해 들어서게 되는 대인의 공부는 어떤 지향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1장에 일목요연하게 핵심이 드러나 있습니다.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3강령)
공부를 통해 ‘明德’이라고 하는 잠재화된 선천의 역량을 드러내어 밝히고, ‘親民’으로 앎을 실천하고, ‘止於至善’, 변치 않는 지극한 좋음의 상태에 머무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8조목이 등장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격물 : 세상사를 배운다. (고전을 읽고 이해하는 방식)
치지 : 앎을 확장한다.
성의 : 뜻(마음의 지향점)을 성실하게 가져간다.
정심 : 그러는 과정 속에서 마음의 작용이 바르게 된다.
수신 : 격물에서 정심까지가 수신이다.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로 헬레니즘 철학 용어로 ‘자기배려’를 의미한다.)
제가, 치국, 평천하 : 이 세 가지는 같은 맥락이다. 자기가 자기 자리를 가지런히 한다는 것, 각자가 자기 자신을 잘 살고, 그렇게 잘 사는 이들이 조화롭게 공동체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대학>에서의 대인이란 그러한 8조목을 체화한 사람일 것이고, 왕양명은 그의 제자의 글 속에서 대인을 ‘천지만물을 하나의 몸이라 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저는 그 대목에서 <중용>이 떠올랐는데요, 때마침 채운 선생님께서 <중용>이 서양으로 치면 일종의 자연학적인 사고를 담고 있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자연을 대상으로 보는 탐구가 아니라 자연을 통해 만물의 존재 이치를 탐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윤리를 도출해 내는 것이 자연학이고, <중용>, 그리고 <계사전>이나 노장 철학에서 자연학의 입장과 비슷한 결을 읽어낼 수가 있다고요.
<중용>은 대인의 길을 더 확장해서 천지자연의 길과 합치되는 경지까지 나아갔다고 합니다. 핵심개념인 ‘성誠’에 대해서도 잠깐 말씀을 해주셨는데, 그것은 성실함이자 진실함이고 끊기지 않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산수화에 드러나는 길의 이미지로도 길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이야기를 해주셔서 성誠과 도道의 속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성誠을 돌파하면 <중용>의 다른 개념들도 다 뚫린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뚫려 나갈지… 다음 시간의 이야기가 기다려집니다.
덧.
후기를 쓰다 보니 제가 수업 내용을 곡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네요.
오류가 있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귀뜸해 주세요!
확실히 하나의 텍스트를 시대적으로 읽을 필요가 있겠더라고요. 막연히 주희의 텍스트를 '체계 정리에 집착한 결과'라고 가벼이 본 감이 없지 않은데, 사실 '사서'는 주희 개인의 저작이라기보다 그동안 주희가 배워온 모든 것과 당대에 있었던 수많은 논의들을 총 망라한 것이었죠. 이 얘기를 듣고 나니, 갑자기 주희의 모든 주석이 감동스럽더라고요. 어쩌면 주희에게 '격물치지', 텍스트 읽기는 단순히 암기라기보다 그 텍스트에 통달하는 것, 나아가 주희 자신이 했던 것처럼 배워온 모든 것을 가지고 텍스트와 대면하는 일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3년 전부터 중용과 만나고 계셨던 청라쌤의 중용이 더욱 기대되네요. 실제로 삶에 영향을 미칠 만큼 중용을 읽으셨다니, 어떤 중용을 만나셨을까요? 내년에 사서 공부할 때가 기대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