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간은 총 28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6. 雍也(옹야)편이었습니다.
공자님의 최애 제자인 안회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2장에서 애공이 공자님께 제자 중에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누구냐고 물어봅니다. (弟子熟爲好學) 공자님은 이에 대한 답으로 안회를 언급합니다.(有顔回者好學) 그리고 난 뒤 불천노(不遷怒) ,불이과(不貳過)라고 합니다. 이는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한 공자님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는 한편 안회의 품성에 대한 공자님의 평이기도 하고 , 너무나 사랑한 제자가 어린 나이에 자신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것에 (不幸短命死矣) 대한 아쉬움의 표현이기도 할 것입니다. 여기서 채운 샘께서는 불천노에 대해 두 가지로 해석해 주셨습니다. 하나는 노여움을 타인에게 옮기지 않는 것(예를 들면 부장에게 혼난 과장이 대리에게 그 화를 옮기지 않는것) 과 또 하나는 노여움을 마음속에서 옮기지 않는다 라고 하셨습니다. 화가 나는 일을 곱씹고, 이불 킥하고, 소심한 복수를 상상하며 잠시나마 어설픈 쾌감을 느끼기도 하고, 온갖 망상을 하면서 스스로를 괴롭히는데 과연 마음속에서 이리저리 화를 옮기지 않는 것은 어떤 걸까요? 더불어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는 자라니... 많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잘못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같은 잘못을 두 번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잘못을 저질렀을 때 그것이 잘못인지 깨닫는 것일테고 그로인해 자신의 잘못을 고쳤음을 의미합니다. 엄청난 경지를 말하고 있는 공자님과 이를 실천한 안회!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5장에서 안회는 그 마음이 석 달 동안 인을 어김이 없었지만(其心三月不違人), 그 나머지는 하루나 한 달에 한 번 인에 이를 뿐이다.(其餘則日月至焉而已矣) 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장에서는 공자님 께서 안회와 나머지 사람들을 분별심을 가지고 대비시켰다고 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자님께서 아무리 안회를 어여삐 여겼다 한들 그리 하지는 않을셨을거라 믿고 싶네요. 여기서는 三月의 기간을 딱 3개월이라는 기간이라고 산정하기보다는 100일 수행처럼 어떤 규칙을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만들 수 있는 기간을 말합니다. 사소한 습관이던 일상에서 어떤 것을 몸에 붙여 의식하지 않아도 행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무언가를 하다 말다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한결같이 하고 있는 안회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공자님의 눈에서 하트가 뿅뿅하는 모습도 그려지구요. 그렇게 아끼던 제자를 먼저 보냈을 때 슬픔이란 상상할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능동적인 삶이라는 주제로 10장과 17장 두 개의 문장을 채운샘께서 뽑아주셨습니다.
10장은 염구와 공자님의 대화입니다. 염구가 공부하는데 힘에 부쳐있던 상황이었나 봅니다. 저는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역량이 부족합니다.(非不說子之道 力不足也).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힘이 부족한 자는 중도에 그만 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너는 미리 한계를 긋는구나(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畫)라고 하셨습니다.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셨는지 타이르듯 말씀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염구가 공자님의 깊은 뜻을 알아 들었을까요? 역량이라는 것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는 와중에 드러나는 것이고 어찌 드러날지는 아무도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에서 어떤 일을 할 때 미리 결과를 재단하기도 합니다. 하기도 전에 미리 획을 긋고 정당화하는 일도 다반사입니다. 역량이라는 것은 무언가를 시도하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고 시도를 했으면 중간에 멈추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멈춘다는 것은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시도함으로써 그 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멈추면서 다른 길을 만들기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시도 하지 않는 것과도 차이가 있고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좀 더 신중히 따져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은 17장 입니다.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길 인간의 타고난 본성은 곧음이니 곧음이 없는데도 생존하는 사람은 요행이 죽음을 면하고 있는 것이다. (人之生也直 罔之生也幸而免) 直에는 가치 평가의 기준이 타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 있는 것입니다. 샘께서는 떳떳함이라고 풀어주셨습니다. 가치란 사회가 요구하는 혹은 통용되는 기준과 타인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수정해나가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런 삶을 살아가면서 그 기준을 자신에게 구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가치들이 오고 가고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에서 흔들리면서 휩쓸리면서 자신만의 가치들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란 과연 어떤 걸까요? 공자님은 직 없이 사는 사람을 요행이도 죽음을 면했다고 하셨는데 이탁오는 곧음이 없는 자 (不直的) 모두 죽은 사람이로다 (都是死人) 라고 좀 더 급진적으로 나갔습니다. 살아도 죽어있는 삶을 살지 말고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왕 사는 거 살아있는 삶을 살아라 라는 격려의 메세지 라고나 할까요.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획을 긋지 않는 삶! 무언가를 함에 있어 외부에 휩쓸리면서도 중심을 잡고 떳떳할 수 있는 삶! 쉽지 않은 길임은 분명하지만 능동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는 멋진 구절입니다.
마지막으로 28장 입니다. 이번 장은 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영민한 제자이자 공자 학단의 자금 담당이고 6장에서 사리에 통달했다는 평을 공자님께 받고 있는 자공이 질문을 합니다. (지난주 공야장편 8장에서는 공자님의 안회와 너 둘 중 누가 나으냐는 짓궂은(?) 질문에 안회는 하나를 들으면 10개를 알고 자신은 하나를 들으면 둘을 안다고 하며 인정 욕망을 뿜뿜 했었지요 ㅋㅋ) 자공이 묻기를 만일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면 어떻습니까? 인하다고 할 만합니까?(如有博施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이에 공자께서 어찌 인에만 그치겠느냐, 반드시 성인일 것이다. (何事於仁, 必有聖乎) 요임금과 순임금도 이는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堯舜其猶病諸) 백성에게 은혜를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博施濟衆)는 건 오늘날의 복지를 뜻하기도 합니다. 복지를 오늘날 정치적 차원에서도 적용 될 수 있고, 자신이 속해 있는 공동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공자님은 좀 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하십니다. 인자는 자신이 서고자 하면 남도 서게 해주며, 자신이 이르(루)고자 하면 남도 이르(루)게 해준다.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때문에 가까운 자기 몸에서 미루어나가 타인의 사정까지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인을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만하다.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남도 하고 싶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 나에게도 좋고 남에게도 좋을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일 텐데요. 이것을 실천할 수 있으려면 어찌해야 하는 걸까요? 함께 무언가를 해보자고 시작한 공동의 모임에서도 서로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연결이 되어 누군가는 소외될 수도 있는 일이 다반사 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학이편 마지막 장(16장)에 나오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 것을 근심하지 말고(不患人之不己知 ) 내가 남을 알지 못할까 걱정해야 한다(患不之人也)는 구절이 아닐까 싶은데요. 내가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동조해 주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친하다고 여겼던 사람이 그러면 마음은 더 상할테구요. 안친한 사람이 그러면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마음이 들때 내가 무엇 때문에 서운한지 살펴볼 필요도 있고,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볼 필요도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서운한 마음이 든다 해도 스스로 떳떳할 수 있는 마음도 낼 수 있어야 하겠지요. 누군가의 동조 없이도 떳떳하게 할 수 있는 마음! 그러면 떳떳할 수 있는 마음은 어찌 낼 수 있는 것이냐? 그것은 17장에서 공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타고난 본성이니 각 개인에게 내재해 있습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과 마주하며 인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 시켜 갈 수 있을지는 논어를 공부하는 동안 화두로 마음 한 켠에 담아 두어야겠습니다.
저도 10장 염구와 공자의 대화가 흥미로웠습니다! 역량이 부족하다며, 미리 한계를 그으려고 하는 염구의 마음이 공감됐습니다. 저희는 습관적으로 힘을 쓰는 정도, 방식을 나의 역량으로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의 역량은 이미 정해져 있다고 여기고, 그것을 넘어가는 것에 대해서는 미리 불가능하다며 획을 긋는 것 같습니다. 역량의 한계를 두지 않기 위해서! 역량은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지 않다는 말과 역량은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 위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라는 말을 찬찬히 생각해봐야겠습니다^^!
확실히 仁은 감수성 혹은 인격적인 것과 연관되는 개념인 것 같아요. 실천 양식이 정해져 있다기보다 기본적으로 타자에게 미치니까요. 이런 경지에 어떻게 오르나 막막하다가도, 안회도 3개월(습이 형성되는 기간) 동안 떠나지 않았고, 다른 제자들도 가끔씩이나마 실천했으니, 뭔가 길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당장 지속하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인에 도달하는 횟수가 잦아지거나 지속하는 시간이 조금씩 늘어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희망적이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ㅋ 확실히 논어를 읽으면 '인'이 화두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