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과 그를 따르는 여러 제자들 그리고 주변 사람들과의 문답으로 이루어진 논어는 원문을 따라 읽으면 생생한 입말이 살아있어 읽는 재미가 있는데요. 모든 고전들이 그렇겠지만 오랜 시간 동안에 걸쳐서 읽혀온 이런 텍스트들은 한 번 읽어선 그 맛을 다 헤아릴 수 없고 천천히 음미하고 몸과 마음에 붙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과 공을 들이는 과정들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삼 년 전엔가 《논어》를 8주 속성 완성반으로 처음 접했는데요. 그때는 모르는 낯선 한자에 끝없이 나오는 제자들 이름들, 심지어 한 사람에게도 ‘자로, 계로, 유’ 식으로 불리는 이름이 몇 개나 있고, 내용도 들을 땐 뭔가 좋고 재밌긴 한데 돌아서면 싹~잊어버리길 반복하다 어리둥절 전체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것으로 끝냈었습니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 가득한 차에 이번에 논어를 하루에 한 편씩 20주 완성으로 문형 정리까지 하면서 천천히 읽어가니 이제 한자 구절도 조금 들어오고 맥락도 들어오고 여유가 생깁니다. 여전히 모르는 것이 많지만 이 좋은 걸 이제라도 맛보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소중하게 매주 읽고 있습니다.
이번 편은 논어 20편 중 7번째 <술이>편 인데요.
술이편은 크게 배움에 대한 자세에 관한 편과 공자님의 삶의 양식이나 면모를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고 합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번 편은 그 유명한 술이부작(述而不作) ‘옛 것을 기술하되 창작하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편입니다.
나온 김에 1장을 보고 가죠.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나는 옛것을 기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는 않았으니, 옛것을 믿고 좋아함을 내 가만히 우리 노팽(老彭:옛날 일을 즐겨 이야기했다는 은나라 대부)에게 견주어보노라.”
슬쩍 읽으면 술이부작, 즉 옛것을 기술하고 창작하지 않는다. 를 과거의 전통을 고수하고 지키고 현재의 변화를 배척하는 꼰대 할아버지 이야기로 들리기 쉬운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에 대한 공자님의 태도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옛 것을 기술한다’는 것은 옛날 것을 그대로 보존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대신 인간이 알아내는 앎이든 지식이든 이 모든 것은 모두 우주의 운동 원리에 따라 그것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한 그 운행원리를 벗어나서 생겨날 수 없다는 이해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즉, 인간의 삶과 앎은 우주의 운행원리에 의탁해 그에 따라 구성해갈 뿐이지, 이런 이치를 넘어서 인간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창작하고 만들어낼 것은 없다는 천지우주에 대한 리스펙, 그리고 이런 이치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는 자의 겸허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이 발전시킨 과학기술이나 문명들을 보면서 인간이 뭔가 대단하고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나 혹은 미개 원시의 상태에서 새롭게 뭔가를 만들고, 좀 더 좋은 방향으로 계속 간다거나 전진이나 진보, 발전하는 쪽으로 나아갔다는 자부심 혹은 자만심을 가지고 있는데요. 실은 예측 못한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나약한지 요즘 잘 볼 수 있죠. 그런 의미에서 술이부작은 요즘 인간의 진보나 발전에 대한 믿음과는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쓰인 것이 2편 <위정> 11장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 ‘옛것을 익히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것을 알아낸다.’입니다. 지금 현재 우리가 놓인 현재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제대로 알려고 해도 맨 땅에 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이것이 어떤 맥락과 역사적 과정 속에서 된 것인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지요. 그것이 ‘옛것을 익힌다(溫故)’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데요. 한자 ‘溫에서 볼 수 있듯 옛날의 차가운 팩트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냉철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것들을 그냥 가져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반드시 이들을 따뜻하게 뎁혀서 현실의 상황에 맞게 변주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온고지신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술이부작이든 온고지신이든 이런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면 언제나 겸손하고 배움에 대한 자세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데요. 공자님이 좋아하시는 배움을 향한 끊임없는 여정, 好學의 태도와 자연스레 연결이 됩니다. <술이>편에도 이런 호학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는 구절들이 대거 나왔습니다. 그 중 몇 개 구절들입니다.
2장 “말없이 마음에 기록해두며, 배우기를 싫증 내지 않으며,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 나에게 있겠는가.”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3장 “덕을 닦지 않음과 학문을 강론하지 않음과 의(義)를 듣고도 그쪽으로 옮겨가지 못함과 불선을 고치지 못함이 바로 나의 근심거리이다.”(子曰 德之不修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
6장 “도에 뜻을 두며, 덕에 근거하며, 인에 의지하며, 예에 노닐어야 한다.”(子曰 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
채운샘께서는 공부를 할 때 경계해야 할 것으로 공부를 진통제 복용하듯 하지 말라고 당부하시는데요. 좀 힘든 게 있어서 공부하러 왔는데 공부하다 보니 왠지 뭔가 문제가 좀 진정되고 해결된 것처럼 보이면 바로 공부하는 것에 싫증이 나서 왜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지란 마음이 들다 다시 힘들면 공부하는 태도는 공부가 진정으로 삶에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독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배움에 이끌리는 것은 해야 하기 때문이거나 혹은 일시적 편안함을 위함이 아니라 지향점을 道, 삶의 생과 사의 이치를 이해하고 말겠다는 발분하는 마음이 있다면 자연스레 배움과 이를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실천하는 태도는 그냥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저도 아직은 마음이 왔다 갔다 반반입니다...)
마지막으로 매주 채운샘께서는 매 편마다 채운‘s 베스트 구절을 픽 해주시는데요. <술이> 편에서는 인에 관한 이야기 29장입니다.
“인이 멀리 있는 것이겠는가? 내가 인을 실천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 인이 이를 것이다.”(子曰, 仁遠乎哉 我欲仁, 斯仁至矣.)
앞선 편에서도 보았듯 공자님은 仁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듯 하는 태도를 보이셨는데요. 그만큼 복합적인 차원임을 할 수 있습니다. 채운샘께서는 仁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질고 착하다는 것이 아니라, 인간만이 아니라 만물, 천지 귀신과도 감응하고 통하는 감수성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행동이 仁한 태도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고 공자님께서는 말씀 하셨습니다. 이렇게 인을 쉽게 말할 수 없다고 하니 사람들이 인을 또 대단히 추상적이고 우리 같은 사람은 쉽게 실천할 수도 닿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공자님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들으시고는 인이 그렇게 대단히 어려운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구절 같습니다. 즉, 인을 실천한 어떤 결과가 인한 것이 아니라, 개체가 살아가는 것은 혼자서 잘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타자들과 계속 엮이고 섞이며 이들의 존재가 개체인 내가 살아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임을 이해하면 그들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이해하고 이에 따라 마음을 내고 살아가는 과정 자체가 仁함이지, 인함이 어디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주는 구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짜 마지막으로 저는 공자님의 평소의 용모를 보여주는 4장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공자께서 한가로이 계실 적에 그 모습은 확 펴져 있었고, 그 얼굴은 온화하셨다.)과 군자와 소인의 마음가짐을 묘사하는 구절 36장 子曰, 君子坦蕩蕩, 小人長戚戚.(군자는 항상 마음이 넓고 여유가 있고, 소인은 늘 안달복달 근심에 차 있다.)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한자 발음이 “신신(申申), 요요(夭夭)” “탄탕탕(坦蕩蕩), 장척척(長戚戚).” 요런 구절이 발음이 재밌기도 하고 공부하면서 늘 몰아서 숙제하고 쫄려서 후기 쓰는 저의 모습과 대비되면서 인상적으로 읽었습니다. 그 외에 제가 스킵하고 다루지 못한 부분들은 샘들 각자 복습하시면서 마음에 새기길 바랄게요. 내일 봬요!
오~ 꼼꼼하게 정리하셨군요. 仁에 대한 얘기는 거의 모든 편에서 빠지지 않는 것 같네요. 나중에는 어느 편에 '인'이 어떻게 나오는지만 정리해도 토론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개인적으론 '인'에 대한 이야기보다 매번 처음으로 나오는 문장들이 인상적입니다. 괜히 처음으로 있는 게 아니란 생각도 들고요. "술이부작" 이 네 글자만으로도 세상에 대한 태도, 독특한 시간관 등 정말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런 공자가 또 마음으로 새긴 노팽이란 인물은 과연 어떨지..!
강의에서 창작의 개념이 16세기 서양에서 형성됐다는 이야기에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공자님이 ‘옛 것을 기술한다’고 할 때 그 말은 인간의 앎이 우주자연의 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걸 의미하는 게 참 흥미롭습니다~! 공자님의 겸손함과 배움의 태도가 듬뿍 느껴지는 문장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