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에 공자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까요? 공자는 천명을 깨닫고 천하를 떠도는 삶을 살다 죽기 전에 노나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합니다. 그는 자신을 인정해 주는 왕을 만나 자신의 사상을 정치로 펼쳐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으나 사기에서 ‘상갓집 개'로 비유되며 그의 꿈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꿈은 이뤄지지 못했으나 그의 사상은 아직까지 우리의 정신에 지대한 영향을 주며 공자 사상의 다양한 해석이 요구되기도 합니다. 그에게 천명은 이상적이지만 꼭 현실 세상에서 실현해낼 수 있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가 태어난 노나라를 떠나 이나라 저나라 떠돌며 벼슬을 구걸한 것은 천명에 대한 자기 확신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사상,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세계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계속해서 그것을 전하려 하고 상대와 대화하고 설득하는 자세는 각자도생의 삶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지금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다케다 다이준이 보는 공자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지내던 다케다 다이준은 사마천 사기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고뇌하고 진단하기에 역사라는 수단을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사기의 구조에 대한 자기의 해석이 그가 사는 전쟁시대를 해석하고 해법은 무엇인지 파헤쳐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사기에 등장하는 공자는 어떻게 해석하였을까요? ‘상갓집 개'의 처지로 세상에 의지할 만한 터를 찾지 못한 문화인의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문화인… 저는 이 단어가 꽂힙니다. 우리에게는 사상가, 배움을 즐기는 학자, 성인, 군자, 스승등으로 비교적 진지하고 무겁게 여겼는데 문화인이라는 수식어는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문화인은 학구적으로 책상에만 앉아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벼슬만 구하는 꽉 막힌 관료주의에 젖은 느낌이 아니라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고 내맘대로 여행하면서 자기뜻을 펼치겠다는 강인한 의지를 볼 수 있고 세상사에 관심이 많아 세상을 잘 관찰하고 말과 문자를 활용하고 사람들과 대화하며 자신의 사상을 펼쳐나가는 사람, 그런 문화인의 대표주자로 해석하였습니다.
또한 공자는 주공의 나라인 노나라를 믿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었다고 합니다. 공자가 살던 시기에 노나라는 이미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는데 왜 믿으면 안되었다고 말했을까요? 공자는 세상이 아무리 어지럽다 해도 세상을 향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세상 말세야 말세”라고 한탄하더라도 우리는 살아가야하고 내일 아침을 눈을 뜰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비관하고 부조리를 탓하고 괴로워하면서 숨을 쉬고 살아가야 하는 자세로는 세상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보고 듣는지 어떤 사람과 어떤 대화를 나누는지 몸짓하나 말한마디 하나가 세상을 어떻게 사유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변화시킬지는 세상에 강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상갓집 개처럼 여기저기를 떠돌아 의지할 곳 없어도 어지럽힌 세상에 아무리 절망하여도 내 발걸음과 말한마디가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을 공자는 늘 품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왜 철학은 난세에 등장하는가?
그리스철학, 로마철학, 제자백가의 사상, 부처의 사상은 언제나 난세의 와중에 탄생하였습니다. 난세란 어떤 세상을 말할까요? 어떤 학인이 난세란 정의가 통하지 않는 세상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지금 2023년의 시대는 난세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차원을 넘어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일으키는 전제가 무너졌을때 처절한 사유의 피로부터 철학이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사를 보면 전쟁이 없던 시기가 과연 있었던가 가늠해 봐야 할 정도로 전쟁은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 시리아 내전, 이스라엘 가자 지구의 분쟁등을 보면 우리는 전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전쟁 모금을 알리는 광고를 건너뛰기하며 남의 나라의 전쟁에 대해 이렇게 무감각하게 생각할 수 있는지 가끔 놀랍습니다. 아마 1950년대 우리가 한국전쟁을 뼈아프게 겪은 세대와 전쟁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와의 차이정도일까요? 전쟁은 인간이라는 동물로서의 삶의 전제을 아주 강하게 뒤흔듭니다. 그때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럴 때 바닥부터 사유를 합니다. 도대체 인간의 삶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철학은 나이브한 마음속의 평화가 아니라 피와 폭력과 투쟁으로부터 생겨난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공자가 천명을 깨닫는 것과 떠돌이 삶과의 관계
인간의 본성 자체가 무너진 시대, 가치 전환의 시대에 세상은 폐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은 무엇인지… 공자는 이런 물음들의 해답을 천명이라고 깨달으며 천하를 떠돌아다녔다고 합니다. 저는 이것은 우리가 배우고 있는 철학적 사유는 바로 길위에서 시작한다는 의미로 들렸습니다. 공자의 주 목적은 벼슬길에 올라 자신의 이상사회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공자의 생의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입니다. 각 나라의 군주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서 느꼈을 좌절, 절망, 괴로움등을 겪으며 또 발걸음을 나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그 떠돌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 공자의 노마드적 삶이 이시대에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상상해봅니다. 우리는 늘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경제적 불안, 인간관계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 불안을 야기하는 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고 불안을 어떻게 하면 물리칠까를 궁리하며 아등바등 돈을 벌고 처세술을 배우고 점을 보곤 합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은 가득하고 부조리에 분노하며 점점 비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죠. 저는 공자님이 말씀하신 천명은 우리에게도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세상에 대한 믿음, 세상이 나를 죽게 내버려두지 않을 무언가의 손길이 있다는 믿음을 모두가 깨닫는 것, 그것이 공자가 떠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에게 천명을 말해줘야 한다고 하는 자신의 꿈을 펼친 삶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호학 (즐거운 배움)
공자님은 그 누구보다도 본인이 호학자로서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였다고 합니다. “열 집의 고을이라도 그곳에 충과 신의가 나만 한 자는 반드시 있을 테지만 나만큼 호학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호학자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왜 좋아하다는 표현을 썼을까를 생각해보면 의식하지 않아도 끌리는 천성적으로 배움에 끌리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힘. 우리도 배우는 학인의 입장에서 보면 그 힘은 무엇보다도 강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표본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공자이지요. 기본적으로 인간은 배우는 자이고 배움으로써 최대의 즐거움을 얻는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공자입니다. 우리가 안락이라고 하는 단어는 아무데나 쓰이는 단어가 아니라고 합니다. 말 글자 그대로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다라는 뜻인데, 이는 조건과 상관없이 존재의 완전을 누리는 것이 안락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보통 즐거움을 외부에서 찾고자 하는데, 즐거움은 결코 외부에서 주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공자는 말합니다. 즐거움은 존재 자체로 있을 수 있는 역량이며 존재 스스로 만족감을 주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서 즐거울 수 있는 믿음. 이 믿음은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모두다 알다시피 배움입니다.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배움으로 우리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의 삶의 과정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배움을 늘 함께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길위에 있는 과정으로 배움과 함께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주 강의 마지막 부분에 화두를 던져주시며 공자의 의미를 재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하셔서 제멋대로 살짝 해석을 덧붙여 보았습니다. 많이 어설프지만 공자가 어땠을지를 생각하며 재미있게(혼자만) 상상해 보았습니다. 삶은 즐거운 것일까요? 진지한 것일까요? 저는 늘 첫번째를 선택하려 하지만 자꾸만 두번째로 괴로워하곤 합니다. 배움이 어떤 것인지 떠돌이삶으로 즐거움을 사유했던 공자는 나에게 어떤 메세지를 주는지 계속 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의 주유를 떠올려 보면, 호학에서 말하는 즐거움은 한편으론 더없이 진지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ㅎ 즐거움과 진지함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리가 있으면 좀 더 나눠봐도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철학은 난세에 등장한다'고 할 때, 과연 난세를 무엇으로 봐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도 신선했습니다. 대체로 난세를 폭력이 난무하고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로 규정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지게 되는 어떤 시대를 난세라 볼 수 있다고 하셨죠. 그렇게 보면 난세가 아닌 시대는 없는 것 같지만, 그래야만 역사가 좀 더 입체적이게 되고, 우리가 사는 혹은 살아야 하는 모든 시대를 좀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유토피아처럼 상상 속 천국은 도래하지 않을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즐거운 삶을 조직하는 게 윤리적으로 요청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공자의 삶과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배움의 기쁨을 알아가고 있는 희욱샘~~
2023-09-26 23:06
휵샘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려본 공자님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b( ̄▽ ̄)d
공자님은 '천명'을 깨닫고 왜 천하를 떠돌았을까? 그렇다면 그 천명이 무엇일까... 요게 엄청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휵샘이 말한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배움으로,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 이것이 '천명'은 아닐까? 거기에 맘이 쏠리네요. 규창샘 말처럼 저 먼 유토피아가 아닌, 외부로부터 요청된 법과 윤리도 아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말이죠. 자신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지금 여기서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으로서,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조직하는 게, 천명이라면... 휵샘 말처럼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외부의 가치를 믿지 말고, 삶과 사람들을 믿고 배움과 실천의 과정을 가보는 것으로 말이죠! 우리 삶의 조건이란 고정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길 위에 있기 때문에 '온고지신'의 배움을 이어갈 수 있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계기로 사마천의 사기, 공자님의 삶과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생각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희욱샘처럼 배움의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이어가고 싶네여~~함께 건강히 열공 해요~~\( ̄︶ ̄*\))
공자의 주유를 떠올려 보면, 호학에서 말하는 즐거움은 한편으론 더없이 진지한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ㅎ 즐거움과 진지함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리가 있으면 좀 더 나눠봐도 좋을 것 같네요!
그리고 '철학은 난세에 등장한다'고 할 때, 과연 난세를 무엇으로 봐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도 신선했습니다. 대체로 난세를 폭력이 난무하고 정의가 통하지 않는 시대로 규정하지만, 근본적인 질문이 던져지게 되는 어떤 시대를 난세라 볼 수 있다고 하셨죠. 그렇게 보면 난세가 아닌 시대는 없는 것 같지만, 그래야만 역사가 좀 더 입체적이게 되고, 우리가 사는 혹은 살아야 하는 모든 시대를 좀 더 편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차피 유토피아처럼 상상 속 천국은 도래하지 않을 거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즐거운 삶을 조직하는 게 윤리적으로 요청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공자의 삶과 시대를 다시 생각하게 되네요!
휵샘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려본 공자님 이야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b( ̄▽ ̄)d
공자님은 '천명'을 깨닫고 왜 천하를 떠돌았을까? 그렇다면 그 천명이 무엇일까... 요게 엄청 궁금하더라고요... 그래서 휵샘이 말한 "함께하는 사람들과의 배움으로,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 이것이 '천명'은 아닐까? 거기에 맘이 쏠리네요. 규창샘 말처럼 저 먼 유토피아가 아닌, 외부로부터 요청된 법과 윤리도 아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선택의 문제도 아니고 말이죠. 자신이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과 지금 여기서 즐거움을 만들어가는 것으로서, 능동적이고 자주적인 삶을 조직하는 게, 천명이라면... 휵샘 말처럼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의 삶에 대한 태도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외부의 가치를 믿지 말고, 삶과 사람들을 믿고 배움과 실천의 과정을 가보는 것으로 말이죠! 우리 삶의 조건이란 고정돼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한 길 위에 있기 때문에 '온고지신'의 배움을 이어갈 수 있기도 하죠.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 시대의 문제를 일깨워주는 계기로 사마천의 사기, 공자님의 삶과 말씀을 부지런히 읽고 생각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희욱샘처럼 배움의 기쁨을 사람들과 함께 이어가고 싶네여~~함께 건강히 열공 해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