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를 처음 읽고 배우고 있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유붕자원방래 불역열호,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남의 인정이나 실리적 목적이 아니라, 사심 없는 마음으로 배움과 만남의 기쁨을 추구했던 공자님의 허심탄회한 첫 문장. 그로부터 논어 이야기를 따라온 지 벌써 8주가 지났습니다. 매주 채운 선생님, 문빈 선생님, 박규창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지난주 수업은 ‘태백’ 편이었습니다. 저의 원픽은 두 번째 문장입니다. “자왈, 공이무례즉로, 신이무례즉사, 용이무례즉란, 직이무례즉교(恭而無禮則勞, 愼而無禮則葸, 勇而無禮則亂, 直而無禮則絞)”. 예의 부족을 여러 측면에서 보여주는 구절인데요, 공恭, 신愼, 용勇, 직直, 이러한 장점도 예가 없다면 미덕이 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채운 선생님께서 예는 약(約) 단속해주는 것, 딱 다잡아 주는 것이며 상황 속에서 그 본성이 모양을 갖추게 해 주는 것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공하다는 것은 낮출 수 있는 미덕인데 상황에 맞게 재단되지 않으면 너무 피곤해지고, 신중함이 상황에 따라 발휘되지 않으면 겁이 많아지고, 용기도 때에 맞게 재단되지 않으면 맨날 싸움질만 일삼을 수 있고, 직이 때에 맞게 재단되지 않으면 강퍅해진다는 것입니다. 좋은 자질, 선한 본성이라 일컫는 것도 지나치면 자신과 상대를 힘들게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상황에 적절히 맞춘다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며, 자기 단속은 자기 상태에 대한 거리두기가 아닐까요. 즉 타자 존중과 자기 객관화. “남이 내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않는다”는 황금률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무례한 모습을 비유적으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우연히 칡넝쿨이 주변의 나무들을 뒤덮은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요. 칡넝쿨이 너무 무성하게 나무꼭대기까지 점령해서 나무의 형체도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나무의 입장에서 매우 무례하게 보이더군요ㅎㅎ. 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자기 확장, 지나침은 그게 어떤 속성이든, 공생을 해칠 수 있어 예가 필요한가 봅니다. 역으로 보면, 무례는 자기밖에 모르거나 자아에 매몰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恭, 신愼, 용勇, 직直이 아무리 좋은 덕목이라 하더라도 그 자질을 가지려는 자기 욕망만 추구하다 보면 무례함으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피곤하게 하고, 분쟁과 각박함을 낳게 되는 것 같습니다. 중국의 춘추시대에는 전쟁의 상황에서도 예를 지켰다고 합니다. 마치 전쟁 퍼포먼스 같은 예의 바른 전쟁을 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에서 춘추시대 군주제가 쇠퇴하자 유(儒)계급은 대평원지대에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생활 전체에 대해 제의와 예의 정교한 규칙을 만들고 수행했다고 설명합니다. 예절의 상대에 전쟁에서의 적까지 포함되었던 것입니다. 함정을 이용해 적을 이기는 것이 수치이며, 뒤에서 화살을 쏘아서 공격하는 것은 무례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적에 대한 예의는 폭력과 살상을 줄이고. 전쟁에서 폭력이 그 선을 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예는 다른 존재들과의 공존의 미학이라고 할 만합니다.
<태백> 편 2장에서 무례의 결과, 바꾸어 말하면 예의 역할에 대해 말했고, <위정>편 15장은 예에 본질에 대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약빈이락, 부이호례자야(未若貧而樂, 富而好禮者也)에 대해 채운 선생님께서 해석하시면서 동양에서 예는 단순한 격식이 아니라 우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아하다’의 영어표현 Grace는 감사와 은총의 뜻도 있다고 합니다. 내가 누리는 게 나에게 주어진 것이고 그것에 대한 감사를 아는 태도라는 의미입니다. 예의 아름다움은 예의 형식 그 자체가 아니라 인한 마음에서 발현되는 것이지요. 이것은 <팔일>편 3장, 인이불인 여례하(人而不仁, 如禮何), 인한 마음이 없다면 예가 무슨 소용인가 하는 의미와도 연결됩니다. 예의 형식보다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에서 <태백> 편과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예를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진심없는 겉치레 예라도 갖추는 게 중요한지, 솔직하고 거칠지만 차라리 무례한 게 나은지 질문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문일 수도 있구요.^^ 평소에 ‘예의 있다, 없다’라는 표현을 쉽게 자주 쓰면서도 막상 예에 대해 생각하니 점점 더 어렵네요. 하지만 <태백> 2장의 무례를 상기하면 일상에서 로勞, 사葸, 난亂, 교絞하게 되지 않는지 문득문득 돌아보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다음 주 뵙겠습니다.~
오...! '예'라는 키워드로 논어에 접속하고 계시는군요. '예'는 '인'만큼이나 중요하면서도, '인'과 달리, 지금 우리에게 좀 더 일상적으로 와닿는 개념인 것 같아요. 후기에 쓰신 대로 누군가의 예의에 대하 평가하면서도, 정작 그때 우리가 말하는 '예'란 무엇인지 돌아보게 됩니다. 공자가 말하는 '예'에 비하면 순전히 '나'를 존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판단한 했을뿐 그의 자질, 관계 역량과 연관해서 판단한 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계속 '예'를 붙잡고 읽어보죠!
장점이 장점으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예’가 필요하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흥미로웠고, 공감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동안 ‘예’를 딱딱한 형식, 절차 정도로 생각했는데, 채운샘께서 예는 단속해주는 것, 딱 다잡아주는 것, 즉 ‘상황 속에서 그 본성이 모양을 갖추게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해주시는 부분도 좋았습니다. 공손함과 신중함과 용기와 정직함이 진정한 미덕으로 되려면 예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