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님과의 대화를 통해 공자가 어떤 인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장이 9장 자한편입니다. 그 때문에 자한편의 구절이 많이 인용됩니다. 저는 50년 전에 한자를 배운 한자세대로 그 후 한자를 공부한 적이 없어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논어를 배우면서 간혹 떠오르는 한자를 보면 신기합니다. 그리고 한자 세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매번 번갈아 가며 한자 문법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시는 규창샘과 문빈샘께 감사드립니다. 서양철학을 배울 때는 뭔가 서양철학이 동양철학보다 우월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데 반해 논어 같은 동양 철학은 고리타분해 보입니다. 그래서 논어를 나이가 들어서 공부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면 저같은 소인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말과 행동이 愼重하지 못한 저는 논어를 공부하면서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공자님은 ‘부끄러움만 느끼고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어쩔 수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른말을 들으면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따르면서도 허물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 유순함 가운데 바름이 깃든 말을 들으면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기뻐하면서도 그 말의 속뜻을 생각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기뻐하기만 하고 속뜻을 생각하지 않으며, 따르기만 하고 허물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는 그런 사람을 어찌할 수 없다.
法語之言은 딱 단정해서 말하는 것이고, 巽與之言은 약간 돌려서 완곡하게 하는 말입니다. 부드럽게 하는 말은 들으면 당장 기분이 좋습니다. 기분이 좋은 그 칭찬의 속뜻이 어떤 것을 함축하는지 繹(역-저의를 찾고 풀어냄) 해야 합니다. 悅하고, 역하지 않고, 따르기만 하고, 그런 척하기만 하고, 진심으로 허물을 고치지 않으면 공자님도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법어지언과 손여지언은 우리가 사람들과 주고받는 말하는 방식과 글쓰기의 두 가지 방식입니다. 공자님은 남에게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우리에게 남의 말을 듣고 어떻게 역해야 할지를 말씀하십니다. 반대로 내가 남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도 생각해보게 되는 구절입니다.
자한편에 들어가기에 앞서 채운 샘 깨서 맹자 진심 하 37장에 있는 狂자에 대해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狂에 대해 ‘미치다’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데 고대의 狂은 용법이 다릅니다. 맹자의 제자 만중이 맹자에게 묻습니다.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어찌 온 데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나의 마을 젊은이들은 저돌적이고 단순하지만 진취적이며 그 처음을 잊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공자께서 진나라에 계시면서 어찌 노나라의 진취적인 선비들을 생각하십니까?”
맹자께서 말씀하셨다. “공자깨서는 중용의 도를 얻어서 함께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진취적(狂)이거나 곧게 지킴(獧견)을 함께 했겠지? 狂者는 진취적이고 獧者(견자)는 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하셨는데 공자께서 어찌 중용의 도를 바라지 않았겠는가마는, 반드시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다음을 생각하셨네.” 공자님은 중도를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면 광자나 견자와 함께 하겠다고 합니다. 만장이 도대체 광이 뭡니까 하고 묻습니다. 맹자가 답합니다. 광자들의 높은 이상이 과거에 있기 때문에 늘 옛사람들을 말한다. 광자들은 옛사람들을 모범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자들의 행실을 보면 그 古人들을 따라가지 못한다. 광자들의 뜻이 너무 높아 말과 행실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면이 있다. 그리고 견자는 어떤 원칙 깨끗한 거 이런 거를 굳게 지키려는 사람이다. 견자는 자기 원칙을 지키니까 외롭고 쓸쓸하다.
맹자는 계속 설명합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문 앞을 지나면서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그를 섭섭해 하지 않은 자는 오직 향원이겠지! 향원은 德의 도적이다.’라고 하셨네 그러니까 향원은 세상에 아첨하는 사람입니다. 더러운 세상에 영합하며 (同乎流俗 合乎汙世), 딱히 지적할 만한 꼬투리는 없는데 왠지 가식적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입니다. 깨끗한 척 고결한 척 정의로운 척 해 보이는데 뒤로 챙길 것 다 챙기는 사람들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국회의원 3선 4선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요순의 道에는 함께 들어갈 수 없기에 德의 도적입니다. 공자님은 닮았지만, 아닌 것을 미워해. 惡似而非者.사이비란 말이 여기서 유래합니다. 가라지(피)는 벼와 비슷하지만, 벼는 아닙니다.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덕스러워 보이지만, 실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자님은 말씀합니다. 젊은 얘들은 狂 해야 해. 거칠고 뜻이 높아 실천이 따라가지 못하더라도 그런 애들과는 뭔가를 도모할 만하다. 공자님은 현실이 자기 이상에 미치지 못해서 울분을 가지고 있는그런 狂者들을 아끼셨습니다.
이 狂者에 자신을 비유하고, 자기 스스로를 그런 狂者에 이입을 한 사람이 이탁오입니다. 그러나 이탁오는 狂者에 대해 다르게 해석합니다. <분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중에서 광자는 古人을 높이 평가하는게 아니라 사실은 古人이여 古人이여 하면서 자기를 높게 보는 자라고 해석합니다. 나도 狂者이지만 엣날의 狂者랑 좀 달라. 나 이탁오는 그 엣날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 광자는 자기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수록, 세계와 자기가 불화할수록 허튼 소리와 궤변을 더 지껄입니다. 오직 성인 만이 그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합니다. ‘저 사람의 상황이 저래서 그렇구나.’라고 이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는 곳에서 분노하고 그것을 유독 참을 수 없기 때문에 막 떠들어 대는 자가 광자입니다. 광자를 광자로 보지 않으면 그의 미친 짓도 저절로 수그러듭니다. 원래 세상에는 으뜸가는 일류 미치광이라야 자신의 행동을 은폐하지 않을수 있습니다. 은폐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을 감추지 않음으로서 저절로 가려지게 하는 방식이라고 이탁오는 말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여러 방법이 있는데 미친척하는 것도 그중의 한 방법입니다. “우리 시대에 미친척 하는 것은 제정신을 갖고 사람들 모두가 가는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라고 채운샘은 덧붙이십니다. 요즘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狂者이겠지요. 여러분은 어떤 광자가 되고 싶으십니까? 광자가 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광자도 견자도 아닌 어떤 자로 살아야 할까요? 향원이 편해보입니다만 似而非를 면하기 위해 서라도 논어 수업을 계속 들어야겠습니다.^^
子曰, “譬如爲山, 未成一簣, 止, 吾止也. 譬如平地, 雖覆一簣, 進, 吾往也.”
공부는 산을 쌓아 올리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한 삼태기 흙이 모자라서 멈추는 것도 자신이 멈추는 것이다. 또 한 삼태기의 흙을 부어서 나아감도 내가 나아가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그 단계가 있습니다. 구덩이에 하나씩 부어가지고 평평한 땅을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내가 나아가고 내가 그만두는 것이지 누구를 탓할 게 없습니다. 공자님은 학문의 능동성을 말합니다. 배움뿐 아니라 삶도 자신의 능동성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가는 베로 만든 관을 쓰는 것이 옛날의 예엿는데 지금은 실로 만든 것으로 대응한다. 이는 검소한 풍습이므로 나는 남이 하는 대로 하겠다. 신하는 마루 아래에서 절하는 것이 예였는에 지금은 마루 위에서 절을 한다. 이는 교만한 행동이기에 비록 남과 다르다고 할지라도 나는 아래에서 절하는 옛 법도를 따르겠다.
공자님이 禮를 행하는 방식은 상황에 따라서 판단하고 행하십니다. ‘이것이 나는 더 맞는 것 같아’ ‘이것이 더 좋은 것 같아’라고 스스로 판단하고 따르십니다. 절대적으로 옛날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의 원칙 속에서 행하는 것이 禮입니다. 이탁오는 ‘참으로 時中의 道를 행하시는 성인’이라고 말합니다.
子曰, “吾有知乎哉? 無知也. 有鄙夫問於我, 空空如也. 我叩其兩端而竭焉.”
나에게 고착화된 지식이 있는가? 이러한 지식은 없다. 좀 비루한 사람이 나에게 질문을 하면, 나의 마음은 텅 비어 있기에 그가 한 질문을 그대로 받아들여 십분 이해한 바탕 위에서 최선을 다해 가르쳐준다.
이 장도 時中하고 연관됩니다. 兩端(양단)은 어떤 일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말합니다. 누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오면, 그 문제의 이쪽 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저쪽 끝에서 보면 저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짚어서 설명을 해줍니다. 이 구절의 핵심은 공자님은 앎에 대해서 미리 단정하고 있지 않다는 것 입니다. 양단을 짚어서 그 사이의 것들을 말해주는 앎입니다. 갑자기 행간을 읽는 것처럼 앎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단정적이지 않고, 사이를 짚고, 時中을 통찰해야 하는 앎이란 어떤 것일까요?
안연이 깊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아! 선생님의 도는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뚫어볼수록 더욱 견고하다. 얼핏 보면 앞에 있는 듯하더니, 홀연히 뒤에 있구나. 그러나 선생님은 순서에 맞게 사람들을 이끌어주시니, 문헌으로 나의 지식을 넓혀주고 예로써 나의 행위를 바로 잡아주셨다. 배움을 그만둘 수 없어서 내 재주를 다하였더니, 무언가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 이런 선생님의 경지를 쫒고자 하나, 아직 어찌 해야할 줄 모르겠도다.
10장은 제자들이 공자의 말과 행동을 어떻게 보았는가라는 측면에서 중요합니다. 안현이 말한 것 중에 가장 긴 말이며 공자가 어떤 존재인가라는 것을 문학적으로 잘 보여준 유명한 구절입니다. 瞻之在前, 忽焉在後. 내가 선생님 말씀을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모르겠고, 내가 가진 재주를 다해 뭔가 좀 보일려나 했는데 갑자기 앞에 절벽이 막아선 느낌입니다. 선생님은 博文約禮 학문으로 넓혀주시고 禮로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실천을 통해서 나를 가르치십니다. 이것이 공자님의 위대함입니다. 뭔가 위대한 사람의 그 깊고 높은 도에 우리가 도착한 것 같아도 또 도망가고 있고 이런 미묘한 도를 이야기할 때 儒家에서 할 수 있는 최상의 표현들입니다. 안현만이 공자님의 높고 깊은 뜻을 알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자님은 이렇게 뜬구름을 잡듯이 어떤 저 위에 있는 존재는 아닙니다. 공자님은 자신이 성인으로 취급받는 것을 끝까지 거부합니다. 如有所立卓爾. 이탁오는 ”무언가 앞에 우뚝 서 있는 듯하다.“라는 것은 바로 공자의 실천이자 禮였다고 설명합니다. ‘앞에 우뚝 서 있다’라는 표현은 공자님이 늘 어떤 상황, 즉 時中에서 드러나시는 그 모습을 제자가 아무리 재주를 다해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子欲居九夷. 或曰, “陋如之何? 子曰, “君子居之, 何陋之有?”
공자께서 구이의 오랑캐 땅에 옮겨 살고자 하셨다. 혹자가 말하기를 “그곳은 누추한데,어찌 가서 살려하십니까?” 자왈 “군자가 가서 산다면, 누추함이 무슨 문제이겠는가.”
채운샘이 자한편에서 베스트라고 뽑은 구절입니다. 君子가 머무는 그곳이 유토피아입니다. 우리에게 유토피아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좋은 사람이 살면 거기가 좋은 곳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도 소인이 살면 소인의 땅입니다. 채운샘의 예전 강의 중에 기억에 남는 구절도 이와 비슷합니다. 내가 머물 곳은 육지가 아니라 번뇌가 파도처럼 들끓는 이 바다 입니다. 이 바다에서 君子랑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여러분은 함께 할 君子나 仁者가 있으신지요?
子曰, “可與共學, 未可與適道, 可與適道, 未可與立, 可與立, 未可與權.”
“함께 공부하여도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없으며, 함께 도에 나아가도 더불어 도를 확립할 수 없으며, 함께 도를 확립하여도 더불어 상황에 알맞게 적절히 도리를 실천할 수는 없다.
여기서 適道란 같이 공부하는 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 함께 같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共學하고適道까지는 함께 할수 있습니다. 米可與權.權은 권력할 때 쓰는 말이지만 저울 權자입니다. 여기서는 ‘상황에 알맞게 적절히 도리를 실천하다’로 풀었습니다. 즉 大義는 같이 하지만 상황 상황에서 뜻을 같이 하는건 매우 어럽습니다. 뜻을 함께 하는 사람들과 삶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공자님은 모든 것이 변하고 생성중에 있음을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늘 時中을 하시나 봅니다.
이탁오는 역으로 말합니다. 더불어 도에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사람이며, 더불어 도를 확립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함께 도에 나아갈수 있는 사람이며, 더불어 상황에 알맞게 적절히 도를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은 반드시 함께 도를 확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을 하든 우선 배움을 공유(共學)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것이 權으로 나아가는 출발이라고 강조합니다.
정리를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감동입니다…!
저도 맹자, 공자, 이탁오. 이 세 사람이 광자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재밌었습니다. ㅎㅎ
맹자와 공자 같은 경우는 광자를 뜻이 너무 높아서 행실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는데,
이탁오는 광자를 고인을 깔보고 자신은 높여 보는 인물로 보죠!
지금 시대에 광자로 산다는 건 ”제정신을 갖고 사람들 모두가 가는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라는 채운샘의 말씀도 되짚어보게 됩니다.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박규창
2023-10-08 08:35
나이가 들어야만 논어의 맛을 알게 되는 건 아니죠! 그런데 처음 말씀이 매우 강렬하네요. 경숙쌤의 진심이 담겨서일까요? 덕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도 고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도 새삼 긴장하게 되네요. 그래도 중간중간 부끄러움에 마주하게 위한 생각의 흔적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히 구절들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경숙쌤 삶에서 구절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이탁오는 공자님의 말씀을 단지 받드는 게 아니라 마치 대화하듯이 받아들였죠. 왜 공자님의 말씀이 대단한지 이탁오의 해석 속에서 다시 느껴졌는데, 경숙쌤의 후기에서는 공자님과 이탁오가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ㅋ
정리를 이렇게 잘해주시다니…! 감동입니다…!
저도 맹자, 공자, 이탁오. 이 세 사람이 광자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재밌었습니다. ㅎㅎ
맹자와 공자 같은 경우는 광자를 뜻이 너무 높아서 행실이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으로 정의했는데,
이탁오는 광자를 고인을 깔보고 자신은 높여 보는 인물로 보죠!
지금 시대에 광자로 산다는 건 ”제정신을 갖고 사람들 모두가 가는 쪽으로 가지 않는 것“이라는 채운샘의 말씀도 되짚어보게 됩니다.
정성스런 후기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어야만 논어의 맛을 알게 되는 건 아니죠! 그런데 처음 말씀이 매우 강렬하네요. 경숙쌤의 진심이 담겨서일까요? 덕분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도 고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다는 공자님의 말씀도 새삼 긴장하게 되네요. 그래도 중간중간 부끄러움에 마주하게 위한 생각의 흔적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순히 구절들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경숙쌤 삶에서 구절들이 조금씩 풀리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어요. 이탁오는 공자님의 말씀을 단지 받드는 게 아니라 마치 대화하듯이 받아들였죠. 왜 공자님의 말씀이 대단한지 이탁오의 해석 속에서 다시 느껴졌는데, 경숙쌤의 후기에서는 공자님과 이탁오가 대단하게 느껴지는군요!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