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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탁오와 함께 읽는 <논어> 수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여름부터 한 편 한 편 따라가다 보면 마지막 편을 읽을 쯤엔 겨울이 되어있겠군요.ㅎㅎ 먼저 첫 번째 편인 학이편을 다함께 낭랑하게 낭송하면서 시작했습니다. 이어진 규창샘의 한자 기본문형 정리 시간! <논어>에, 이탁오의 논어평도 배우는데, 한자 문형까지 배울 수 있다니, 일석삼조의 든든~함을 느낍니다. 나눠주신 수업자료에 여러 가지 뜻과 용법을 꼼꼼히 정리해주셔서 한자 익히는 데 도움이 많이 될 거 같습니다. 감사히 보겠습니다.(_ _) 그동안 한문 볼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볼 일이 있을 땐 한 자 한 자의 뜻만 봤었는데, 이번에 한문을 문장 단위로 보게 되어 재밌었습니다. 주어/동사/목적어/조사/접속사 등을 파악해가면서 읽으니 멀게만 느껴졌던 한문이 ‘언어’로 느껴지기 시작했달까요! 지금은 혼자서 끊어 읽으려고 하면 매우 오래 걸리지만, 요왈편 읽을 때쯤엔 규창샘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있게 시습(時習)해야겠습니다.^^
2교시부터는 채운샘의 논어 강독 시간이었는데 첫날인 만큼 논어는 어떤 텍스트인지, 이탁오는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 소개해주셨습니다. 스피노자는 텍스트를 자연물이라 했다고 하는데요. 끊임없이 변하는 것, 역사적 맥락 속에서의 상징과 뉘앙스를 갖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렇다고 하죠. 논어는 공자의 제자 + 제자의 제자...들에 의한 기록입니다. 제자들마다 공자의 사상을 받아들이는 배경이 천차만별이었을 텐데요. 한나라 때는 훈고학적 해석을 위주로 했고, 황간의 시대에는 노장적 해석을, 논어를 경전의 반열에 올려놓은 주희의 시대에는 완벽한 체계화를 통한 교과서적 해석을 끌어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주자 이후로는 한동안 논어에 대한 변변한 해석이 나오지 못했다는 후문이.......
그리고 왕양명과 이탁오가 등장하는 명말청초, 이때에는 명나라가 망해가는 분위기와 함께 유학에 대한 의심이 싹트면서 불교와 도교를 수용하고 유학과 융합하는 사상이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이탁오는 바로 이런 때에 태어난 사람인데요. 채운샘께서 정리해주신 읽기 자료를 통해 그가 어떤 인물로 자라났는지를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언사가 직설적이고 성격이 꼿꼿하며 세상의 어떤 것도 눈에 담지 않는 오연한 기상의 소유자”(!)인 그는 50세 이후 관직생활을 정리하고, 머리를 깎고, 공부에 전념합니다. 당시에는 편지로 사상 논쟁을 했었는데 그는 격정적인 기세로 뜨거운♨ 글을 써서 보냈다고 하지요. 그 편지들의 모음이 바로 『분서(焚書)』입니다.
이탁오는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성인의 가르침이 담긴 책을 읽었지만 그 내용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공자를 존경했지만 공자에게 어떤 존경할 만한 점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성인에 대한 성리학적 해석에 얽매여 스스로의 깨달음을 멀리 했던 자신을 통렬히 비판하는 글이었지요. 중요한 건 자신의 깨달음이라는 걸 알아차린 그는 그때부터 불경이든 노장이든 가리지 않고 뒤적이며 읽기 시작합니다. 당시 유교의 기본 경전이었던 논어 역시도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죠. 그는 공자의 말씀을 간명한 선문답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데요, 그래서인지 그의 논어평은 굉장히 함축적입니다. 이제 저희는 논어를 자기화한 그의 해석을 함께 따라가게 되겠군요!
본격적으로 논어의 첫 번째 편인 학이(學而)편에 들어서자 논어를 잘 모르는 이에게도 제법 익숙한 문장이 나왔습니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 채운샘께서는 논어를 다 까먹어도 이 구절을 잘 새기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공자님은 정치를 잘하거나 일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을 키우고 싶어 했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데요. 바로 이 1장이 논어의 핵심인 배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1. 子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이 문장에 대해 이탁오는 ‘열락(悅樂)’이라는 종교적인 상태를 환기시킵니다. 공자가 말한 기쁨과 즐거움이란 단순히 밝고 재밌고 들뜨는 기분 같은 것이 아니라 동요가 없고 마음이 충만한 상태, 항상적이게 편안한 상태라는 것이죠. 배우고 수시로 익힐 때, 벗이 멀리서 찾아올 때면 우리는 그런 상태 속에 있게 된다는 겁니다.
‘벗이 멀리서 온다’는 구절에 대해 말뜻 그 이상으로 잘 해석이 되지 않았었는데 채운샘께서 이때의 ‘원(遠)’을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라 해석해주시니 그 구절이 더 와 닿았습니다. 벗이 멀리서 온다는 건 한마디로 ‘배움은 이질적인 친구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뜻인 거지요! 지난 몇 달 간 간간이 혼자서 책을 뒤적여보고 글을 끄적여본 결과...이 구절에 매우 동감하는 바입니다. ്ദി˶ˊᵕˋ˵)
‘人不知而不慍’은 우리가 자주 시달리는 인정욕구를 나타내는데, 거기서 慍이란 화를 내는 것이라기보다 서운함, 만족스럽지 않음, 찜찜함에 가깝다고 하셨습니다. 흠...그렇게 표현되니 딱 알겠습니다. 내가 열심히 한 것을 알아주지 않을 때의 그 慍한 마음을 말이지요. 그 마음은 자신을 위해서 공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1장에서 언급된 것들이 바로 공부의 세 가지 테제입니다. 이 세 가지를 날마다 익히고, 지니고 다니는 것부터가 공자님이 말하는 공부입니다.
6. 子曰, “弟子入則孝, 出則弟, 謹而信, 汎愛眾,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동양고전에 나오는 효와 제를 볼 때마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이 되는데요. 6장에 나온 효, 제에 대해 샘은 수직적, 수평적 관계에 대한 예(禮)로 읽어보길 제안하셨습니다. 그런 관계라면 저희도 일상에서 얼마든지 떠올려볼 수 있으니까요. 꼭 부모님이나 형제가 아니어도 윗사람, 아랫사람, 옆 사람은 우리가 처한 상황에 따라 생겨납니다.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되’로 번역된 범애중(汎愛眾)에서 사랑이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을 뜻합니다. 친인(親仁)은 친교하라, 살갑게 굴라는 말이 아니라 배울 것이 있는 이에게 ‘배우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구절, 소인적인 마음의 합리화 욕구를 뿜뿜 일으키는 구절인 행유여력(行有餘力)은 책에서는 ‘이렇게 행하고도 여가가 있다면’이라고 번역되긴 했지만, 채운샘의 강력 주장 아래 저희는 이렇게 읽어보기로 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것들을 행함 속에서의 힘을 발휘하여 글을 배운다’라고요.
8. 子曰, “君子不重則不威, 學則不固. 主忠信. 無友不如己者, 過則勿憚改.”
이 구절은 생각해 볼 것이 많아 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 문장이었습니다. 먼저 중(重)은 저희가 쉽게 떠올릴 법한 중후한 멋, 정우성 같은 이미지가 아님을 꼬집어주셨는데요ㅋㅋ ‘사람은 무거워야 한다’ 했을 때, 말투라든가 풍겨 나오는 분위기처럼 눈에 보이는 외면적인 것을 더 신경쓰게 되는 것 같은데 내면의 무거움을 생각해보면 重이라는 말이 좀 다르게 다가옵니다. 예를 들어 공부할 때 重하다는 건 뭔갈 알았다고 금방 들뜨고 자신에 차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차분히 곱씹고 또 곱씹는 일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게 重한 태도가 없으면 위엄도 없으며, 공부가 지속되지도 않습니다. 아무리 계속 책을 읽고 글을 써도 공부가 되지 않는 슬픈 일이 벌어진다...고 공자님이 말씀하십니다.
충(忠)과 신(信)은 제가 참 체화하고 싶은 덕목인데, 진실함을 뜻합니다. 증자의 구절을 한 번 더 새겨야겠네요. “나는 날마다 세 가지로 내 자신을 들여다본다. 남을 위해 애쓸 때 진정이었는가? 벗과 사귈 때 진실하였는가? 배운 것을 복습하였는가?”(4.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이어지는 無友不如己者, ‘자기만 못한 이를 벗 삼지 말라’는 이 말씀은 부처님도 하셨다고 해요. 이것도 오해하기 쉬운 구절인데, 나보다 능력 없거나 단점이 있거나 존경할 만한 구석이 없는 놈은 배척해라! 로 읽기가 참 쉬운 거 같아요. 하지만 공자님은 삼인행 구절을 통해 우리는 누구에게서든 배울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주셨죠. 채운샘은 이 부분이 우리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는 날카로운 구절이라 말씀하셨어요. 우리에겐 우리보다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내가 돋보이고 싶은 습성이 있기 때문에 나보다 돋보이는 존재를 샘내는 거죠. 그런 심리는 자연스럽게 나보다 나은 존재를 멀리하는 행동을 일으킵니다.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이들을 가까이하게 만들고요. 無友不如己者와 親仁은 그러한 습성에 대한 경계를 이야기하는 심리적 해독제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8장의 마지막 구절은 過則勿憚改입니다. 자신이 무얼 잘못하고 있는지를 알려면 친구와 스승의 시선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알았다면, 고치기를 서슴지 말아야 합니다.
읽기 자료 2번(‘황안의 두 스님을 위한 글 세 편’)에서 이탁오는 사우(師友)에 대해 말합니다. “내가 말하는 스승과 벗이란 원래 하나이니, 어떻게 두 가지 다른 의미가 존재하겠습니까?” 네 번 절하며 배울 수 있고, 마음속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는 스승이자 벗의 소중함을 새기며 첫 시간 후기를 마칩니다.
오오~ 그날의 2시간 30분을 아주 꼼꼼하게 정리하셨군요! 복습하기 위해 녹음을 듣지 않아도 이 후기를 읽는 걸로도 충분할 것 같네요.
저는 이탁오의 '사우'에 대한 이야기가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두 글자는 애초에 하나의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며, 하나만 남겨야 한다면 차라리 '우'를 남겨야 한다고. 또, 스승은 네 번 절하는 형식에 있지 않다는 말에서, 와... 가는 내내 저 말이 잊히질 않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이탁오의 평을 보니 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논어를 읽었을지 다시 다가오는 지점이 있었습니다. 뜨거운 여름에 보다 더 뜨겁게 논어를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