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크레티우스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세 개의 화두] 두번째 강의 후기입니다. 이번 강의의 제목은 <반신화: 원자력 신화 혹은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폐허>였습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으로 지금 여기의 원자력 산업을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고대 철학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요. 하지만 강의를 듣고 시기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동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사유하는 데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에 그 전보다는 관심이 커진 것 같아요. 비슷한 모양의 문제가 기원 전에도 있었다는 것이 왠지 모를 위로가 되기도 하고요. 강의 내용을 정리해보자면…
루크레티우스는 우리를 끝없는 두려움과 갈망으로 이끄는 신학적 환상과 싸우고자 했다고 합니다. 종교의 권위가 합리성에 의해 밀려난 지금에는 신기술과 에너지가 신의 자리를 대신해 환상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이 압축적으로 보여지는 곳이 원자력 산업입니다. 강의를 통해 루크레티우스가 ‘영혼의 혼탁함’의 근거들을 되묻고 털어냈던 것처럼 원자력 산업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환상들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그 뒤에 가려져 있던 폐허를 볼 수 있었어요.
가장 먼저 지금 이 시기의 신화는 무엇인지 살펴보습니다. 원자력 에너지가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청정한 에너지라는 환상이었는데요. 기후위기가 심각해지면서 탄소는 공공의 적이 되었고, 원자력 에너지는 많은 사고와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친환경의 이름표를 달게 되었다고 합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지만 새삼 놀라웠던 건 원자력 에너지도 결코 탄소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었어요. 발전소를 건설하는 데에 많은 화석연료가 사용되기 때문이죠. 여기에 핵 폐기물 문제와 사고가 발생했을 때 유출되는 방사능 물질들까지 다 고려한다면 원자력 에너지는 절대 친환경 에너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을 높인다면, 안전성을 높인다면 원자력 에너지가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바로 신학적 환상이라고 합니다.
다음으로는 이러한 환상에 맞서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들을 수 있었는데요. 이유는 그것이 가진 폭력성이었습니다. 신학적 환상은 현상들의 원인과 해결을 현실 바깥에서 구하는데, 이러한 사고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폭력적이라고 합니다. 함대에게 복 받은 출발이 주어지기 위해 이피게네이아의 피가 제단에 뿌려져야 했던 것처럼 말이죠. 원자력 시대의 이피게네이아는 누구이고 함대는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이어졌습니다. 이 시대의 이피게네이아는 피폭 생존자들, 핵실험장으로 이용되는 섬, 바다, 사막, 그리고 그 곳의 생물들, 강대국의 폐기물을 떠안게 된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의 국가들이며, 밤을 밝히는 산업의 빛이 함대라고 합니다. 함대는 늘 우리 주변에서 밝게 빛나고 있지만 이피게네이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커지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함대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니카자와 신이치와 고구분 고이치로의 대담집 <철학의 자연>을 인용해 설명해 주셨는데요.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과 증여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증여적 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함대를 나아가게 하고자 하는 힘이라고 합니다. 태양의 증여에서 벗어나, 스스로 태양을 갖고자 하는 열망. 이 열망은 현재를 결여된 상태로 여기게 하면서 거짓된 무한의 관념을 심어놓는 메커니즘으로 그 힘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는 이러한 거짓된 무한에 자연학으로 맞섰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자연학에 관한 부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요. 원자들, 허공의 존재와 그 운동만이 영원하고 무한하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 영속성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거짓된 무한이라는 것. 우리의 삶은 물론 산과 바다, 신까지 다 필멸의 것이라는 점. 그리고 폐허 역시 유한하다는 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필멸의 존재라는 사실이 ‘어차피 우린 다 죽어’의 논리로 빠지지 않고, 폐허 위에 싹을 피워내는 힘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도 생겼습니다. 우리의 존재는 사라지게 되더라도 원자들과 그 운동은 영속한다는 것이 답이 될 수 있을까요? 어렵네요! 마지막 강의도 기대가 됩니다.
민호샘 강의 내용을 정리 쌈박하게 잘 해주시니 강의 못들은 아쉬움이 조금이나마 상쇄되는 거 같아요.
루크레티우스가 싸운 신화적 환상에서 원자력의 위선과 폭력성을 읽어내고 허무를 극복하는 힘으로까지^^
이피게네이아, 함대. 약자의 희생과 강자의 폭력성. 비유 좋네요. 잘 생각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우린 다 죽어'의 논리, 허무주의의 논리를 넘어가는 길은 우리 시대에 요구되는 가장 중요하고도 어려운 기술인 것 같습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그 기술을 연마하는 일 외에 더 중요한 목표를 갖고 있을까요? 헤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