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후기
Seminar Boa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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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왜 공부하는가?
저희 세미나 이름이 [철학하는 일요일]인데요, 지금 하고 있는 행위로 자신을 규정한다면 일요일엔 우리도 철학하는 자라고 해도 될지ㅎㅎ;; 지난 학기 샘들이 올려주신 후기를 읽으면서 ‘배움’에 대한 열의가 막 느껴져 설렘 충만~~ 막상 제 차례가 되니… ‘철학한다는 게 뭐지?’라는 질문에 평소보다 머리를 많이 쥐어 뜯고 있습니다! 지난 학기에 채운 샘은 ‘철학은 개념의 놀이이며, 자기가 개념 자체를 발명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라고 하셨는데요. 저희 공부는 이미 규정된 개념을 학습하기보다는, 어떤 개념이 논리화 되어가는 과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의미로 이해해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머릿속에 역사적 시공간 지도로 새겨 놓은 길이 필요한데, 이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유동해왔는지 공간적 감각을 가지고 역사와 철학을 보는 게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돌아서면 가물가물 리셋되는 강의 내용을 어찌 몸에 새겨볼까 궁리하다… 20부작 역사철학 드라마(feat.주공♡공자)라고 상상 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이 드라마의 콘셉트에서 확실한 원칙은 확실성에 대한 경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당연한 개념들 중 어떤 것도 처음부터 확실하게 있었던 게 아니었죠. 그것을 요청하게 된 조건에 따라 그것이 개념의 형태로 점점 선명해지는 맥락화되는 과정을 보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문명의 시작에서 동서양의 차이를 정답처럼 딱딱 분류하기보다, 애매하고 모호한 경계에서 따로 또 같이 변천해 온 지금의 우리를 이해해 보라는 채운샘의 디렉팅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철학의 시작은 무엇이었을까요? 인류의 정신·문명사적 모든 기틀이 마련된 축의 시대 인간들은 다 '어떻게 배움을 향한 운동을 시작할 것인가'로부터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배움의 운동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배움 그 자체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요? [축의 시대] 머리말에서 카렌 암스트롱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축의 시대 현자들은 제자들이 유익한 가르침을 얻어 정신이 고양되는 느낌을 약간 맛 본 뒤 새로 힘을 얻어 평소의 자기 중심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목적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인간을 창조하는 것… 공감과 자비의 영성을… 모든 존재의 신성한 권리를 존중하는 것… 축의 시대 현자들은 목가적인 환경에서 자비의 윤리를 창조한 것이 아니다… 폭력과 전쟁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발전해 나갔다… 이 시기에 창조된 모든 위대한 전통은 자선과 자비가 가장 중요하다는 일치된 결론…”
모든 존재는 서로의 연결 고리로써 상호영향 아래 있지만, 모두 다르게 겪고 다르게 경험하고 다르게 느낍니다. 어떤 삶의 비전 속에 있느냐에 따라 자기 시대의 문제를 이용해 사적 이익을 축적하는 이도 있고, 시대의 문제를 통해 자비의 윤리를 창조하는 이도 있다는 겁니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 전혀 다르고, 문제가 다르기 때문에 해(解)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자기 시대를 어떻게 문제화 하느냐 그것을 배우는 것, 그것을 향해 우리 배움의 여정은 시작된 것일까요? 우선 저는 ‘자선과 자비’ 라는 말을, 국가 제도와 세속화된 종교로부터 구출하여 처음부터 다시 배워 나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자비의 윤리, 그 효과의 일부로서 각자의 윤리를 창조하는 자를 목표로, 샘들과 함께 [철학하는 일요일] 공부를 이어가고 싶습니다!
- 군자의 길 : 호학好學
플라톤은 [향연]에서 지혜에 대한 이끌림이 에로스이며, 지적 승화된 에로스(필라소피)와 이행의 과정으로서 사유를 정의하면서 철학자를 '무지에서 지'로의 '중간자, 이행자'로 라고 규정합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한자 문화권에서는 어떤 규정이 있을까요? 보통 그리스적 철학자를 ‘현자’라고 할 때 동아시아에서는 현자를 덕을 포함한 능력이 있는 자를 말하기 때문에, 서양의 필로소퍼에 가장 가까운 말은… ‘호학자(好學子)’! 공자님은 스스로를 ‘호학자’라고 규정하셨는데, 채운샘은 ‘好學’과 번역어인 철학이 가장 상통한다고 ‘好學’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시며, 사우(師友)들을 향한 복잡한 심정을 다독이신 것 같습니다. “공부는 좋아해야 하는 것, 배우기를 좋아해야 하는 것, 어떤 것을 새롭게 만나서 그것들에 의해 기존의 생각이 흔들리고, 알면 알수록 더 모른다는 미궁에 빠지는 느낌 그리고 더 알아야 될 게 많이 생기는 데서 오는 막막함, 이런 것들을 무릅쓰고 배우고자 하는 게 好學이며, 이것이 공부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이 배움을 멈추지 않고 가겠다는 것이 도(道)이며, 성리학자들은 배움에 있어서 성인을 목표로 자기 스스로 변환시킬 마음을 내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죠. 주역에서는 성인聖人(≒대인大人)을 천지와 소통하는, 우주 자연 질서에 부합하는, 때에 맞게 살아가는 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성인이 통찰한 이치를 해석하는 자가 바로 ‘군자(君子)’입니다. 그러니 성인의 이치를 부단히 배우고, 그 배움을 바탕으로 어떤 사안에 관련 지어 문제를 붙들고 해석하는 한에서 우리도 ‘군자의 길’을 가는 것! 불교에서는 배움을 향한 여정을 나서는 것을 ‘발심’, 출리심‘이라고 하는데, 이는 단순히 맘먹는 것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의 방식을 끊어내는 결단을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습관의 노예요, 99% 자기가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가기 때문이죠. 살아온 대로 살아가는 이 길을 조금이라도 비틀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자기 전생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 그렇다면 '해석자로서 군자‘에게 앎과 배움이란 무엇인지 좀더 이야기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 배움을 향한 모름과 앎의 운동
저에게는 여전히 배움에 덧씌워진 이미지가 있습니다. 뭔가를 못하는 것에서 잘하는 상태, 안개 같은 ‘모름’에서 명확한 ‘앎’에 도달하는 어떤 이미지. 또 많이 배우면 못하던 걸 척척 잘하고, 어려운 개념도 쏙쏙 알아듣고, 술술 꿰어서 조리있게 글도 쓰고 말도 잘 하고… 이런 상태를 꿈꾸는 것의 함정은 배움은 수단이고 앎은 목적이 된다는 것이죠. ‘앎’과 ‘배움’의 관계에서 이렇게 ‘앎’을 ‘배움’의 결과로 생각하기 쉬운데, 앎은 도중에 얻는 열매와 같은 것이라고 채운샘은 말하십니다. 이 비유를 이해해 보면, 배움의 과정에서 얻은 ‘앎’이란 자신이 소화할 수 있는 것 만큼이 자신의 것이고, 남은 질문은 다시 배움의 과정으로 심어져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는 의미이지 않을까. 그런 의미의 앎은 매순간 관계적 삶으로 연결된 우리에게 실천적 윤리와 정치적 문제와 연관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채운샘은 들뢰즈의 재현 개념을 빌어 우리가 ‘앎’을 명제 형태로, 마치 답안지처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지 돌아보라고 합니다. ‘배우고 수시로 익히는 게 기쁨이다’ 라는 말씀은 1차적으로 공자님이 삶에서 체득한 통찰로서 앎이죠. 열매로 남겨진 이 텍스트를 읽고 ‘음, 좋은 말씀이구나~’ 라고 뭔가 느끼고 감동하는 것은 소문난 맛집 맛평가와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책을 읽고 ‘누가 무슨 말은 했다, 이 개념은 무엇이다’ 라고 그 뜻을 설명할 수 있기만 해도 저는 좋을 것 같은데요. ‘공자님이 이런 좋은 말씀을 하셨어~’라는 방식으로 기억에 저장한 지식을 머릿속에서 되새기는 것이 왜 배움도 과정으로써 앎도 아닐까요? 이러한 재현적 지식을 정답으로 소유하면, 무조건 옳은 것, 당위로 받아들기 때문에 삶에서 작동되지 못하고 자기 변환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인의 말씀을 좋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실천하면서 살기는 힘들다…’ 라고 변명을 너무나 당당하게 해 온 것은 아닌가. 난 여전히 무지한데 뻔뻔하기까지 한 것은 아닌가…
좋은 말씀을 우선 차곡차곡 저축하면 언젠가 시간 여유가 될 때 연금이 꼬박꼬박 나오듯 실천도 자동으로 되고 좋은 삶은 보장! 이런 것을 꿈꾸고 있는 것 아니었는지. 마치 공부를 금융상품처럼 취급한 것은 아닌가 스스로 매우 찔립니다. 어쩌면 호학자의 출발은 정직성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들은 다 아는 것 같은 데 나만 모르고 있는 것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나 당연히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하나 붙들고 솔직하게 묻고 끝까지 답해보기! 예를 들어, 좋은 말을 안다는 것은 그 말에 담긴 좋음을 아는 것이죠. 그렇다면 그 좋음을 안다는 것과 자기 삶이 그 좋음을 구현하는 것과 분리될 수 있을까? 좋음을 아는 데, 넘 좋아서 금송아지처럼 집에 꽁꽁 숨겨두었다면 그것은 아직 모르는 것이지 않을까… 계속 생각해 보자구요!
그래서 ‘앎’이 자기 질문이 되었을 때 비로소 배움이 시작됩니다. ‘나는 노는 게 기쁜데 도대체 공부에 무슨 기쁨이 있다는 거야? 공부의 기쁨과 노는 데서 오는 기쁨은 다른 건가? 같은 건가? 뭐가 다르지? 이런 방식으로 자기 문제화로부터 그 의미를 스스로 풀어가고 터득해 갈 때, 텍스트의 한 구절을 자기 삶에 닥친 인생의 전환점이자, 자기 인생의 사건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앎’과 ‘배움’의 관계에서 근본적인 질문은 누구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고민의 절실함과 정직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이 말을 이해한다면, 우리가 답을 요구하지 않고 문제를 살고 문제를 겪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배움’은 ‘기쁨’의 열매가 될 거라 믿습니다. 그래서 배움이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활동이고, 공동체 안에서 자기 배려와 타자와 공존하는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는 채운 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데, 그 의미를 곱씹어 보게 됩니다. 소박한 자기 질문 하나도 타자로부터 시작되었듯, 우리가 다시 타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은 답이 아니라 질문일 것입니다. 나의 좋음과 너의 좋음이 다른데,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한 좋음은 어떻게 구성해 나가야 할까? 이와 같은 질문의 형식으로 우리는 서로의 배움을 추동하게 되지 않을까요? 그러니 우리에게 좋음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과 배움의 과정은 분리될 수 없을 겁니다.
미리 주어진 답이 있다는 전제에서는 이 배움의 운동은 나아가지 못합니다. 지난 후기에 규창샘이 ‘공부를 가지고 많은 것들을 실험할 수 있으니 공부를 계속하고 있다’ 고 쓰셨더라고요. 공부가 기존에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들의 이미지 틀을 하나하나 지워나가게 하고, 다시 새롭게 의미화하는 과정으로 작동된다면 사유의 실험이 됩니다. 또 공부하는 사람들과 실천적 윤리를 함께 도모하는 것으로 나아간다면 삶의 실험도 됩니다. 그 과정에서 얻는 기쁨이 실험으로써 공부를 계속 추동한다면, 공부함에 있어 어떤 마음과 어떤 목표를 가져야 할지 스스로 묻고 답해 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 공자의 영원한 유토피아, 주(周)를 찾아서 (프리퀄)
영화가 끝나고 해석을 통해 영화는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역사도 어떤 문제의식 속에서 보느냐에 따라 기록자의 해석과 독해자의 해석 사이에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넵니다. 채운샘의 강의안과 강의가 마치 영화의 몽타주 편집같이 흥미진진~~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고, 어떻게 계열화시켜 의미가 만들어지는 매우 꿀잼~~ 암기를 포기하니 더 꿀잼! 우선 저에게 정치 이념은 고대의 야만성에서 현대의 합리성으로의 진보라는, 성장 담론과 기본 셋팅을 함께 하죠. 여기서 합리성이란 제도와 법의 체계화 같은 시스템이 갖춰지면 정치는 잘 돌아갈 거라는 막연한 믿음과 다르지 않으니, 부조리한 세태에 대해 시스템, 아니면 거기서 벗어난 사람을 비판하는 것에서 끝납니다. 이런 태도의 문제는 시스템과 규범만을 계속 요구, 강요하는데, 본질적인 인간에 대한 마음, 믿음이 개입될 여지가 없죠.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을 개입시키지 않는 것이 공정하다는 생각마저 있었는데… 그래서 ‘민심이 천심’이라는 말이 너무나 새롭게 들렸습니다.
요임금에게는 권력에 대한 사심없음, 순임금에게는 가장 가까운 부모형제에게 정성을 다하는 마음(자신을 계속 죽이려 하지만 끝까지 살아남아 아버지와 이복동생을 살인자로 만들지 않기), 우임금에게는 부지런히 발로 뛰는 근면성실. 이와 같은 미덕의 이미지가 여러 층위로 쌓여서 주(周)나라의 설계자 주공에게 ‘덕치’로 개념화되고, 공자에겐 ‘예치’, 맹자에게는 ‘인정’이라는 개념으로 확립됩니다. 덕치,예치의 본질은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점에서 너무나 급진적이죠.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정의’의 상징으로 권력자는 제우스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그 이미지의 효과를 얻습니다. 반면 은나라 탕왕때부터 왕은 권력을 하늘의 뜻(천명)에 일치시키고, 형벌을 줄이고, 훌륭한 사람을 등용하여 여러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통치의 최소화가 권력의 미덕이었습니다. 주공은 그것을 이어받고 훨씬 더 급진적으로 나아갔습니다. 천명은 왕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백성 모두에게 주어졌으며, 하늘은 백성들의 고통을 가엾게 여기기 때문에, 왕은 덕으로 행하고 백성을 억압하면 안 된다는 통치 논리를 펼쳤습니다.
제정일치 사회를 미개한 미신의 시대라고 생각했을 때, 볼 수 없었던 ‘천명’이 이제야 보입니다. 어쩌면 제정일치 사회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안다는 것, 배운다는 것, 개체가 삶을 산다는 것’이 분리되지 않은 시대이지 않았을까. 들소와 내가 천지 사이에서 만나 함께 같은 별을 보면서 온전한 마음을 나눌 수 있었던 시대, 자비의 윤리가 모든 존재에 내재했던 시대가 끝난 것이 아니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기도와 배움이 이어지는 한 하늘이 감응해줄 거라고… 우리의 배움도 그러하길… 하늘의 마음을 아는 것, 만물에 하늘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아는 것, 그것은 자비의 윤리를 자기 삶의 실천적 윤리로 구성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천명’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질문하면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배움의 여정을 함께 이어 가기를 바라며… 늦은 후기를 이상 마칩니다. 우리 모두 힘내요~~o(* ̄▽ ̄*)ブ
덕치와 예치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배움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새삼 마음 깊게 다가왔습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생명을 귀하게 여기고 우주 만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천명이라는 고대 사람들의 마음을 잘 배워서 천명을 잊지 말고 살아야겠다 생각이 드네요.. 이제까지 나는 누구의 명을 받들고 살고 있나 생각해보면 자본의 흐름에 울고 웃었던거 같습니다. 이럴때 천명이라는 게 더욱 깊게 마음을 찌르는 것 같습니다. 나눔이 다소 아쉬운 공부이지만 이럴때일수록 후기를 꼼꼼히 잘 들여다봐야겠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첫 시간에 동양에서는 철학이 통치와 따로 분리되지 않고 발전해왔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러고 보면 우리가 철학이란 걸 따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삶 속에 녹아들어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기에 주공은 통치의 근본을 덕치와 예치를 근본으로 삼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기도 했구요. 인영 샘이 후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윤리, 자비 이런 말이 새롭게 다가오네요. 군자라면 이런 것을 공부의 토대로 삼아야겠죠. 지금 시대의 대중(군자)도 다르지 않아야겠죠^^ (제가 다른 일정 때문에 거절한 후기 잘 읽고 갑니다^^)
성실한 후기로군요! 첫 시간의 내용을 다시 짚으면서 왜 지금 우리가 고대 중국의 사상을 공부하는지, '동양 철학'이란 익숙한 말에 어떤 생각이 전제돼 있는지 등은 동아시아권에서 살아가는 저희에게 꼭 생각해 봐야 할 지점이기도 하죠. 뿐만 아니라 배움에 대한 욕구가 자신을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싶은 탐욕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면, 아무리 훌륭한 텍스트를 접하고 그럴듯한 말들을 내뱉는다 해도 결코 '배우는 것'일 수 없다는 것도 계속 품어야 할 것 같아요. 고대의 사유는 자기 혼자만의 만족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정치적이며, 삶의 변형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종교적이고, 앎과 무지의 경계를 끊임없이 갱신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죠. 시대는 다르지만, 지금 저희도 그런 태도로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기를! 그런 마음이 드는 후기였습니다. 다만.... 좀 과합니다! ㅋㅋ 다음 후기는 좀 더 편하게 쓰시면 좋겠습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