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人)의 마음과 예(禮)라는 형식
八佾(팔일)편을 배웠습니다. 넘의 나라의 제사, 게다가 오래돼버린 쓸모없는 예법으로만 들렸던 八佾(팔일)편 이야기들에 마음이 동해 의아했습니다. 八佾(팔일)편을 재밌게 들은만큼 시간을 두고 생각할 거리가 많았는데요. 특히 천자(天子)나 추게 하는 팔일무(八佾舞)를 대부로서 자신의 뜰에서 추게 한 계씨에 대한 공자님의 한탄에는 한 주 내내 마음이 가 있습니다. 전에는 ‘공자님과 같은 성인이 안타까워하시니 계씨가 잘못했네’ 하면서 1장을 휙 넘어갔지요.
“천자(天子)의 팔일무(八佾舞)를 자신의 뜰에서 춤추게 하니, 내가 이런 짓도 참아내는데 무슨 짓인들 참지 못하겠는가!”, “八佾舞於庭,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이지 외 2인 『논어』, 이영호, 궁리, 69쪽) 공자님의 탄식에 공감하게 되는 제 마음의 정체가 궁금했습니다. 누군가를 지적질하고 싶은 마음이 동한 건가,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른 것이 못마땅한 마음인가. 이런 생각에 미치자 조심스러웠지만 여전히 계씨의 행동이 저에겐 문제가 되었습니다. 강의를 들으면서는 계씨를 향해 ‘격에 맞지 않아’라고 단정했는데, 이 ‘격’을 제 스스로 풀기가 어려웠습니다. 이 ‘격’이란 말은 저의 불쾌한 감정을 계씨에게 휘두르는 수단일 뿐, 그것을 넘어서지 못했지요.
佾은 춤이란 뜻을 지닌 글자입니다. 八佾은 팔자형의 춤이구요. 팔일무(八佾舞)는 나라의 제사 때 64명이 8열로 정렬해 추던 춤인데요. 여기서 佾(일)은 열을 나타내며 8일무는 천자(天子)일 경우에 추게 할 수 있는 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대부인 계씨가 자신의 집 뜰에서 8일무를 추게 한 것이지요. 4일무를 출 수 있는 대부가 8일무를 춘 것에 공자님이 평을 하시는데 그것이 八佾(팔일)편의 1장 내용입니다. 제사와 그에 따른 춤과 대형 등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형식이란 것이 1장을 읽다보니 중요해 보였습니다.
“繪事後素”(八佾편 8장), 여기에서 禮(예)는 형식으로 근본 바탕인 마음의 뒤에 위치시키는 것으로 보면 좋다고 채운샘은 설명하셨습니다. 1장에서는 계씨의 마음이 결국은 격에 맞지 않는 8일무라는 형식으로 드러났다고 여겨집니다. 계씨는 하고자 하는 바를 했을 뿐이고 그것을 취할만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씨가 취한 8일무란 그가 놓여있던 대부라는 위치를 천자보다 못한 것으로 우습게 여기는 맘의 발로처럼 보입니다. 8일무를 원하는 그의 마음에서 왜소함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 격이나 형식을 들이대는 제 마음에서는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구요. 제가 계씨에게 들이대는 형식에서 자꾸만 누군가가 하고자 하는 바를 뒤틀고 억압하면서 한 방향으로만 이끌고자 하는 힘이 느껴집니다. 그것은 부와 명예, 권력을 쥔 주류의 언어에 복무하고 주어진 것을 받아들이도록 하는 힘과 일맥상통해 보입니다. 형식과 관계하는 저의 방식을 보면서 禮라는 형식이 마음과 선후를 따져 뒤에 놓이는 것으로 위치 지어진 것에 괜히 안도를 하게 됩니다. 채운샘이 이런 뜻으로 설명하신 것은 아니시지만.
공자 “사람이 인(仁)하지 못하다면 예의가 무슨 소용이며, 사람이 인하지 못하다면 음악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子曰 “人而不仁, 如禮何? 人而不仁, 如樂何?” (위의 책, 70쪽)
팔일(八佾)편 3장입니다. 채운샘이 팔일(八佾)편에서 한 장을 고르라면 3장을 들 수 있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알아두면 좋은 문형이 나오는 대목입니다. 사람이고서 ~하지 않으면, 사람으로서 ~하지 않으면 이라는 뜻을 지닌 ‘人而不~’가 두 번 반복되고 있지요. “人而不仁(사람으로서 인하지 못하다면)”에서 仁(인)의 뜻을 ‘예(禮), 악(樂)’과의 관계 속에서 배웠습니다. 예와 악은 인을 근본으로 하는 형식이며 양식이나 스타일로서, 인이라는 마음이 다듬어져 드러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비추어 계씨와 관련해서 팔일무(八佾舞)라는 예와 악의 형식을 생각해 봅니다. ‘제례가 행해질 때 화합하고 정화하는 수단’이었는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계씨에게 예악은 어떤 수단이었을까요?
공자님이 말씀하시는 이 仁(인)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데요. 이번에 채운샘은 ‘감응할 수 있는 능력과 통할 수 있는 존재의 범위, affection’으로 설명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감응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도 재단하느라 어려움을 겪는데 천지자연에 통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귀신까지?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인 귀신을 논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목소리를 갖지 않은 존재, 떠도는 유령과 같은 존재로서 귀신을 설명하셨습니다. 이런 존재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마음으로서 인(仁)의 마음을 설명하셨습니다. 귀신을 통해 죽어간 존재(작년 청지에서 한 ‘애도’에 관한 세미나가 떠오르네요), 혹은 시대마다 목소리를 갖지 못하고 떠도는 이들, 예를 들면 난민이나 동물 등을 떠올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어디까지 철학적 담론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 채운샘은 물으셨습니다. 공부의 한계를 짚어지는 것 같아 혼자 괜히 뜨끔했습니다.
계씨가 자기 시대에 목소리를 갖지 않은 존재들과 감응할 수 있었다면 팔일무(八佾舞)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요? 대부이기에 어쩌면 더 들을 수 있는 것들이 많았을텐데요. 오히려 그의 접속 의지는 천자(天子)만을 향해 있었던 듯 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에 의지해 살아갑니다. 우리의 볼 수 없음과 들을 수 없음을 잊지 않을 수 있을까요?
계씨의 팔일무를 두고 계씨의 마음과 공자님의 마음을 읽어내셨군요. ㅎ "회사후소"에서 진실한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만 생각했는데, 드러나는 예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역으로 읽어낼 수 있다는 식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네요. 과연 다른 존재들과 감응하는 마음인지, 자기 자신에게 갇힌 마음인지 매순간 드러난다는 점에서 '예'라는 게 참 무서운 형식인 것 같아요. 지금 시대에 가져와서, 우리 또한 계씨와 같은 마음인지 아닌지, 곧 우리의 철학이 계씨와 같은 것인지 아닌지 살펴볼 필요가 있겠죠. 긴장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