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일요일 후기(20230618일자 강의 – 마주침의 유물론:에피쿠로스학파)
에피쿠로스학파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이 ‘거짓된 무한’에 대한 자각이다.
인간사의 가장 중요한 사건, 하나는 죽도록 갈구되고 하나는 죽도록 회피되는, 사랑과 죽음.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자신의 정념에 의견을 덧씌워 사랑을 영원화하고 영원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내어주듯, 죽음을 감수하지 못하는 이들은 ‘삶’이라는 표상에 사로잡혀 죽음 이후의 세계를 갈구하고 스스로의 상상으로 빚어낸 초월자의 약속에 구속된다. 사랑과 죽음, 이것의 문제는 하나다. 유한한 인간이 끝내 유한성을 직시하지 못하고 거짓된 무한(영원)을 갈구한다는 점이다. 에피쿠로스학파가 우리에게 촉구하는 것은 이 ‘거짓된 무한’에 대한 자각이다. 모든 것은 생성하고 소멸한다. 그 세계를 살아가는 나의 몸, 나의 마음으로부터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한시도 고개를 돌리는 법이 없다. 이들을 통해 생성하고 소멸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 역동적 세계에서 ‘모든 것은 헛되다’라고 결론짓지 않고 자신의 욕망과 행위에 대해 왜 끊임없이 성찰해야 하는가 라는 윤리적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에피쿠로스 학파
아테네에 건물을 세우고 정원을 만들어 사람들의 신분을 가리지 않고 철학하기를 권유했던 에피쿠로스(b.c.342~271). 그가 만든 정원학파는 우정에 기반한 공동체적 유대을 다지며 엄격한 교의를 전수하고 연마했다고 전해진다. 에피쿠로스의 철학은 크게 규준(진리의 기준이나 근본 원리, 인식론)에 관한 것, 자연학(사물의 생성과 소멸 및 자연 전반, 존재론)에 관한 것, 윤리학(인생의 목적이나 방식,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으로 분류된다. 이 담론은 ‘행복한 삶’을 위한 실천철학의 성격을 띤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반드시 철학이 필요하다고 봤다. 이 때의 행복은 ‘쾌락’이라기 보다 ‘자족’에 가까운 말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수련을 통해 ‘자기 자신’에게 이를 것인가. 이를 위한 구체적인 기술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에피쿠로스학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에피쿠로스학파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에피쿠로스학파를 단순히 ‘쾌락’으로 규정할 경우 중요한 부분이 누락될 수 있다. 알튀세르라는 철학자는 에피쿠로스를 경유하여 ‘마주침의 유물론’에 이르렀다. 그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다. 관념론자는 출발역과 도착역을 처음부터 아는 사람 즉 여정의 목적과 기원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고, 유물론자는 달리는 기차에 올라탄 사람이라고 했다. “예기치 않게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에, 그것들을 예견하지 못한 채 끼어들고, 기차에 관해 그리고 여객들과 창밖에 펼쳐지는 풍경에 관해 무한한 정보와 관찰을 모으는” 우발적인 마주침들의 기록자다. 이들은 정신, 사유 발생의 근거를 몸, 경험, 신체성에 둔다.
에피쿠로스주의자에게 진리를 판단하는 출발점은 감각이다.
감각이란 참된 것을 탐구하는 길로 인도하는 안내자로서, 감각에는 쾌/불쾌라는 감정이 동반된다. 또한 비슷한 특질을 포함하는 개별 대상을 반복적으로 지각할 때 선개념(prolepsis)이 형성되는데 이 세 가지(감각, 감정, 선개념)와 감각으로 지각하기에 미세한 것들(신들, 원자들)에 대한 직접적 사유가 진리의 기준이다. 감각은 상황마다 참되게 인식한다. 서로 다른 다양한 감각적 인상들을 참된 형상으로 형식화하여 일관되게 소개하고, 감각적 속임수를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하는 게 이성이다. 이성은 대상을 선개념으로 환원하며, 대상이 선개념과 상응할 때 ‘판단’이 이루어진다. 또한 ‘신들, 원자들’에 대한 직접적 사유는 판단행위에 앞서 전개되고 감각이 수용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그 형상을 직접적으로 수용한다. (이상 수업 강의록 요약이었습니다.)
다음 시간에 에피쿠로스학파의 다른 측면을 더 배우겠지만, 이번 수업에서는 관념론자와 유물론자의 비교를 통해 ‘진리의 기준이 다를 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진리를 판단하는 출발점으로써 감각을 부정하지 않고, 감각의 다양한 측면을 이성을 통해 통합하며, 달리는 기차에 올라타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진리 판단의 출발점으로서 감각이 중요하며, 오히려 이성(의식)이 우리의 감각을 왜곡하고 오류를 발생시키는 원인일 수 있다는 부분에서 스피노자가 떠올랐습니다. 강의 시간에도 채운쌤께서 말씀하셨지만, 태양이 500 걸음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데는 어떤 오류도 없죠. 그걸 실제로 500 걸음 떨어져 있다고 판단하고 선개념을 형성하는 데서부터 오류가 발생하죠. 왜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되는지 생각할 수 있었고, 확실히 철학의 목표는 우리의 편견을 바로잡는 데 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감각을 다양하게 활성화시키기! 다양한 기예를 발명하기! 철학에 신체성이 확 부여된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