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학파의 마주침의 유물론
“우리는 원한 적 없으나 원해서 여기에 이르렀고, 원하지 않은채로 가다보면 어느새 우리가 원하는 곳에 이르게 되리라”
대부분의 종교와 철학이 삶, 죽음의 존재를 사유하는 명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원초적 무의식의 세계에서 시작한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감각에 대한 신뢰에서 출발해 무의식과 의식이 합치되는 지점까지 내려간다. 인식과 현실(reality)의 동일성이 만나는 지점을 사유하고 스 바탕에서 자기단련과 실천적 앎을 강조하는 행복의 쾌락주의자(?)로 나아가는 것일까? 삶의 긍정의 바탕위에서.
에피쿠로스학파 에게는, 인간은 자연 속에서 운동하는 우발적인 마주침이 자신에게 새겨지는 기록 자체일 뿐이다. 그리하여 ‘내가 이 모든 것을 원했노라’라고 말할수 있게 되는 지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은 우연에 내 맞기는 우연 결정론이 아니라, 내 뜻과 무관한 우연이며 원자 자체에 내재하는 자기 의지가 깃들어 있다는 것이다. 원자적 의식 차원에서는 갈애, 갈망, 회피는 단편적인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자연주의는 감각을 신뢰의 출발점으로 삼는다. 현상들과 부합되는 모든 인과성 방식들을 수용한다. 감각은 이성적 추론을 포함하지 않고 기억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신이나 다른것에 의해서도 작용을 받지 않는다. 자연은 부분들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새로워지는 총체다. ‘연결, 밀도, 충격, 만남, 운동을 통해 모든 사물이 형성된다’ ‘주체를 자유로운 주체로 변형시킨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원자는 더 쪼갤수 없는 근원으로서 생성, 소멸을 반복하며 무한히 사물들을 발생시킨다. 사물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물체들의 운동을 가능하게 하는 허공의 개념이 필요하다. 또한 원자의 운동 방향에 대한 본원적 결정, 운동과 운동 방향의 종합인 clinamen (편위)의 개념이 만들어 진다. 이는 인과적 계열들 사이의 만남에 대한 결정이며 원자의 운동에 의해 구성되면서 자신의 완전한 독립성을 보존한다고 볼수 있다. 원자 운동의 자기 내재적 원인은 모든 생성의 내재된 본질이다. 편위는 우리의 삶을 양식화 할 때 모든 존재에 내재한 생성의 힘, 즉, 자유의 문제를 제기한다.
직선의 현존재 안에서 잃어 버리는 자신의 개별성의 직접적 부정. 편위는 맞서 싸우고 저항 할수 있는 원자의 가슴속에 있는 어떤 것이다. 저항과 경쟁의 심장 깊은곳에서 내적 찢어짐, 원자가 자신의 전제로부터 벗어나 질적 본성이 박탈로 전제와 내용을 상실하고 자신의 고유한 질을 나타내게 된다
막스가 보기에 clinamen 이란 총체화를 거부하는 특이적 본질이다. 정체성으로의 이탈, 자기 자신의 죽음이 개체의 실존을 보증하는 것으로서의 clinamen 이다. 문제는 단순한 방향전환이나 일탈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의 차이를 생성 할수 있는 마주침이어야 한다. 無我의 깨달음과 동시에 자유의 지평이 열리듯.
알튀세르 역시 에피쿠로스를 경유하여 ‘마주침의 유물론’에 이른다. clinamen이 일으키는 원자의 빗나감/ 편차는 다른 원자와의 마주침을 유발한다. 마주침이 거듭되어 하나의 세계가 탄생한다. 우발적 빗나감이 세계의 기원이다.
왜 맑스와 알튀세르가 반할 수밖에 없었는지,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알겠더라고요. 행복, 쾌락, 자족... 이런 것을 사유하기 위해 존재론을 새롭게 써내려가는 작업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직선의 세계를 방해하는 우발적인 것의 개입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실 모든 건 우발적인 것 속에서 일정한 운동성을 형성할 수 있다는 사유는 어떤 근본적 전환이 일어난 결과 같았습니다. 질서의 부재로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의 창조적 기반으로서의 무질서. 이런 이야기를 중국의 사유와도 엮으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아, 이거 참 여러모로 끌리는 철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