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쾌락이 행복한 삶의 출발점이자 끝이라고 우리는 말한다. 쾌락이 원초적이고 타고날 때부터 좋은 것이라고 인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선택하거나 회피하는 모든 행위를 쾌락에서 시작하며, 우리의 쾌락 경험을 모든 좋은 것의 기준으로 사용하면서 쾌락으로 되돌아간다.” 쾌락의 추구와 고통의 회피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본성이라는 에피쿠로스의 메시지는 참 솔깃했다. 아 ... 나도 행복하고 싶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다! 오늘은 꿀팁을 얻어갈 수 있을까.
# 쾌락의 첫 번째 장애물: 헛된 의견
인간이 고통에 빠지고 행복하지 못하는 원인에 대해 에피쿠로스(bc. 342-271)는 인간의 헛된 의견에 주목한다. 그는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것, 자연스러우나 필연적이지는 않은 것, 자연스럽지도 필연적이지도 않은 것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먹고 싶고, 쉬고 싶고, 잠들고 싶고. 신체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이런 욕망은 자연적이며 더 나아가 필연적이다. 성욕? 이 역시 자연적인 욕망이다, 다만 필연적이지 않을 뿐. 이 모두는 “결여된 것의 충족이라기보다는 생의 원천적 에너지다.” 금욕하지 말고 마음껏 욕망하라! 쾌락을 추구하라!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긍정한다. 문제는 에피쿠로스가 분류한 세 번째 욕망이다. 그는 이 욕망에 대해 단호하게 경고하는데, 단순히 자연스럽지도 않고 필연적이지 않은 불필요한 욕망이어서만이 아니라 위험하기 때문이다.
목표 달성 시 맛본 순간의 짜릿함과 곧 찾아오는 공허의 끊임없는 순환, 아무리 채워도 허기가 가시지 않는 배고픔. 이 결핍감은 헛된 의견과 잉여적 욕망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간은, 특히 현대 자본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대부분은 인정 욕망, 지배욕, 명예욕, 부의 증식과 불멸에 대한 욕망 등에 의해 ‘훼손’되어 있다. 이 욕망은 지금 우리 시대, 아니 적어도 근대 이후의 인간에게서나 생겨난 것들인 줄만 알았는데, b.c. 4세기의 에피쿠로스가 이미 감지한 것을 보면 인간에게 탑재된 꽤나 오래된 욕망이었나 보다. 실체 없는 추상적인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려 온 역사가 이렇게 길었다니 ... 나 역시 이런 식의 고통의 실체가 무엇인지 늘 궁금했다. 아무리 고민하고 노력하고 심지어 목표 달성과 함께 성취감을 맛봐도 사라지지 않는 이 결핍감의 실체 말이다. 에피쿠로스에 따르면 이 욕망은 추상적이고 무제한적이다. 생명 자체를 위한 것도 아니요, 신체적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것도 아니며, 궁극적으로 이것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다. 특히 모든 것을 수로 환원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숫자 0이 계속 늘어나는 증식이 가져다주는 탐욕은 망상과 상상에서 만들어진 추상적인 욕망으로, 이는 무서운 것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런데도 인간은 이 이상한 표상에 사로잡혀 이것이 자신의 행복을 위한 것인 줄 착각하고, 무한한 증식과 결핍에 시달리며 헛된 욕망의 노예로 살아간다. 그나마 노예인 줄 알기라도 하면 다행인데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지 속에 날뛴다. 이 과도한 욕망이 그릇된 표상과 결합되어 모든 상황을 결여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내가 행복하지 않았다면 욕망을 채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욕망이 비구체적이고 한계선이 없었기 때문이구나 ...
# 쾌락의 두 번째 장애물: 신화적 환상
쾌락의 두 번째 장애물은 신화적 환상이다. 어떤 행복이 주어지면 그것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 행복의 끝을 고통으로 간주하며, 처벌이 그 고통의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사고 메커니즘. 이것의 역사 또한 길다. 에피쿠로스는 당대 대중 종교를 비판하면서, 그 속에 내재된 신화적 환상, 즉 “지속의 욕망과 중단의 불안”이라는 인간의 심리를 포착한다. 인간이 욕심을 가지고 있는 한 불안은 사라지지 않는데, 이게 바로 탐욕이고 종교가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는 것.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자연의 존재론에 입각해서 인간의 이러한 망상을 하나하나 파헤친다.
우선 인간의 호의에 좌우되어, 화를 내고 고통스러워하고 미워한다면, 그런 존재가 신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러한 신은 인간의 잘못된 표상에 의해 구성된 신이다. 신은 “그 스스로 어떤 고통도 모르며, 다른 것들에게 고통을 주지도 않고, 분노나 호의에 종속되지 않는다.” 즉 신은 “자신의 생성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늘 그 상태로 완전하게 행복하다.” 그러니까 에피쿠로스가 거부한 것은 대중들의 신 자체가 아니라, 신들을 인간의 욕망과 견해에 따라 ‘신화화’하는 것과 신들에게 대중들의 견해를 귀속시키는 불경한 자들이었다. “우리에게 상벌을 내리는 식으로 개입하는 ‘권능적 신’의 표상”이 아닌 “인간의 모든 정념에서 자유로운 완전한 아타락시아”이라면, 에피쿠로스는 “탁월한 본성의 존재에게 호혜적 관계없이 자발적으로 경의를 표하는 이성적 숭배”를 바치면서 그와 동일한 기쁨에 도달하고자 한다.
요컨대 인간의 불행은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환상과 맹목적 신앙, 공포, 죽음에의 두려움 등 ‘영혼의 혼탁’(불안)을 이루는 모든 것”이다. “죽기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죽음을 자연법칙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변하기 때문에 허무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이 무심한 유한성을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의 나락에 빠지는 것이다.” 신의 처벌에 대한 공포에 시달리는 자체가 이미 지옥인 걸 우리는 안다. 지금 어떻게 기쁘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는 제쳐둔 채 내가 지금 여전히 신화화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처방전: 자족과 우정
헛된 의견과 신화적 환상에 사로잡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 오늘을 살지 못하는 인간을 위한 에피쿠로스의 처방.
첫째는 자족이다. “결핍의 고통을 모두 제거했을 때, 단순한 맛이 우리에게 부자의 식사와 같은 쾌락을 준다. 필요한 사람이 빵과 물을 섭취할 때 최고의 쾌락이 생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사치스러운 것과 생활하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을 구분하면서 욕망을 조절할 때에만, 즉 “사려를 통해 선택과 회피를 정확하게 판단하는 기술”을 획득하여, 충족시킬 수 없는 욕망으로 괴로워하지 않는 자만이 제대로 행복할 수 있다. “간소하고 사치스럽지 않은 생활방식에 익숙해지는 것은 건강을 완전하게 하며, 생활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에 대해 그 사람이 주저하지 않게 만든다. 그리고 이따금 우리가 사치스러운 것들과 마주쳤을 때 우리를 강하게 만들며, 우리가 행운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들어준다.”
둘째는 우정이다. 에피쿠로스 역시 영혼의 평안과 스스로의 구원에 전념하기 위해 세속적 현장을 멀리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타자의 존재와 그 힘을 소중히 여겼다. “행복을 얻기 위해 지혜가 일생 동안 확보하는 것 중 지금껏 가장 큰 것은 우정을 얻는 것이다.” 어떤 인간도 스스로는 존재할 수 없으며, 다른 존재들과의 마주침은 자신의 영혼을 변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점, 그리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의무감이 아니라 즐겁기 때문에 우정을 욕망하는 것이라는 대목은 연결과 의존, 자립과 단절 사이에서 헤매고 있는 요즘의 나에게 특히나 울림이 큰 메시지였다.
강의 초반 꿀팁 좀 얻어 보겠다며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에 혹했던 내 모습이 부끄럽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는 ‘늙기 전에 현재를 즐겨라’라는 천박한 현실주의가 아닙니다!”라며 채운 선생님은 마치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으시는 듯 콕 집어 말씀하셨는데, 뜨끔했다. 고통이 발생하는 이유와 쾌락이 추구되는 방식을 우주의 본성 안에서 사유했던 에피쿠로스적 유물론은 순간적 쾌락에 중독되지 않고 항상적 쾌락을 누리는 법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우리가 사는 이 세계는 생성과 해체를 반복할 뿐 초월자의 힘이나 궁극의 목적과는 무관하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죽음을 공포스럽게 생각하며 결여된 것을 얻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이 어리석은 행위를 멈추자. 자족할 수 있는 마음, 철학 공부, 그리고 우정. 그 외의 것에 대해서는, 매일 16강 사고실험을 하며 불필요한 욕망이라면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헛된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무지 속에 날뛴다는 표현이 콕 박혔습니다. 확실히 그렇죠. 행복하지 못한 삶을 만드는 건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충족될 수 없는 욕망을 끊임없이 만들고 있어서죠. 끝없는 욕망의 질주는 자본주의 시대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런 무지의 역사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게 어쩐지 위로(?)가 되기도 하고요. 우리 자신을 위한 욕망을 위해 피를 토하듯 말하는 에피쿠로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비가 이런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따라 절제를 훈련하는 것도 필요할 것 같고, 확실히 우정의 힘이 없으면 안 될 것 같네요. 일요일 아침이 점점 더 고귀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