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강의는 한 편의 영화를 본듯했다. 운명 안에 평안하게 깃드는 스토아학파에서 함께 곁들어 마주침의 소중함을 얘기한 에피쿠로스. 그리고 스토아학파를 통해 ‘사건’을 사유한 들뢰즈. 이들의 이야기들이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마음의 요동을 치고 있을 때 이탁오의 노년과 죽음의 이야기까지. 시공간을 넘나드는 철학자들의 연결된 이야기 속에서 가슴이 먹먹했다. 가까운 이가 나의 곁을 떠나는 경험 속에서 죽음이 무엇인지, 당장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이를 그리워하는 남겨진 자의 슬픔이 얼마나 힘든지 등을 고민하고 있을 때 이들의 이야기들이 나의 마음으로 다가왔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이 우주 속에서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삶을 스토아학파는 얘기한다. 생성과 소멸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고 순환하는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내재한 본성을 이성이라고 바라보고 있다. 모든 것은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것.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는 자연의 섭리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긍정하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거대한 무게감을 가진 덩어리의 이야기는 추상적이었지만, 아래 구절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오히려 일어나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라(에픽테토스)’
어떻게 저것이 가능할까. 오히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라며 반문을 하며 원망을 할 것 같은데. 스토아학파는 이것을 어리석다고 한다. 우주의 관점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에서 인간이 맞이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운명을 긍정하는 것. 운명 안에 평안하게 깃드는 삶의 태도! 갑자기 김연자의 아모르파티가 떠오른다.^^;; 여기에 공감을 하면서도 또 찔끔 내 마음 속에서는 나는 지금 힘들고,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긍정할 수 있어?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불쑥 튀어나온다. 그때 들뢰즈가 스토아학파를 통해 ‘사건’을 사유한 이야기에 또 집중을 하게 된다.
‘우리에게 오는 것에 걸맞게 행동하기’
‘사건에 열등하지 않게 존재하기’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 사건이 발생하면 인간의 내면은 흔들릴 것이고 거기에 수많은 정념과 감정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때 채운 선생님의 예로 든 설명과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인간에게 직면한 사건에 징징대지 말고, 어리광 부리지 말고, 온몸으로 그 불행을 겪으라는 것. 불행 속에서 불행에 대해 생각하고 이 안에서 무엇을 겪고 있는가를 고민하라는 것. 즉 사건을 맞이하는 태도. 여기서 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문제를 겪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온갖 문제와 함께 살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이다는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스토아학파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우정을 중요시한다고 한다. 에피쿠로스도 마찬가지지만. 자기 영혼의 돌봄을 위해 자신의 병을 구해달라고 하는 스승에 대한 제자의 손내밈. 이를 받아주고 사유하고, 철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공부의 시작이다. 이 배움을 통해 구원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서 자기 스스로 하는 것이다. 줌을 통해 만나는 일요일의 이 시간도 이러한 과정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지점에서 채운 선생님께서 “자신이 어떤 고민하는 문제와 공부하고 있는 것을 연결하여 공부의 길을 스스로 만들어 내세요.”라는 말씀이 와 닿는다. 또한 왜 우리가 철학사를 공부해야 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공부해야 하는지를 염두에 두면서 공부하라는 말씀도 함께.
스토아학파에서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노년의 삶이라고 한다. 결여가 아니라 새로운 충만감으로 바라본 노년의 세계. 자연의 섭리에 입각해서 노년을 이해하는 것. 앞으로 죽음이란 단어를 경험하고 생각해야 할 나이기에 ‘이 사건에 걸맞게 존재하는 것’이 무엇일지 아직 막연하게 다가오지만 앞으로 공부해야 할 과제가 아닐까. 이 글쓰기를 하면서 계속 나의 개인적인 감정들이 불쑥불쑥 올라왔다. 나의 삶에 주어진 사건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무엇일지 사유의 첫 시작을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모든 사건은 나를 기다린다’라는 들뢰즈의 말에서.
마지막 죽음의 순간 ‘나는 하고 싶은 거 다 했다. 원없이’라는 이탁오 말에서
줌을 통해 전해진 여러 이야기들이 머릿속을 아직까지 뒤죽박죽 엉키지만, 그 시간에 느낀 마음 속 덩어리를 생생히 기억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한다.
연주샘 글을 읽으니 다시 지난 강의의 감동이 전해지네요. 저도 지난 몇 주 동안 이어진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의 강의를 듣는 내내 철학을 공부하고, 배움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유일한 이유가 다가올 일들을 미리 재기만 하거나 쪼다처럼 두려워하는 것 대신 매 순간 주어진 사건들을 두 눈 똑띠 뜨고 온 몸으로 부대 끼며 살아내고 싶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멋진 사람이 되는 길을 함께 가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자칫 세상을 달관한 현자의 손쉬운 결론처럼 들릴 수도 있었을 말을(제가 그렇게 들었거든요) 삶으로 들으셨군요. 무지를 자각하는 것에서부터 철학이 시작된다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떠올려 보면, 사건에 걸맞는 자가 되기 위한 노력을 고민하시는 연주쌤께서도 철학을 이미 시작하신 것 같습니다. 또 온갖 정념의 소용돌이로부터 탈출하는 건 혼자만의 힘으로는 쉽지 않죠. 그래서 스토아학파에서는 서로에 대한 배움을 요청하는 것에서 자기 배려를 시도한 것 같고요. 연주쌤과도 배움을 나누는 관계를 맺고 싶군요. 언젠가 세미나에서 함께 공부할 날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