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잘생긴 민호샘의 <루크레티우스가 우리에게 던지는 세 개의 화두> 첫 번째 강연 후기를 남기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지난 주 민호샘의 출간 기념 북콘서트에서 크크랩 샘들이 너무 과하게 놀았는지 공부도 열심히 함을 보여주라는 규창샘의 메시지가 후기 작성으로 오나 봅니다. 아무튼...
첫 강연의 주제는 ‘베누스, 퀴어한 자연, 경계를 넘는 존재들’이었습니다. 제목부터 익숙하면서도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베누스(venus)... 네 맞습니다. 사랑의 비너스...광고... 바로 그 여신입니다. 전 이번에 강연을 들으면서 베누스의 어원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요. 그 의미는 ‘모든 것에 다가가는 venire’이라는 뜻이랍니다. 우리가 사랑의 여신으로 알고 있는 베누스는 “모든 것에 다가가는 접속의 경향”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베누스는 탄생에도 여러 설이 있음을 알았는데 그 모든 걸 여기서 다 말씀드릴 수는 없고요..(강의를 들어주세요! 책을 읽으시거나... ^^) 베누스의 의미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화되었는지와 다른 관념과 결합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을 재미있게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베누스를 생명을 솟아 올리는 존재이자, 분출하고 결합하게 하는 힘으로 보고 자신의 저서 <사물의 본성>의 시작부터 찬미한답니다. 그러면서 사랑의 아픔을 해결하는 방법도 루크레티우스는 제시하는데.... 아마 궁금하신 분들이 있으실텐데 역시 책을 봐주세요! ^^
두 번째 이야기는 ‘퀴어queer’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민호샘은 퀴어의 의미가 ‘이상하다’, ‘특별하다’를 넘어서 ‘규정성을 벗어난다’로 파악하였는데 이런 측면에서 루크레티우스가 그리는 자연은 ‘퀴어하다’고 볼 수 있답니다. 베누스는 그저 모든 것에 다가가고 흘러가며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회적 코드들은 동성애, 이성애 등으로 사랑을 규정화하지만 베누스는 성별을 모르며 베누스의 후손인 우리는 남성, 여성으로 분화되지 않는 여러 겹의 성을 갖는답니다. 루크레티우스는 자연이 만들어오기를 그치지 않았던 ‘괴물들’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사물들의 수많은 기원들이 수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시간으로부터 이제까지, 타격들에 동요되고 자신의 무게에 시동되어 옮겨지고, 온갖 방식으로 만나고, 무엇이건 자신들 사이에 만나서 낳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해 버릇했기 때문이다.”(5:422-431) “이 실험이야말로 자연이 한시도 멈춘 적 없는 자연 자체의 본성이다”라는 민호샘의 멋진 해석도 함께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누스가 맞닿아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생식은 이미 그 자체로 죽음을 포함하고 있기에 루크레티우스는 죽음을 이해하고 생을 찬미할 수 있었답니다. 그에게 베누스는 고이고 멈추지 않는 생명의 흐름 그 자체이고 자연입니다. 루크레티우스의 이런 영적 원리는 그의 새로운 원자론으로 발전하고 ‘클리나멘’이라는 미시적 이탈을 생각하도록 하였답니다. 아마 이 ‘클리나멘’의 이야기는 다음 강연의 주제겠지요?
들뢰즈는 철학의 본질은 우리 안에 이상화된 것들을 고발하는 탈신비화적 기획에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철학의 임무를 루크레티우스에게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어제 강의에서 저는 내 안의 ‘비너스’ 아니 ‘베누스’의 관념에 씌여져 있던 수 많은 편견들을 발견하고 새로운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었답니다. 쓰다보니 꽤나 길어졌는데 크크랩 후기보다 더 길게 쓴 것 같아요... 크크랩 샘들이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음이 조금은 증명이 되었겠지요? ㅎ
더 많은 분들이 책도 보시고 강연도 들으시길 바랍니다. 그럼 삶에 대한 루크레우스의 멋진 시를 남기고 전 이만 물러갑니다~
“이와 같이 하나가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기를 그치지 않으며, 삶은 누구에게도 완전히 소유되지 않고, 모든 이에게 그저 대여될 뿐이다.”(3:970-971)
크크랩 샘들이 공부도 열심임이 증명되는 후기로군요...!
중구난방 강의를 씸플하게 요약해주셔서 감사해요~~
베누스의 핵심을 세 가지로 잘 요약하셨군요! ㅋㅋ 확실히 '모든 것을 살아가도록 하는 힘'이면서 '모든 규정성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하는 힘'이라는 게 독특한 거 같아요. 고대 중국에서도 생사를 하나로 보는데, 루크레티우스의 베누스 개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고요. 베누스를 이해함으로써 생을 찬미하는 만큼이나 죽음도 찬미할 수 있다는 게 매우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찬미'라는 단어가 새삼 생소했습니다. 고대 중국에서는 생사가 여일하기 때문에 安 혹은 居를 얘기하는데, '찬미'라... 닮은 것 같으면서도 다른 것 같아요. 여기서 각자의 윤리가 어떤 독특함을 지니는지 좀 더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나머지 두 개의 강의를 들으면서 더 분명해지겠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