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일요일 3학기가 시작됐습니다~ 지난 학기까지 고대 서양 철학, 그러니까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사유를 배웠다면, 이번 학기부터는 동양 철학을 배울 시간입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에서 채운쌤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셨죠. 동양 철학을 배우기 전에, ‘동양 철학’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 걸까요? ‘동양’은 지리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며, ‘철학’은 어떤 사유 활동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번 강의는 이 질문들을 차근차근 풀어가는 식으로 진행됐는데요. 이 질문들을 따라가는 동안, 이런 식의 문제제기가 결국 ‘왜 그리고 어떻게 공부하는가?’라는 공부 전반과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대 중국사상을 공부하기에 앞서 던지신 질문이지만, 그동안 배웠던 것들을 돌아보고 그것의 연장선 위에서 나머지 절반을 어떻게 배울 것인지도 생각하게 됐습니다.
‘동양 철학’이 아닌 ‘고대 중국사상’
우리는 흔히 ‘동양 철학’을 말하지만, 사실 이 말은 자세하게 따질수록 의문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우리가 떠올리는 ‘동양 철학’이 지시하는 것은 고대 중국 철학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동양’이란 지리도 대체로 ‘고대 중국’과 많이 겹쳐지죠. 그런데 서양 사람들 같은 경우에는 동양과 중국을 연결하기보다 인도를 먼저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익숙한 동쪽(orient)’이란 중국이 아니라 인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이라는 지리가 문화권마다 다르게 표상되는 것이죠. ‘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철학은 ‘philosophy’의 번역어인데요. 서양의 philosophy에 딱 들어맞는 것이 없습니다. 비슷한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에서 신탁은 철학을 전개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일 수는 있지만, 그 자체로 철학을 추동하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고대 중국에서 점을 고도의 추상적 사유로 간주해 발전시켰습니다. 대표적으로 역(易)이 그렇습니다. 아마도 당시의 격언이나 지혜로운 말이었을 점사(占辭)를 음양의 작용으로 보면서, 그것에 담긴 사유를 도출하기 시작했죠.
이렇게 고대 그리스와 로마, 중국은 우주 변화의 원리에 대한 통찰과 그로부터 인간 삶에 대한 윤리를 도출했다는 점에서 공통되긴 하지만, 어떤 원리를 통찰하고 어떤 윤리를 도출했는지는 매우 달랐습니다. 익숙한 ‘동양 철학’이란 말 대신 약간 낯선 ‘고대 중국사상’이란 말을 가져온 것은 하나의 사유를 ‘서양 철학’이란 틀로 왜곡하지 않기 위해서인 거죠.
모든 사유는 그것이 발생한 시대적 조건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것이 철학에 부합하는가, 이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따지기 전에 하나의 근본적 질문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채운쌤은 이를 고갱의 그림 제목으로 유명한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로 화두를 던지셨죠. 화두란 점에서 이건 해결되기보다 계속해서 들고 갈 수밖에 없는 종류의 질문인 것 같습니다. 매주 일요일 아침에 모여서 공부하는 저희에게 이 화두는 ‘왜 공부하는가’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철학함이 곧 지복을 소유하는 것이었다면, 고대 중국의 공자와 안회에게는 배움이 곧 외부 조건에 좌우되지 않는 즐거움을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매일 연구실에 나와서 공부하는 저에게도 ‘왜 공부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습니다. “이것과 저것 때문에 공부하는 것 같긴 하지만, 그게 왜 꼭 공부여야 할까?”에 대한 생각이 가끔 듭니다. 일단은 공부가 재밌고, 공부로 많은 것들을 실험할 수 있으니 계속 공부하고 있는데요. 공부하면서 계속해서 다시 묻게 되더라고요. 단지 공부를 좋은 말씀을 듣는 정도로 여긴다면 이런 고민이 필요 없겠지만, 지금 이 시대에서 공부한다는 게 무엇인가를 생각하니까 복잡해지더라고요. 그중에서도 저는 고대 중국사상을 베이스로 공부하고 있는데요. 지금 시대에 고대 중국사상을 배운다는 게 무엇일지, 이것으로 어떤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지가 고민입니다.
보편 철학사가 아닌 마이너한 사상사
찝찝하긴 하지만 채운쌤은 앞으로 고대 중국사상을 공부함에 있어서 ‘서양vs동양’이란 구도를 가져가는 게 어떤 점에서는 여전히 유의미하다고 하셨습니다. 분명 ‘이런 사유가 여긴 있고 저긴 없고 식’의 기계적 비교는 무의미합니다. 이런 식의 접근은 사유가 어떤 시대적 조건으로부터 도주로를 그렸는지를 은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비슷한 시기의 사유들은 통하는 지점이 있습니다. 이른바 지구의 운행으로부터 비롯된 사유의 공진화 같은 게 있었던 건데요. 단순히 고대 중국사상의 원형을 발굴해 내는 게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유용한 배움이 될 수 있도록 고대 중국사상을 변형시키는 것이라면, 공진화한 지점과 서로의 사유로 환원되지 않는 독특한 지점 등등을 밝히는 것도 필요한 작업이겠죠. 어쩌면 고대 중국사상과 서양 철학을 함께 배우는 저희가 그동안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철학사를 쓸 수 있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대체로 철학사는 ‘몇 년에 이런 주장을 한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 그것을 비판한 누가 있었는데, 그 사람의 주장은 이러하다’는 식으로 서술됩니다. 여기에는 오래된 사유가 도태되고, 새로운 사유가 자리를 차지하는 발전적 관점이 전제되는데요. 그렇게 철학사를 서술하는 순간, 하나의 사유가 어떤 시대적 조건 속에서 발생했는지, 그것이 당대의 상식과 편견과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를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냥 뛰어난 한 개인의 지혜 정도로만 남는 거죠. 반면에 들뢰즈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철학사를 썼습니다. 그는 단지 시간순으로 철학자들을 나열하기보다 한 시대의 거의 모든 사람이 믿어 의심치 않는 주류적 가치를 의심한 사람들로 철학사를 썼습니다. 일종의 도주사(?)를 쓴 셈이죠. 혹은 니체의 표현을 빌리면, '반시대성'의 역사를 쓴 거라고도 할 수 있겠고요.
앞으로 저희가 공부할 고대 중국사상 강의도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히 언제 어떤 사유가 있었는지를 밝히기보다 하나의 사유가 어떤 시대의 주류적 가치와 싸웠는지, 그리고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어떤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지 등등을 공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비슷한 문제의식이 서양에서는 어떻게 제기됐는지를 살펴보면, 자연스레 동서의 구분도 좀 더 다양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강의 중에는 ‘과연 중국의 사유가 중국만의 사유일까?’라는 질문도 있었죠. 하나의 사유가 형성되는 데에 피부색, 지리적 거리 같은 건 큰 장애물이 되질 않죠. 중국의 사유에 이미 인도의 사유가 많이 섞여 있고 서양의 피타고라스 학파도 그렇다면, 분명 중국과 서양이 만나는 지점도 있을 거고... 동서를 다양한 관점에서 묶고 헤쳐 모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동쪽에 있지만, 동쪽에만 머물지 않고, 동서의 개념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할 수 있는 시간이 되겠죠. 앞으로의 시간이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