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을 향한 두 개의 여정]
플라톤에게는 불변하는 대상, 고정되어 있는 그 ‘무엇’이 사고의 대상이다. 올바름, 좋음, 아름다움 등을 향한 여정에서 변화는 사유 불가능한 존재이다. 올바름을 따라가는 삶, 이데아를 향한 여정은 자기 혼을 돌보는 것으로 이는 철학자의 삶이다. 인간은 근원적으로 무지의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영혼을 돌보기 위해서 무지를 지(知)로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 스스로 배우로 채워나가는 공부를 중요하다고 플라톤은 바라보고 있다.
이에 반해 동양 및 현대 철학은 변화를 사유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있다. 동양 철학은 인간의 본성적인 것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 본성이 신체를 부여받을 때 각 개인의 기질로써 개체성이 발현된다. 그래서 본성이 발현되는 방식이 다르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지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질문하며 비워내고 내려놓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한다.
이 두 가지 앎의 여정 속에서 채운 선생님께서 ‘나와 앎의 관계는 무엇인가?’의 질문으로 두 개의 앎의 방향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말씀이 인상 깊었다. 이 후기를 준비하면서 자기 질문의 방식으로 공부를 해야지라는 마음을 먹고 시작했지만, 어느덧 나는 관련 서적을 찾아보면서 뭔가 분명한, 정리가 잘 되어진 논리적인 내용을 찾아 읽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머릿 속은 복잡하고 부담으로 다가왔다. 수업을 들은 지 2주가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그날의 내가 느낀 생생한 감동보다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동동거리던 나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그냥 부족한 대로, 고민한 대로의 흔적들을 적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변화의 세상에서 우리는 어떠한 윤리의 답을 구하며 찾아야 하는가?]
한 순간도 그대로이지 않은 세상 속에서, 매 순간 변화하는 나의 삶 속에서 ‘세상의 원리와 자신의 삶의 자치가 맞아 떨어져야 한다’라는 채운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았다.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하지만, 나의 삶에 주어진 고민들을 여러 방향으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플라톤 국가 7권의 ‘동굴의 비유’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굴 벽면의 그림자를 보며 앉아 있지만, 그중에 쇠사슬을 풀어내고 동굴 밖의 태양을 바라보며 실재를 아는 존재의 이야기가 있다. 이데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눈이 머는 고통처럼 앎에 이르는 길이 힘들다. 올바름, 진실, 세상을 통찰하고 전체를 꿰뚫는 앎은 자기 고행과 수련의 과정이기에 쉬운 길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변화하는 삶 속에서 자신의 욕망과 삶의 흐름들을 지켜보며 삶을 일구어나가는 과정 또한 어렵다. 산다는 것이 고행의 길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어려움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채운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 자신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삶 속에서 자유로움이 있다라는 말씀을 들으며, 아직 본 적은 없지만 보고 싶은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가 떠올랐다. 공부하는 힘든 순간순간 잠시나마 자유로움을 느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을 적으며 작년 주역 강의에서 생각나는 구절이 있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는 혼돈의 시간에서도 뭔가 마음을 울리며 위로가 되는 구절이었다.
천지의 도와 나란히 행하니 어그러짐이 없고, 하늘의 이치를 즐거워하고 命을 알기에 근심하지 않으며, 자신의 현실 상황에 편안히 거함으로써 인을 돈독하게 하므로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계사전 상)
여태껏 강의를 듣고 글을 써 본적이 없었다. 여러 다른 자료를 읽으면서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 급급하다 보니 머리만 쥐어짜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나의 부족함을 감추기 위해 그러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그것은 감출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며 욕심 또한 내려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죠. 후기 하나 쓸 때도 우리가 어떤 식으로 배우고 있는지, 앎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여실히 드러나죠. 하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알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후기보다는 그 사람이 앎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후기가 좀 더 울림을 주는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배우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그럴듯한 앎이 아니라 앎과 관계 맺는 태도인 것 같아요. 모든 앎은 언제든 다른 앎에 의해 폐기될 수 있지만, 앎과 관계 맺는 태도는 변함없을 수 있으니까요. 누군가는 자신을 포장하기 위해 배우는 반면, 누군가는 영혼을 돌보기 위해 배우겠죠. 플라톤은 후자를 철학자의 삶으로 규정하면서 각자가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영혼을 돌보는 여정을 시작하라고 응원하는데요. 이게 참 쉽지 않습니다.^^;; 아주 많은 경우, 저는 제 영혼을 배려하는 일과 저 자신을 포장하는 것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무지의 인정이 자기 돌봄의 시작이 될 수 있을까요?
인용하신 계사전의 "낙천지명" 구절은 배움의 과정을 '즐거움'과 붙여서 말하는데, 어쩐지 플라톤의 철학하는 삶과 크게 다를 것 같지도 않단 말이죠? 비교하면 여러모로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아이디어 하나 얻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