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
안녕하세요 규문에선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지난 시간에는 중세 기독교철학과 근대 서양철학의 근간을 이루고, 우리 커리큘럼에서도 2주에 배당되는 특권을 누리면서도 쌤들에게 외면당했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공부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저술은 선배 철학자들의 사유를 정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합니다. 철학사적 맥락 위에서 자신의 철학을 전개했다는 성실성은 장점이나, 기존의 사유를 전복시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평이하게 받아들여집니다. 이미 갖고 있는 생각을 확인시켜 주는 ‘상식적'인 철학은 그런 의미에서 덜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는 채운샘의 총평으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존재론 : 원인에 대한 인식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인식이란 ‘원인에 대한 인식’을 말합니다. 우리는 슬프다 혹은 기쁘다는 정서는 확실하게 느끼지만 왜 슬픈지 그 원인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슬프다는 감정을 인지하는 것보다 왜 슬픈지 원인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원인에 대해 말한 또 한 명의 철학자 스피노자가 있는데 둘의 차이점을 비교해 주셨습니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원인은 조건입니다. 채운쌤께서 예를 들어 주신 것을 바탕으로 저도 최근에 일어난 사건을 한번 생각해봤는데요. 전 요즘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의 일인데요. 마감시간이 임박했는데도 계속해서 주문을 받는 팀장님 때문에 짜증이 났습니다. 6시 정시퇴근을 위해서 5시 50분까지만 (포장 가능한) 주문을 받기로 정했는데 57, 58분까지 계속 받으시는 거예요. 기계청소도 이미 끝났는데. 전 제가 화가 난 이유가 시간관념이 없는 팀장님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 스피노자가 이끄는대로 여러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날은 연휴의 마지막날이라 손님이 엄청 많았습니다. 게다가 카페 1호점이 보안을 이유로 쉬는 바람에 제가 일하는 2호점으로 손님이 더 밀렸죠.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아 인원보충도 안 되어있는 상황이었구요. 수도가 터져 두 시간 가까이 한쪽 개수대만 사용가능했고... 점심 먹을 시간도 없어 오후 4시에 겨우 컵라면으로 해결. 힘들게 하루를 일했는데 마지막 1분까지 꽉 채워 주문을 받는 팀장님을 보니 그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인연조건을 동원해서 제가 그날 화가 났던 원인을 나열해 봤습니다.
슬픔을 느꼈다는 결과에서 출발해 원인을 규명하려고 하면 감정에 원인까지 더해져 감정이 고착화되지만, 복잡한 원인을 규합해서 슬픔을 이해하면 감정은 약화되고 해체된다... 팀장님에게 집중됐던 화의 원인이 여러 가지로 흩어지는 효과는 있지만 화가 난 진짜 원인(퇴근시간)의 초점을 흐리는 게 아닌가? 아직까지는 그런 의문이 남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은 의미하는 바가 다릅니다. “우리는 한 사물을 바로 그 사물이 만들어주는 원인을 알았을 때, 이 원인이 바로 그 사물의 원인임을 알았을 때, 나아가 바로 그런 이유로 그 사물이 자신이 아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음을 알았을 때, 한 사물에 대한 엄밀한 의미에서의 인식을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분석론 후서>)” 사물이 오로지 그 사물일 수밖에 없는 고유한 원인으로 네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질료인, 형상인, 목적인, 작용인. 어떤 물질로 만들어졌는가(질료인), 어떤 구조나 본, 틀로 되어있는가(형상인), 어떤 목적으로(목적인), 실제로 만든 원인은 무엇(작용인/운동인)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존재는 이 네 가지 원인으로 파악할 때 제대로 인식할 수 있습니다.
아까의 사건을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으로 다시 이해해 보겠습니다....시간제 알바라는 질료와 근무시간은 꼭 지켜져야 한다는 틀, 정해진 근무환경을 같이 일하는 사람들(작동인)과 만들어간다는 목적..에서 벗어났다는 원인 때문에 화가 났던 걸까요? 이렇게 분석하니 그날 일어났던 여러 다른 일들과 변수들이 지워지는 것 같습니다. 팀장님과 저와의 관계도 빠진 것 같구요.
존재를 어떻게 사유하는가? 스피노자의 관계론적 사유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사유. 철학은 크게 이 두 줄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채운쌤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는 어느 것이 맞다/틀리다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사유하는 것이 삶을 그 자체로 긍정하게 하는지, 어떤 사유구조의 원리로 구성해서 살면 행복할 수 있을지, 혹은 놓치는 게 뭔지로 접근해 보라구요. 복잡한 인연조건들을 다 헤아리면 화는 언제 내고 감정은 어떻게 표출해? 라는 생각이 잠시 스쳐갑니다. 하지만!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감정들을 관계론적 방식으로 사유하다 보면 감정에 끄달리고 괴로움을 겪는 습관이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가벼워졌습니다.
-윤리론 : 행복과 중용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철학과 행복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근대 일본의 번역어라서 느껴지는 어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행복이라고 하면 조건이 충족되어졌을 때 얻게 되는 만족감 정도로 생각됩니다.
행복의 어원은 그리스어 ‘에우다이모니아’입니다. 에우는 좋은, 다이모니아는 정령이라는 뜻. 행복은 ‘하나의 좋은 정령(별)을 지니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고대 동양에서 쓰였던 말 중에서는 지락(至樂), 안락(安樂)에 가깝습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모두 폴리스라는 시민사회, 정치체의 기반 위에 윤리학을 세웠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플라톤에게 앎과 삶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좋은 삶을 안다는 건 좋은 삶을 사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좋은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이는 뭐가 좋은 삶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앎과 삶이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좋은 삶이 뭔지 알지만 사회적 영향이나 개인의 의지 부족, 게으름, 습관으로 인해 행위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본 거죠.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최고선, 즉 모두에게 좋은 것이어야 하는 최상의 좋음이 무엇인지로 시작합니다. 여기에 독특한 윤리학적 언어가 등장하는데요. 품성의 덕, 탁월함을 뜻하는 ‘아레테(arete)’입니다. 품성은 ‘에티케(ethike)’인데 바로 에토스(ethos)라고 하는 윤리학의 어원입니다. 여기에서 품성(성격)은 행동거지, 말투, 타인을 대하는 태도 등 드러나는 모든 행위양식을 의미합니다. 품성은 본성도 아니고 본성에 반하는 것도 아닙니다. 습관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고 보았고, 습관은 시민들의 평가, 평판, 시선을 통해 고쳐나갈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언급되는 것이 ‘중용’입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다는 산술적인 의미와 상황에 딱 들어맞는 윤리로서 가장 합리적인 결론에 도달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합리는 시민사회에 공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폴리스 대중의 여론에 부합하고 공적인 공동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윤리적 선택이 합리성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동양의 ‘중용’ 개념과는 다릅니다. 끝으로 <중용>에서의 中(희노애락의 감정이 아직 열리지/드러나지 않은 선정의 상태)과 和(감정이 상황에 적중하다)의 의미를 해석해 주셨는데, 마지막 부분이 압권이었습니다. “중화의 상태에 도달하면 천지가 자기 자리에 있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감정을 치우치지 않게 적중하게 쓰는 것이 인간만의 일이 아니라 우주 만물의 운행에 부합된다는 점이 감동적입니다.
제 사례를 이렇게 분석하는게 맞는 건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감정을 여러 원인으로 분석해본 제 나름 재밌는 시도였습니다^^ 지금이 절기상 여름의 시작인 소만(小滿)이라고 합니다. 작은 것들로 혹은 작게 채우면서 자연의 지혜를 배워보려 합니다. 후기가 늦어 죄송합니다. 그럼 낼 아침에 봬요~~
아무리 훌륭한 강의를 들어도 바로바로 삶으로 소화되기는 어렵죠. 그건 사람들과 같이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해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만간 같이 세미나 하나 하면 좋지 않을까 싶네요. ㅎㅎ
흐음... 일단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결과적으로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 이른바 본질에 대한 탐구였던 것 같아요. 스피노자처럼 정서를 분석하기보다 존재의 고유함을 올바르게(?) 혹은 완전하게(?) 드러내는 게 목표인 이해인 것 같습니다. 반면에 스피노자에게 원인이란 본질에 대한 탐구라기보다 하나의 정서가 발생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다양한 것들이 개입했는지를 이해하는 쪽인 것 같은데요. 오히려 스피노자의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그렇게 발생하게 된 까닭을 알게 되니, 다르게 정서(결과)를 발생할 유연함이 생긴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으음... 아리스토텔레스를 잘 모르고, 스피노자도 너무 거칠게 대비하려니 참 말이 잘 안 나오는군요. ㅋㅋ 개인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도 한 번 공부해보고 싶은 욕구가 살짝 움텄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