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과 퓌론의 회의주의
"책은 틈 날 때마다 읽는 것. 시간을 내서 읽으려고 하니 못 읽는 것이다. 한국인이 유튜브를 보는 시간이 평균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된다고 하는데, 틈틈이 유튜브를 보듯이 책을 읽는 다면 하루에 1~2시간 정도는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라는 채운샘의 말씀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아마도 '찔려서'이겠지요? ㅎ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자왈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독서는 배움과 생각을 같이 할 수 있게 하는 행위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업 중 추천해주신 도서 몇 가지를 적어두고 후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 소크라테스의 삶과 죽음 → 플라톤 3부작 '변명' '크리톤' '파이돈'
(이 중 소크라테스의 삶이 궁금하다면 변명을, 죽음이 궁금하다면 파이돈을.)
√ 플라톤 사상 집약 → '국가', '국가'가 너무 어렵다면 플라톤 철학이 무엇인가가 강조된 '향연'
√ 아리스토텔레스 → '니코마코스의 윤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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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속에서 일정한 사유, 일상의 훈련을 통해 마음의 평정을 이루고자 했던 것이 헬레니즘 철학의 특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또한 폴리스라는 정치체를 전제로 어떻게 시민의 덕을 이루면서 개인의 평정을 이룰 수 있을까에 대한 사유입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2권에서는 품성의 탁월성(덕, ethike arete)에 대하여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탁월성이란 그것이 그래야 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주체 자체가 존재에 부합되어야 탁월한 것이며, 탁월성의 기원은 '습관'으로 탁월성은 후천적 공동체의 제도, 교육 등으로 만들어짐을 강조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논리학으로 '차이'에 대해 미세하게 구분하고, 그 차이로 세계를 위계화하고 분류합니다. 성격적 탁월성은 합리적 선택과 결부된 품성 상태로, 여기서 합리적 선택은 다른 말로 '중용'으로 해석되며 구체적 상황에서 작동합니다. 구체적 상황에서 한 쪽의 욕망을 따르지 않고 나와 모두를 위한 것을 위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아야 하는 것으로 맹자의 權道(권도)와도 비슷합니다. 權(저울추 권), 저울처럼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균형을 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탁월성은 습관으로 연마할 수 있으며, 이성에 준해 하는 것이긴 하지만 플라톤과는 달리 완전히 이데아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니코마코스 윤리학 6권에서는 사유의 탁월성과 실천적 지혜에 대하여 다룹니다. 앎을 몇가 지 층위로 나누고, 실천적 지혜(phronesis)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이 실천적 지혜는 일종의 관계에 대한 통찰이며, 이는 곧 '중용'입니다. '중용'은 부단한 자기 수련을 통해 획득됩니다.
퓌론의 회의주의로 넘어가서 채운샘은 먼저, 회의주의가 철학인가? 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자기의 철학 체계를 설파하기 보다는 너의 철학을 확신하지 말라는 듯 모든 것을 의문에 붙입니다. 회의주의는 철학적 경향보다는 일종의 삶에 대한 태도에 가깝습니다. 사유의 영도(零度). 여기가 회의주의자 퓌론의 출발점입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판단이 일체의 근심을 발생시키는 원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근심으로부터의 자유, 마음의 평정심을 얻고자 하는 목표는 다른 헬레니즘 철학과 다르지 않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이라는 판단에 휩싸이면 마음의 평정을 얻기 어렵다고 보고 인간의 인식에 대한 깊은 회의를 가집니다. '인간이 어떤 것이 좋은지 과연 알 수 있을까?' '인간의 유한성'에 대해 깊이 자각하면서 전체에 대한 통찰로 다가갑니다. 이 '알 수 없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여,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탐구의 종국 목적이라고 이야기하고, 또 그 판단의 유보에는 평정한 심경이 따라 생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판단 중지 (epoche)'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좀 더 다룹니다.
똑같이 공동체의 윤리를 얘기했다는 점에서 듣는 내내 맹자가 살짝 생각나기도 했습니다만, 퓌론의 이야기가 흥미로워서 금방 까먹었던 것 같아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음이 없다고 했는데, 이런 상태를 말하는 건가 싶기도 하네요. @_@ 존재와 덕을 바로 연결해야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제제기도 좋았지만, 그 전에 자신의 존재는 무엇이고 무엇이 좋은 것이고 나쁜 것인가에 관한 질문을 이리저리 던지는 퓌론의 사유도 매우 흥미로웠어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다분히 공동체적인 윤리를 제기했다면, 퓌론은 공동체적인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윤리를 꺼내든 것 같고... 우리가 고민해야 할 윤리는 크게 이 두 가지 종류에서 출발하는 것 같은데요. 같이 들으니 여러 모로 흥미로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