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일요일 6번째 후기 – 회의주의
이번 주는 일반적으로 회의주의자와 불가지론자를 동일시하는데 같은 주장을 하는가? 회의주의자들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제시하는 ‘판단중지(epoche)’란 무엇일까? 우리 일상생활에서 판단중지라는 것을 윤리적 관점에서 어떻게 적용할까? 등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 사유들을 배우면서 사고하는 법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가? 고민하라는 숙제를 주셨다.
- 회의주의와 판단중지
회의주의는 삶에 대한 태도로서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를 배척하고 '판단중지'를 통해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을 얻는 것을 철학의 목적으로 삼는다. 회의주의는 퓌론(기원전 360 ~ 279)이 잘 종합했기 때문에 ‘퓌론주의’라고도 부른다.
우리가 보통 불가지론자와 회의주의자를 동일시하는데 이들은 서로 다르다. 불가지론자는 절대적 진리는 알 수 없다며 탐구하지 않았던 반면 회의주의자는 절대적 진리를 의심하지만 그러면서도 계속 탐구하는 자들이다. 하나의 진리가 있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보편적 진리가 있다고 할때 어떤 논리적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가? 를 탐구했다. 이렇게 모든 것을 탐구하는 활동 때문에 회의주의 길은 탐구의 길, 또는 판단중지의 길, 아포리아(난제)의 길이라고도 부른다.
회의주의의 길은 보이는 현상과 사유 되는 것을 대립시켜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리고 대립하는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를 진리로 성급하게 선택하는 판단을 중지하고 이 두 가지의 대립을 숙고하라고 한다. 즉, 판단중지란 아무것도 하지 말라가 아니다. 성급한 선택을 중지하고 두 대립을 숙고하라는 것이다. 삶의 문제에 대해서도 성급히 단정하지 않고 판단을 유보하여 마음의 평정(아타락시아)에 이르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런 윤리적인 관점은 자연학에 기반해 있다. 자연을 탐구한 결과 자연에 존재하는 사물들은 어떤 하나로 드러나지 않고 다양한 존재로 나타나기 때문에 절대적인 보편적인 진리란 없다. 스피노자가 말한 것처럼 자연의 관점에서는 선이나 악은 없다. 따라서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은 절대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 살아가면서 필요한 판단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의 판단이 내일에도 여전히 유용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면서 판단하는 것이다.
-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회의주의
회의주의자는 인간의 불행은 불안정한 마음의 동요로 생겨난다. 동요가 일어나는 것은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것’을 계속 지키려 하고, ‘나쁜 것’을 회피하려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유함이 좋다고 생각하는 자는 이중으로 불행하다. 부를 소유하지 못해서 불행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느라 불행하다. 부를 소유한 자도 삼중으로 불행하다. 부로 인한 무절제한 기쁨과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노심초사와 그것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이것은 부를 좋은것이라고 판단해서 발생한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현재 좋은 것도 나중에는 나쁠 가능성이 있어서 모든 것은 불확실하다. 이런 맥락에서 좋다. 나쁘다. 라는 가치판단을 중지하라. 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좋음의 극단과 나쁨의 극단에 쏠리지 않고 늘 균형에 도달하기, 그것이 정서적으로 무덤덤해지는 것, 메트리오파티(중립감정)이며, 바로 마음의 평정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 상태에 도달하면 일반적인 가치를 따르면서도 자기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
- 혼란의 시대와 헬레니즘 철학
헬레니즘 시대를 주름잡았던 회의주의, 스토아주의, 에피쿠로스주의 이 3가지 철학의 목적은 모두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그 시대가 혼란했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역사의 순환 속에서 혼란한 시대에는 늘 이 3가지 철학과 마주한다고 말한다. 16세기에 회의주의가 부활했다. 종교적인 학살로 인해 똘레랑스(관용)를 이야기할 만큼 혼란한 시대였기 때문이다. 몽테뉴는 이 시기에 활동한 회의주의자였다. 그는 인간이라는 유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인 ‘나’라는 존재를 회의의 출발점으로 삼아 퓌론의 회의주의를 새롭게 사유했다. 그는 번뇌의 삶이 우리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마음의 평정을 추구하지 않았다. 고통을 제거하려 하지도 않고 고통스러운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긍정하며 번뇌와 함께 살아가는 것을 선택했다. 몽테뉴의 이런 태도는 삶을 긍정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이처럼 니체는 회의주의에 대해서 독단주의에 맞서는 건강한 철학이다. 라고 극찬하는 반면 피로에 지쳤을 때 내세우는 허무주의 철학이다. 라고 모순되는 말을 한다. 요즘 우리는 펜데믹 이후 타인에 대한 피로가 더욱 커져서 허무주의가 퍼지고 있다. 따라서 현재 우리에게는 헬레니즘의 철학이 필요하다. 몽테뉴처럼 나는 왜 괴로운가? 라는 구체적인 내 문제로부터 출발하여 삶을 부정하는 독단이라는 이상주의와 허무주의라는 양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회의라는 도구를내 삶에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철학의 사유들을 배우면서 사고하는 법을 어떻게 훈련할 것인지 고민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