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강독 세 번째 시간에는 1장을 마무리하고 2장의 서론에 해당하는 부분을 함께 읽었습니다. 샘께서도 언급하셨지만, 베르그손은 친절하게 반복해서 설명해주고 있지요. 이번에 읽은 부분에서도 생명의 진화에 대한 기계론적 이론과 목적론적 이론이 무엇을 어떻게 잘못 보고 있는지를 짚어줍니다. 둘은 달라보이지만 결국 같은 걸 놓치고 있습니다. 둘다 열려 있는 것으로서의 시간, 실재적 시간을 사유하지 못하죠. 이는 예측불가능성을 참지 못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시간을 제거한 공간적 사유
시간을 사유하는 문제는 참으로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걸 공간화, 양화해서 생각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죠. “지성은 흐르는 것을 혐오하고 접촉하는 모든 것을 고체화”(87쪽)하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이 뚜렷한 윤곽을 지닌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크고 작고, 더하고 덜하고, 우월하고 열등한 것으로 모든 걸 구분하고 줄세우며 살고 있고요. 심지어 행복과 같은 관념도 마찬가지라는 샘의 설명을 들으면서 우리가 얼마나 공간적인 사고에 갇혀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 시간을 백지화하는 공간적 사고와 싸운다는 것,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베르그손에게 시간은 지속, 즉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르는 연속적인 흐름을 의미합니다. 그 진동하는 흐름으로부터 대상이 어떤 결과로서 드러나고, 그런 대상들마저도 매순간 변화하는 흐름인 지속으로서의 세계에서는 뚜렷한 윤곽을 가진 어떤 것으로 고정될 수 없습니다. 샘께서 보여주신 세잔의 그림들은 이처럼 진동하고 있는 하나의 흐름으로서의 세계를 잘 보여줍니다. 세잔은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뚜렷한 윤곽을 지닌 세상을 그리는 대신 수없는 붓질로 어떤 윤곽 비슷한 효과를 만들어냅니다. 사과이고, 산이고, 사람이고, 집이라는 걸 알아볼 수는 있지만 자세히 보면 윤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윤곽선을 가진 대상들의 세계는 우리 관념일 뿐입니다.
따라서 시간을 사유한다는 것은 관념의 산물인 뚜렷한 윤곽을 지닌 대상이 아닌,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대상과 대상의 사이, 서로 침투하고 침투 당하고 있는 그곳을 사유한다는 말과도 같습니다. 지난 시간에 언급되었던 ‘핵이 아니라 가장자리를 사유한다’는 말도 비슷한 의미라고 샘께서 짚어주셨지요. 이건 결국 지성의 습관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을 읽는 일은 분명 그 일에 도움이 되고요.^^
엘랑 비탈(élan vital), 생명의 도약
1장 마지막 부분에서부터 베르그손은 자신이 생각하는 진화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앞서 진화에 대한 여러 가설들을 살펴보며 그것들이 모두 생명체가 자기 안에 내포하고 있는 힘들, 외부적인 것과 관계하고 있는 생명체의 내적 작용을 놓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베르그손은 그 내적인 힘, 내적 작용을 엘랑 비탈, 생명의 근원적 약동, 생명의 도약이라고 부릅니다. “배(胚)와 배 사이에서 연결부를 형성하는 성체를 매개로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경과하는 생명의 근원적 약동.”(144쪽) 앞에서도 “생명은 성체를 매개로 하여 배에서 배로 가는 흐름처럼 나타난다”(59쪽)고 했듯이, 베르그손은 진화를 지속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생명의 진행 과정은 재단한 물질의 부분들을 모아 서로 끼워 넣는 ‘제작’의 과정이 아니라 ‘중심에서 주변으로’가는, 다시 말해 근원적인 것에서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유기화 작업에 가깝다고 합니다. 유기화 작용은 ‘무언가 폭발적인 것’을 가지고 있어서, 출발에서는 ‘가능한 한 가장 작은 장소와 최소한의 재료’만 있으면 됩니다. 2장을 시작하며 베르그손은 이러한 생명의 진행 과정을 포탄과 유탄에 비유합니다.
“생명이 대포에서 쏘아올린 포탄의 궤도와 비교할 수 있는 단일한 궤도를 그린다면, 진화의 운동은 단순하고 그 방향도 빨리 결정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와 관련된 것은 곧바로 조각조각 파열되는 유탄이다. 그리고 이 파편들 자체가 일종의 유탄들이어서 이번에는 그것들이 조각들로 파열되고, 그 조각들이 또다시 파열하게 되는 식으로 아주 오랜 기간 계속되어 왔다. (...) 유탄이 파열할 때 그것이 파편화되는 방식은 그것이 내포하는 화약의 폭발적 힘과 금속이 거기에 대립하는 저항에 의해 동시에 설명된다. 생명이 개체들과 종들로 나누어지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두 계열의 원인들을 포함한다고 생각된다. 생명이 무기물질 쪽에서 느끼는 저항과 생명이 자기 안에 보유하고 있는 폭발적인 힘--경향들의 불안정한 균형에 기인하는--이 그것이다.”(159~160쪽)
베르그손은 “생명은 무엇보다 무기물질에 작용하려는 경향”(156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체가 진화한다는 것은 다른 모든 것들과의 상호작용하는 운동 속에 있다는 말, 즉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면서 약동을 펼쳐나가는 것이라고 샘께서 정리해주셨죠. 생명 자체가 경향이라는 말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작용의 방향은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으며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것. 이 예측불가능성이야말로 우주의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근원적인 힘이 바로 엘랑 비탈, 생명의 도약, 원초적 약동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진화는 “최초의 운동 덕분에 끝없이 계속되는 창조”(168쪽)이고, 이런 식으로 진화를 바라본다면 미래의 문은 크게 열려 있게 됩니다. 2장에서 베르그손은 진화의 다양한 방향들 가운데 ‘인간에 이르는 길’을 따라갑니다. 우선 식물과 동물의 분화에서 시작하는데 엄청 흥미롭네요.
다음 시간에 2장 끝까지 읽고 만나요!
철학을 공부하면서 종종 '시간의 공간화', '공간의 시간화' 라는 개념을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얼마전 베르그손이 바로 그 개념을 만든 철학자라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답니다. 시간을 공간화한다는 것은 순환의 시간을 직선의 시간으로 환원해서 인간의 연속적 사유의 단절을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요. 혹자는 '시간의 공간화'를 '생명의 무생명화' 라고 해석을 하더군요. 그렇다면 '공간의 시간화'는 파편화된 시간을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재구성하려는, 그러니까 무생명의 생명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베르그손에게 시간은 지속, 끊임없이 변화하며 흐르는 연속적인 흐름을 의미"한다. 그런 지속에서만 엘랑 비탈(생명의 도약)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 그리고 엘랑 비탈의 작용이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우주의 다양성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베르그손의 철학적 개념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그래도 샘의 후기를 읽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