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강독 네 번째 시간에는 생명 진화의 분기하는 방향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2장을 반 정도 읽었습니다. 샘께서는 이번에도 그림으로 저희에게 화두를 던져주시며 시작하셨죠. 게르하르트 리히터라는 화가의 그림인데요, 포토 페인팅이라는 기법으로 그린 리히터의 그림들은 지난 시간 보았던 세잔의 그림과는 또 다르게 베르그손이 바라보는 세계를 보여줍니다. 찾아보니 이런 그림들이 있네요.
https://gerhard-richter.com/en/art/paintings/#photo-paintings
보는 순간 멀미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초점을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합니다. 베르그손에 따르면 이게 바로 지성이 작동하는 방식일텐데요. 지성은 모든 걸 고체화시켜 생각하는 습관이 있지요. 확실한 윤곽을 지닌 뚜렷한 무언가로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우리 생명을 이어나가는 데 유용하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이 그림처럼 뚜렷하지 않은 세상은 견디기 힘들어 합니다. 관념에 대해서도 모호한 걸 견디지 못해서 어떻게든 테두리를 치고 그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고요. 세미나에서 책을 읽거나 토론하며 개념들이 잘 잡히지 않을 때 괴로움으로 몸부림치게 되는 것도 이 모호한 걸 견디지 못하는 지성의 습성 때문일 겁니다. 이런 습성 덕분에 인류는 오랫동안 생명을 이어왔고 또 많은 걸 할 수 있게 되었죠. 하지만 모든 걸 분명하게 인식하는 지성의 최고 기능은 동시에 한계로도 작용합니다. 인식의 그물에 걸리지 않은 많은 것들을 없는 셈 쳐버리게 되니까요.
이처럼 뚜렷하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보이는 게 있지만, 리히터의 그림처럼 초점이 흐려졌을 때 보이는 것도 있다고 샘께서 짚어주셨지요. 초점이 흐리고 윤곽이 뚜렷하지 않아 주변과 덜 구분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놓치고 있었던 세계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눈앞에 뚜렷하게 구분되어 드러나는 것만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도 하고요. 지성이 못 견뎌하는 뚜렷하지 않은 것들을 통해 우리는 뚜렷한 것이 보여주지 못하는 어떤 것들을 볼 수 있을까요? 샘께서 던져주신 화두를 계속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인간에 이르는 길
이번 시간에 읽은 부분은 정말 어디에서도 듣도보도 못하던 내용이어서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듣도보도 못하기로는 베르그손의 지속 개념도 만만치 않지만요.^^ 베르그손은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생명의 힘으로부터 분기해나왔고, 분기한 후에도 “초보적이거나 잠재적인 상태로 다른 대부분의 형태들의 본질적인 특성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없다”(170쪽)고 말합니다. 차이는 오직 ‘비율’뿐인데요, 따라서 각 집단은 “일정한 특성들의 소유가 아니라 그것들을 강화하는 경향에 의해 정의”(170쪽)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한 운동은 무엇보다 자신의 생명을 더 길게 유지하는 데 유용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혼합되어 있었지만 분기해나가면서 어떤 특성들이 점점 더 강화되는 경향을 지니게 됩니다.
식물은 공기, 물, 흙에서 생명 유지에 필요한 요소를 직접 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고정성을 강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갔고, 그 요소들을 직접 취할 수 없는 동물들은 그걸 이미 취한 식물이나 다른 동물들을 찾아다녀야 했으므로 필연적으로 운동성을 강화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는 겁니다. 하지만 영양 섭취 방식이나 운동성과 고정성이라는 것도 하나의 경향성이 더 높은 비율로 나타나는 것뿐이지 식물과 동물을 분류하는 유일한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각각의 집단 안에는 n개의 존재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인데 동물처럼 영양을 섭취한다든가, 동물인데 식물처럼 고정성의 삶을 사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베르그손은 이런 식의 정도의 차이가 아닌, 본성적 차이로 의식을 꼽습니다. 운동성과 의식 사이에는 명백한 관계가 있습니다. 동물은 신경계가 발달하게 되면서 “운동의 적응이 더 정확해지는 방향으로, 그리고 생명체에게 남겨진 선택지들의 폭이 더 커지는 방향으로”(195쪽) 나아갑니다. 감각운동체계가 복잡해질수록 행동의 가능 영역이 더 커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외부의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결정을 유보하며 선택할 수 있게 된 거죠. 베르그손은 생명의 역활을 “물질 속에 비결정성을 삽입하는 것”(196쪽)이라고 표현하는데요, 이러한 비결정성 때문에 생명이 진화하며 무엇을 창조해낼지는 예측이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비결정성이 커질수록 생명체는 더욱 자유로워집니다. 이처럼 베르그손에게 ‘자유’는 비결정성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입니다.
동물계의 모든 진화는 분기된 두 방향으로 이어지는데, 그 하나는 본능을 향해가고 다른 하나는 지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지성과 본능에 대해서도 베르그손은 우리가 생각해온 것과는 매우 다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식물과 동물의 두 경향이 비율만 다를뿐 서로 뒤섞여 있는 것처럼, 지성과 본능도 그러하다고 말합니다. 베르그손은 인간을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도구적 인간으로 규정하며, 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요컨대 지성은 인공적 대상들을 제작하고 특히 도구를 만드는 도구들을 제작하며, 그 제작을 무한히 변형시키는 능력이다.”(214쪽) 지능적이지 않은 동물 역시 도구를 사용할 줄 아는 본능이 있지만, 도구를 신체의 연장으로 사용하는 데에서 그칩니다. 반면 인간은 그 도구를 무한히 변형시키고, 그것이 신체를 변형시키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에 비해 불완전하고 불충분한 신체를 지닌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서 나온 결과죠. 이처럼 베르그손은 식물과 동물, 본능과 지성이 순서대로 진화했거나 어느 것이 더 우월하고 열등한 것이 아니라 오직 서로 다른 필요에 의해, 서로 다른 유용성을 선택한 결과임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석을 통해 본능과 지성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식을 끌어냅니다. “지성만이 찾을 수(chercher) 있으나 지성 자신에 의해서는 결코 발견할(trouver)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본능만 발견할 수 있으나 본능은 그것들을 결코 찾지 않을 것이다.”(231쪽)
이렇게 분기된 지성과 본능은 어디에 이르게 될까요? 계속 베르그손을 따라가봐야겠습니다.
식물과 동물의 진화를 분기의 문제로 보는 베르그손의 인식이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같은 뿌리에서 분기되어 다양한 양태가 창조되었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갖는 것 같습니다. 유기체의 분기할 수 있는 내재적 힘이 바로 생명의 약동이겠지요. 중심에서 분기되어 다른 방향성을 갖는 것이 중심축에 틈-내기, 주변부-되기가 아닐까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베르그손의 지성의 개념도색달랐습니다. 앎을 고체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로 받아들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텋게 분기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지성의 작동이 쏙 들어오네요.... 흐린 초점은 맞추고 싶고, 뭐라는지 모르겠는 개념들을 아는 걸로 끼워맞추고 싶고...
식물과 동물의 느슨한 경계, 물질속에 비결정성을 삽입하는 생명, 본능과 지성의 밀당적 상보성... 엄청난 얘기들이 오갔었네요!
꼼꼼하고 차분한 정리에 늘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