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하는 일요일 8주차 후기
철학 세미나를 듣는 일요일 아침! 편안한 마음으로 채운 샘의 강의를 느긋하게 듣고 있는데 메시지가 날라왔다. 후기 글 당첨! 이 외적 동력에 의해 갑자기 모범생 자세가 되어서 강의를 듣게 되었다. 천리안을 장착하신 샘은 내적 동력이 없으면 공부를 못하게 되어있다고 뼈 때리는 말씀을 하셨다. 오늘 강의는 플라톤의 저작인 <향연>을 중심으로 앎은 무엇인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한 주 동안 플라톤이 향연에서 이야기한 에로스의 힘을 자신은 어디에 사용하는지! 자신의 앎의 모형은 무엇인지 생각하라! 는 화두를 주셨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에로스의 의미
플라톤의 중기 저작인 <향연>의 주제는 에로스이다. 플라톤은 향연을 통해 에로스의 의미를 새롭게 변화시켰다. 그 당시에는 현자와 소년이 지혜를 전수하는 과정에서 소년애(동성애)가 관례였다. 이렇게 입문의 과정에 육체적인 욕망이 개입되면 누군가는 수동성에 갇히게 된다. 그런데 스승과 소년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에 갇히지 않고, 지혜를 사랑하게 된다면 둘 다 수동성에서 벗어나 남성성인 능동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플라톤은 에로스를 철학과 연결하여 성적인 욕망을 제거하고 순수한 자혜를 매개로 하는 사랑으로 의미를 변환하였다. 즉, 우리가 철학을 하도록 하는 기본적인 추동력이 에로스의 힘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플라톤은 철학자의 이미지를 무지(無知)와 지(知 )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 설정하였다. 무지를 자각한 철학자는 내적 동력인 에로스의 힘으로 앎을 향한 여정을 갈 수밖에 없지만, 중간자로서 결코 신적 앎에 도달할 수 없는 비극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놀고 싶기도 하고, 공부하러 온 자기를 칭찬하기도 하며 분열을 반복한다. 이런 우리의 상태를 플라톤의 중간자인 철학자의 이미지로 잘 설명할 수 있다. 철학 세미나를 신청할 때까지만 해도 내적 동력인 에로스의 힘이 조금은 있었으나 보다. 그러나 한주 한주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져서 그 힘은 바닥이 나고 지혜가 아닌 것들 찾아 방황하고 있다. 파이드로스는 이성적인 삶에도 광기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러나 세미나를 들으며 모르는 것에 대한 번뇌도 없는 걸 보면 광기보다는 무지부터 자각해야 할 듯하다.
어떤 앎의 모형 속에서 공부를 생각하는가?
플라톤의 앎의 모형은 무지에서 신적인 앎을 향하는 구도이다. 무지를 자각한 철학자의 앞에는 앎 그 자체(아름다움, 좋음, 올바름)로부터 가장 가까운 것과 먼 것들 사이에 위계인 사다리가 있다. 그러나 무지와 지 사이에 존재하는 중간자인 철학자는 사다리를 올라가는 앎의 여정에서 저 멀리 있는 앎 그 자체에는 도달할 수가 없다. 플라톤의 모형에서는 앎의 과정과 앎이 일치하지 못한다. 즉 목적과 과정이 분리되고 만다. 그래서 앎에 도달하지 못하는 과정 자체가 부정당하게 되고 평가절하되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플라톤이 기독교에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높은 곳을 향한 한 방향만을 바라보는 이 앎의 모형 때문이다. 플라톤의 구도는 특수한 경우이며 철학자들은 대부분 견해(한 방향)를 버리라고 말한다. 불교, 유교, 스피노자 등은 플라톤과 다르게 앎과 앎에 이르는 과정 자체가 분리되지 않는 앎의 구도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앎을 향해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중간에 터득하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열매는 도착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간에도 주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샘은 행위와 행위의 열매 사이에는 시간 차이가 없다. 행위를 하고 난 다음에 열매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위 함 그 자체가 매 순간 열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려야만 열매가 아니라 나무에 잎이 나고, 꽃이 피는 것도 열매이다. 따라서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제와 다른 무엇인가를 생각하고 알게 되는 것들로 인해 매 순간 충만해 지면서 공부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라고 하셨다. 내 경우 목적론적 모형으로 공부를 대하고 있었다. 이런 태도로 인해 공부하는 과정에서 얻게 되는 앎의 기쁨들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어떤 완전함을 설정하고 그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힘들어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학교 다닐 때처럼 시험을 보는 것도 아니며 누군가의 평가를 받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습성을 버리지 못하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목적론적 모형에 젖어서 공부의 과정이 곧 열매임을 평가절하하고 있었다. 이 구도에서 벗어나 공부하는 매 순간 충만해지길 희망한다.
비판으로서의 철학
니체와 푸코는 비판으로서의 철학을 강조했다. 우리가 지금 마음속에서 겪고 있는 것들은 언제나 어떤 앎을 기반으로 있다. 그래서 어떤 조건에서 어떤 방식으로 진리로 구성되고 나타나는지 그 조건을 물어보는 것이 비판으로서의 철학이다. 불교는 지금 여기에서 자신을 속박하는 앎의 메카니즘을 알아야 그 속박에서 풀려난다고 하며, 스피노자는 우리의 출발조건인 부적합한 인식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가는 과정에서 3종 인식에 이르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공부 태도에 대한 습관을 바꾸려면 비판적 고찰을 통해 현재 내가 어떤 앎의 구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공부를 대하는지 알아야 그 구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 후기에도 일종의 광기가 있는 것 같은데요?! ㅋㅋ '나는 왜 배우고, 어떻게 배우고 있지?' 배우는 우리가 계속해서 직면하게 되는 질문인 것 같습니다. 배움이란 어떻게 보면 가장 무용한 일인데, 가장 놓지 못하는 작업인 것 같기도 하고요. 이번에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을 통해 '배움'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하게 되는데요. 아직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목적론적', '비판' 등 흥미로운 모형들을 통해 그동안 어떻게 공부하고 있었는지 점검하게 되네요. 충분히 내적 동력 가득한 후기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