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진화> 강독 다섯 번째 시간에는 2장을 모두 읽고 3장을 살짝 맛보았습니다. 이번에도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많았는데요, 지난 시간에 이어 베르그손은 서로 다르게 분기해나간 지성과 본능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지성과 본능은 어떻게 분기해나갔는지, 이 둘의 힘과 한계는 무엇인지, 둘을 통합하는 길은 무엇인지.. 베르그손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샘께서 콕콕 집어 설명해주신 부분들 가운데 기억에 남는 부분들을 적어보겠습니다.
지성, 생명에 대한 자연적인 몰이해
우선 저는 ‘공간’에 관한 내용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베르그손을 읽으면서 계속 생각해보게 되는 문제 중 하나가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지요. ‘시간은 존재하고, 그것은 공간이 아니다.’ 이는 자신의 철학을 한마디로 요약해달라는 한 청중에게 베르그손이 답한 말이라고 하는데요. 지금은 무슨 의미인지 알지만, 우리가(지성이) 시간뿐 아니라 모든 걸 공간화해서 생각하는 습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충격(!)이었습니다. ‘공간이 아닌 시간(지속으로서의 세계)’을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계속 생각해보게 되고요. 그런데 베르그손은 우리가 ‘공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 개념화된 것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공간은 정신이 [세계를] ‘보는 방식’이다”(239쪽)라고 말입니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공간을 ‘거대한 천’처럼 생각한다고 합니다. 마음대로 재단하고 다시 꿰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런 공간은 “동질적이고 비어 있으며 무한하고 무한히 분할 가능하며 어떤 방식의 분해도 무차별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장소”(239쪽)입니다. 하지만 이런 장소는 절대 지각되지 않습니다. 앞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우리가(지성이) 지각하는 건 윤곽이 뚜렷한 것들이고, 우리는 이처럼 마음대로 분해하고 재구성할 수 있는 것들 뒤에서 이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텅 빈, 무차별적이고 동질적인 공간의 형태를 한꺼번에 투영합니다. 거대한 천이나 스케치북과도 같은 형태로요.
모든 걸 이런 식으로 공간화해서 생각하는 지성은 “부동성만을 명확하게 표상”(238쪽)하고, “임의의 법칙에 따라 분해하고 임의의 체계로 재구성할 수 있는 무한한 힘”(240쪽)으로 특징지어집니다. 그렇기에 ‘생성’조차도 "자신과 동질적이며 따라서 변화하지 않는 일련의 상태들로 표상”(248쪽)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주어진 것을 가지고 재구성하기 때문에 “역사의 매순간에서 새로운 것을 빠져나가게”(249쪽)합니다. 예측 불가능한 건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창조를 거부합니다. 모든 건 인과의 법칙에 따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지성의 특징을 베르그손은 한마디로 “생명에 대한 자연적인 몰이해”(251쪽)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본능, 공감, 직관
반대로 본능은 “생명의 형식 자체를 본떠 만들어”(251쪽)진 것입니다. 지성은 모든 사물을 기계적으로 다루는 반면 본능은 유기적으로 작업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디까지가 유기화 과정이고 어디서부터가 본능인지 똑부러지게 말할 수가 없습니다. 병아리가 부리로 껍질을 쪼아 깨드리는 것은 본능에 따른 행동, 즉 “배의 삶을 통해 자신을 실어나르는 운동을 뒤따르는 것”(252쪽)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그러므로 본능은 ‘생명적 과정’, ‘생명’이란 말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마비시키는 능력을 가진 막시류의 ‘능숙한 외과 수술’에 관한 내용도 재미있었는데요.^^ 다양한 종류의 막시류들이 그 희생자들(세토니아의 유충, 귀뚜라미, 배추벌레)을 죽이지 않고 정확하게 중추신경을 찔러 마비시키는 능력에 대해 우리는 매우 놀라워합니다. 얘들은 배우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런 능력을 갖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베르그손은 또다시 흥미로운 답을 내놓습니다. 우리가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건 모두 “막시류의 재능을 지성의 용어로 표현하려는 데”(263쪽)서 비롯되었다는 겁니다. 지성의 방식으로 그 능력을 이해해보려고 해서 그렇다는 건데요. 그렇게 볼 때 조롱박벌이 그런 능력들을 가지려면 곤충학자처럼 배추벌레의 신경중추의 위치들을 하나하나 배우고, 침을 찔러 그 효과들을 실험해보면서 결정적인 위치를 알아내야 하는 건데, 그렇게 안하고도 어떻게???가 되는 되는 거죠.
하지만 베르그손은 이들 사이에 ‘공감(sympathie)’을 가정한다면 사정이 달라진다고 말합니다. “조롱박벌과 그 먹이 사이에, 말하자면 안으로부터 배추벌레의 취약점에 대해 알 수 있는 하나의 공감(sympathie)”(263쪽)을 가정한다면 말입니다. 지성은 불연속적인 것과 부동성만을 명확하게 표상하고, 그처럼 움직이지 않는 점들을 선으로 연결해서 운동으로 생각한다고 했지요. 그렇기에 우리 지성은 '배추벌레의 근원에서 나타나는 힘'을 배추벌레의 신경들과 신경중추가 병렬된 것으로서만 파악합니다. 하지만 조롱박벌은 그것을 인식의 과정과는 아주 다르게 “안으로부터, 그리고 우리가 예견적(divinatrice) 공감이라 부르는 것과 유사할지도 모르는 어떤 직관(intuition, 표상되기보다는 체험된)에 의해 파악”(266쪽)합니다. 이처럼 베르그손에 따르면, 본능은 ‘공감’이고, 직관은 우리를 생명의 내부로 인도해줍니다. 직관은 “무사심하게 되어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대상에 대해 반성할 수 있으며 그것을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된 본능”(268쪽)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직관은 지성보다 우리에게 훨씬 더 필요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지성은 우리 눈과 귀를 가려 실재 세계를 보지 못하게 하는 '몹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고요. 하지만 베르그손은 '직관이 지성을 넘어서는 일'이 ‘지성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지성이 없다면 직관은 본능의 형태로 남아 현재의 실제적 관심 대상에만 고정되고 그에 대해서만 반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베르그손은 ‘자유’가 ‘비결정성’과 더불어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자극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머뭇거릴 수 있는 능력, “더 많은 수의 행동들 사이에서 선택”(271쪽)할 수 있는 능력은 직관이 지성을 넘어서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3장에서 좀더 자세하게 논의될 듯한데요. 샘께서 이번 강의를 시작하시며 결론으로 짚어주셨던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고요. 3장도 기대됩니다.
지성과 본능 그리고 직관의 관계가 흥미롭습니다. 철학자마다 지성에 대한 개념 차이가 있겠지만, 베르그손에게 지성은 본능(생명)을 배제한 상태에서 사물을 인식하는 힘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가 지성만으로 이 세계를 보게 되면 공간과 시간을 우리 편의대로 쪼갤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사물과 세계를 파편화해서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다만 지성은 "부동성만을 명확하게 표상"하고, "생성조차도 변화하지 않는 일련의 상태들로 표상한다"고 하니, 지성의 고체화 속성이 어떤 것인지 조금은 감이 잡힙니다. 그렇다면 우린 지성의 역할을 축소하고 본능(직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 우리를 생명의 내부로 인도해주는 직관이 제대로 활성화되기 위해선 지성이 필요조건이라고 하니, 직관과 지성의 힘이 통합될 때 지속으로서의 세계를 사유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형성된다는 것이지요. 이해될 듯 말 듯 하지만 '지속으로서의 세계'를 사유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어찌보면 딱딱한 지성적 사고에 찌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감' 즉 본능이 전해주는 분리불가능 한 상호 운동인데, 그런 본능은 또 지성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이러니합니다! 이번에 범위에서도 철학에서 직관과 지성에 대한 비슷한 주제가 나오는 듯한데, 좀 더 머리 싸매고 고민해볼 일인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