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을 열심히 다녔던 학창시절에 꽂혔던 성경구절이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였다. 모든 것이 변하고 헛되다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 고민을 진지하게 했던 거 같다. 하여,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변치 않는 가치를 내포한 성경을 나침반으로 삼아야겠다 그런 생각도 했었을 것이다.
이런 내 성향으로 미루어 볼 때, 채운샘 말씀대로 각자의 감각, 기질에 따라 더 잘 맞는 고전 혹은 스승이 있다면, 나는 아무래도 주자나 플라톤을 열심히 공부해봐야 하나? 싶다. ^^ 게다가 <파이돈>에 나오는 영혼불멸설, 이데아론은 지금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일상(감정, 욕망)을 훈련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유용함을 주는 지점이 있어서 더 흥미로웠다.
[영혼불멸, 혼을 돌봐야 하는 이유]
플라톤이 인도철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피타고라스 학파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보여지는 지점이 혼의 불멸, 윤회에 대한 언급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윤회에 대한 이미지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구운몽>에서 성진이 팔선녀를 만나 수작한 일로 저승에 끌려와 윤회하는 장면이다.
(구운몽, 민음사, 20쪽~24쪽 중에서)
저승사자가 성진을 이끌고 한 집에 이르러 문밖에서 기다리라 하고 안으로 들어가거늘, 성진이 한동안 서서 들으니 이웃 사람이 서로 말하되, "양 처사 부부 나이 쉰에 처음으로 잉태하니 세상에 드문 일이라. 임신한 지 오래되었는데 아이 울음소리 없으니 걱정이다." 하거늘 성진이 자기를 이르는 말 같으니, 분명히 양 처사의 자식이 되어 태어날 줄 알고 문득 생각하되, '내 이미 인간 세상에 환도하게 되었으니 이곳에 와도 분명 정신만 왔을 것이라. 육신은 틀림없이 연화봉에서 화장하는도다. 나이 젊어서 제자를 두지 못하였으니 어느 사람이 나의 사리를 거두리오?' <중략> 사자가 재촉하여 방에 들어가라 하거늘 성진이 마음에 꺼려 머뭇머뭇하니 사자 뒤에서 힘주어 밀치니 공중에 엎어져 정신이 아득하여 천지가 뒤바뀌는 듯하더라. 소리 질러 나를 구하라 하더니 소리가 목구멍에서 나오며 말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아기 울음소리를 할 뿐이라. <중략> 이후에 성진이 배 고프면 울고 울면 젖 먹이니 처음에는 마음으로 남악 연화봉을 잊지 아니하더니 점점 자라 부모의 정을 알게 되니 전생의 일은 아득하게 잊고 기억하지 못하더라. <중략> 소유가 열네다섯 살에 이르러서는 기상은~~제자백가와 육도삼략과 활쏘기와 칼쓰기를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진실로 여러 대에 걸쳐 수행하는 사람이더라.
책 한 권 읽는 것도 허덕이는 이번 생에서 내가 얼마나 깨달을 수 있을지 생각하면 벌써 아득해지는데, 이번 생이 끝이 아니라면 혼을 잘 돌보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은^^ 생기지 않는가? 잘 돌본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것은 일단 괄호에 넣더라도 말이다.
[이데아, 想起]
예를 들어 우리가 ‘용기 있다’라고 말하는 여러 행동 양식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행동에 대해 ‘용기 있다’고 말하는 것은 이런 행위들 안에 ‘용기’ 자체가 들어있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규정할 수 있는 것(용기 자체)만을 인식할 수 있는데, 우리가 감각할 수 있는 경험의 세계(용기 있는 여러 행동들)는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고, 이에 따라 사유할 수도 없다. 결국 우리가 경험적으로 용기 있음과 없음을 판별하려면 그 전에 이미 ‘용기’ 자체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에게 ‘용기’라는 이데아가 있기 때문이고, 상기를 통해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혼이 불멸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살펴본 구운몽의 성진도 양소유로 자라면서 여느 사람에 견줄 수 없이 (상기를 통해) 이치(이데아)에 통달해 간다. 이것은 전세에 행실을 닦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이번 강의에서 채운샘이 앎의 유용함에 대해 말씀해 주신 대목이 감동적이었다. “살면서 어려운 사건 혹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 그 동안 배운 모든 걸 동원해서 넘어갈 수 있는 힘을 키운다면, 그게 조금씩 쌓이고 쌓여서 무의식이나 습관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겠는가”이것은 현재 삶에서도 상당히 유용하지만, 일상의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패턴화한다면 다음 생에서는 지혜에 조금은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날 수 있지 않을까?
플라톤, 주희를 공부해보시렵니까? ㅎㅎ 영혼을 돌본다는 문제의식 속에서 '필로소피아'를 재해석하고, '이데아'라는 개념을 가져온다는 얘기를 들으니, 플라톤이 좀 더 가까워진 느낌입니다. ㅋㅋㅋ 시대적 상황과 그것을 인식하는 문제의식을 빼놓고 플라톤의 철학이 독재자니, 근본주의자니 뭐니 하는 게 폭력적이란 생각도 들었고요. 확실히 흥미로운 인물인 것 같아요!